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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물한 살 설날을 생각하며

수필

"어둠 속에 장승처럼 선
나무들에게 물었다
앞이 보이지 않는
내 인생을 어찌하냐고"


설날이다. 해마다 설이 오면, 스물한 살 때의 설날을 생각하게 된다. 그 해 설은 참으로 추웠다. 온 천지가 눈으로 덮였고, 눈이 많이 내리면 포근하던 여느 때와 달리 그 날은 바람 끝이 유난히도 찼다. 무논은 물론 저수지까지 꽝꽝 얼어붙고 소나무를 스치는 바람도 쇳소리를 냈다.

그날 밤, 무릎까지 쌓인 눈에 푹푹 빠지며 나는 산 속을 혼자서 한없이 걸었다. 그리고 어둠 속에 우뚝우뚝 장승처럼 서 있는 나무를 붙들고 물었다. ‘앞이 보이지 않는 내 인생을 어찌해야 하는가’ 나무에게 묻고 또 물었다. 바람이 불 때마다 나무는 이파리를 엎었다 뒤집었다 팔랑거리며 ‘살아보라’ ‘살아보라’고 나를 향해 온몸을 흔들어 댔다.

끝 간 데 없이 넓은 영산강이 내려다보이는 절벽에 서서 목이 터져라 소리를 질러도 메아리조차 없었다. 하지만, 강물이 흘러가며 몸을 뒤틀어 나직하게 들려주는 그 말을 나는 알아들을 수 있었다.

썰물 따라 시커멓게 모습을 드러냈던 뻘등도 밀물이 밀려오자 다시금 질펀한 강이 되었다. 살을 에는 찬바람을 맞으며 거기서 그렇게 한 밤을 꼬박 새웠다. 날이 새는 모습을 숨죽이며 지켜보았다. 멀리 산등성이를 따라 하늘과 땅 사이에 실금이 생기면서 깜깜하던 세상이 조금씩 조금씩 밝아오기 시작했다. 먼 산이 웅장한 모습을 천천히 드러내자, 가까운 산의 나무가 보이고, 그 위로 백조들이 날아올랐다. 어둠은 더디게 물러났다. 희뿌옇게 여명이 찾아왔다. 아스라한 강 건너 마을의 집들이 눈에 들어왔다.

다시 썰물이었다. 서서히 물이 빠지자 묻혀있던 개펄이 보이기 시작했다. 뻘등이 제 모습을 드러내자 큰 개옹이 나타나고, 시간이 지나면서 작은 물고랑까지 또렷이 보였다. 깨진 얼음조각들이 서로 부딪쳐 와글거리며 강물 따라 떠내려가는 소리가 들렸다. 갈대숲에서 새들이 푸드득 푸드득 날개 쳐 솟아올라, 마파람을 가르며 날기 시작한다. 강물에서 물고기 한 마리 퍼덕이며 튀어 오른다. 빠르게 흐르는 물길을 거슬러 힘차게 올라가는 저놈, 저 솟구쳐 오르는 모습이라니.

저곳 뻘 속에는 수많은 생명들이 숨죽이며 겨울을 나고 있을 터였다. 장어, 낙지, 맛, 게, 대갱이… 눈보라 치는 이 시절이 지나면 저들은 뻘 구멍에서 빠져나와 다시 세상을 활개칠 것이다. 그렇다, 지금은 내 인생의 겨울 한철일 뿐이다. 길을 찾자. 생각하는 대로 살지 않으면, 사는 대로 생각하게 된다지 않던가.

월출산 마루에 해가 떠올랐다. 눈이 부셨다. 나는 결단을 내렸다. 그래, 이제라도 학교에 가자. 스물한 살 나이에 고등학교에 입학하기로 마음을 정한 것이다. 내가 학생이 되다니! 가슴이 뛰었다. 이 순간부터 새롭게 인생을 시작하자. 내 앞에 펼쳐질 새 길을 생각하며 두근거림과 벅찬 설렘을 안고 집으로 돌아왔다.

병석에 누워계시던 아버님께 생각을 말씀드렸다. 아버지는 한참동안 나를 가만히 바라보셨다.

장남에게 공부 대신 지게질을 시켜야 했던 자괴감과 미안함, 늦게라도 학교를 가겠다는 아들에 대한 기대 등 아버지의 표정 위로 수많은 생각들이 스쳐지나갔다. 무거운 침묵이 흘렀다. 이윽고 당신의 손을 내밀어 내 손을 꼬옥 잡으시면서 내 길을 갈 수 있도록 허락해주었다. 누구보다도 우리 어머니, 집안일이야 내가 다 알아서 해나갈 것이니 걱정하지 말라며 어머님께서 적극 응원해 주셨다.

이렇게 하여 젊은 날의 방황을 마무리하고 새로운 삶을 시작하게 되었다. 지나고 보니 그 때가 내 인생의 갈림길이었다.

스물한 살 늙은(?) 고등학생이 된다는 것은 쉬운 일은 아니었다. 길렀던 머리를 박박 깎고 한참 아래 어린 후배들과 함께 배워야 하는 것쯤이야 각오한 일이지만, 녹슬었던 머리를 되돌려놓는 것과 돈을 벌면서 학교에 다닌다는 것은 예상보다 훨씬 어려웠다. 인생이란 절대 호락호락 하거나 만만한 게 아님을 하나씩 배워나가기 시작했다.

더디지만 한 걸음씩 나는 내가 정한 길을 따라 걸어갔다. 숨차게 내달아 마침내 가파른 언덕 하나를 올라섰고, 다시금 산을 넘고 파도를 건너 내 길을 갈 수 있었다. 인생에 있어서 중요한 것은 방향이지 출발이 몇 해 더 빠르고 늦는 것은 큰 문제가 아니라는 것과, 무엇을 시작하기에 너무 늦은 것은 없다는 사실을 체험을 통해 배우게 되었다.

되돌아보면, 내 길을 내가 걸어온 것처럼 보이지만 여기까지 당도할 수 있도록 고비 고비에서 나를 도와준 분들이 있었다. 하느님께서는 사람을 통하여 역사 하신다는 말을 배우면서 비로소 지난 날들이 그 분의 은총이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그 힘들고 어려웠던 순간 내 앞에 나타났던 그분들이 나의 하느님이었다는 사실을 깨닫게 되었다. 내가 살아가면서 만나게 될 어떤 이가 하느님일 수도 있고, 나 또한 누군가를 위해 하느님을 대신 할 수 있겠다는 생각도 감히 해 보게 되었다.

스물한 살 설날을 떠올리면, 고향이 저절로 따라온다. 흰 눈이 소복소복 많이도 쌓였던 고향의 산천과 칼바람을 맞으며 고뇌했던 그날 밤 풍경이 스쳐 지나간다. 나무들과 얘기를 나누고 바람한테 의견을 구했던 그 날을. 그리고 마침내 길을 찾아 집을 나서던 젊은 날의 내 모습을 반추해 보면서, 그 밤이 나에게 항상 기둥이 되고 힘이 되어왔구나 하는 생각을 하게 된다.

다시 설날이다. 스물한 살, 그 때의 기백과 두근거림과 설렘으로 올 한 해를 살아가야겠다. 아침에 뜨는 해를 감사와 감격으로 맞이하는 매일이 되도록 해야겠다.


정찬열 / 시인·수필가·미주중앙일보 신춘문예 등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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