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역별 뉴스를 확인하세요.

많이 본 뉴스

광고닫기

기사공유

  • 페이스북
  • 트위터
  • 카카오톡
  • 카카오스토리
  • 네이버
  • 공유

[우리들 사는 이야기] 미국 트럭커의 사는 이야기

첫 번째 이야기 - 미국 이민 오게 된 계기

우리가 사는 이 지구상에는 수많은 사람들이 수많은 직업에 종사하며 살고 있다. 또한 문명의 발달로 매년 많은 직종이 사라지고 많은 직종이 새로 탄생을 한다.
앞으로 20년 후에 우리가 다니는 직장의 50% 가 사라지고 인간이 할 수 있는 일의 영역을 인공지능이 대신하고 인간은 할 일을 점점 잃어간다는 발표를 하기도 했다. 그래도 당장 우리는 의식주 해결과 좀 더 나은 생활을 위하여 먼 미래를 생각하기보다는 당장 하루를 살아가기에 바쁘게 움직이고 있다. 그것이 현실이기에... 특히 이민자의 삶은 더욱 그런 것 같은 느낌이다.

나 또한 그 수많은 사람들과 함께 나의 일터에서 열심히 하루 하루를 살아가고 있다. 자율주행 트럭이 나오고 곧 트럭일이 인간이 아닌 인공지능이 점령할 것이다 예언을 하지만 아직은 먼 미래의 이야기로 들리는 건 현실이 급박하기 때문일지도 모른다. 이민자가 가지고 있는 선택의 좁은 길에서 미래를 부정하고 픈 마음에 .... 그러나 많은 사람들은 이민의 아픔보다도 새로운 세계의 동경과 미지의 알 수 없는 꿈을 안고 오늘도 공항 한구석에는 커다란 여행가방과 공항 통과 서류를 들고 이민창구를 빠져나오고 있다. 나도 한때는 그 대열에 서서 희망과 꿈을 안고 서 있었던 것이 엊그제 같았는데 벌써 10년이 넘어섰다. 돌아보면 어떻게 살아왔는지 무엇을 추구했는지 아무 생각도 안 난다. 기억하는 것이라곤 힘들었다, 바쁘게 살아왔다, 외로웠다, 그리고 그리웠다 이것만이 남는 것 같았다.

한국에선 군인인 아버님과 경찰 공무원인 큰아버님, 세무 공무원인 외삼촌, 국방부에 근무하는 작은 삼촌 그 외 여러 친척들이 모두 국가기관에 종사하며 살아가는 공무원 집안에서 자라서 나도 공무원의 길만이 살아가는 길인 줄 알고 아버님 뜻에 따라 삼사관학교에 입학을 하였다. 아버님처럼 평생 군인으로 살아가고 싶었지만 작은 격동의 시기인 한국사회가 나를 군에서 오래 머물게 하지를 않았다. 직장을 다니며 틈틈이 야간대학을 다녀 경찰행정학과를 졸업하였으나 그 길도 나에겐 아니었다. 그래서 또 다시 뛰어들어 사회복지학과를 졸업하여 사회복지 업무에 뛰어들었다. 나의 내면에 이런 면이 있었나 할 정도로 너무 적성에 맞아 행복한 직장생활을 할 수 있었다. 집사람은 놀부보쌈이란 체인점을 운영하며 남들이 말하는 부족하지 않은 돈을 벌 수 있었고 나는 안정된 직장을 다니고 있어 그냥 무난한 한국생활을 영위하고 있었다. 내겐 딸만 셋 있는데 큰놈은 대학3년 둘째는 대학1년 막내는 중3 모두가 무난한 학교생활을 하고 있었고 당시에는 잘 살지는 못해도 걱정과 부러울 것이 없이 살아왔던 것 같다.

그러던 중 오래전에 미국으로 이민 가 있는 동생이 한국 방문을 하여 우리 집에 머물게 되었다. 서로 이런저런 대화가 오고 가는 가운데 이왕이면 딸 아이 중에 한 명은 미국에서 키우는 것도 괜찮지 않느냐는 의견에 나이가 적당한 막내를 동생이 양녀로 입양하여 미국으로 데려가기로 하였다. 한국에서 모든 가정의 삶이 다 그렇지는 않겠지만 보통 가장은 직장에서 근무와 밤 문화로 집안 돌보기에 소홀하고 그냥 돈 벌어다주면 가장의 의무를 다한 듯이 생각하며 살아가고 있고 엄마만 혼자서 자식 챙기랴 집안 일 하랴 바쁘게 사는 게 보통의 한국가정이라 생각을 한다. 그러다 보니 난 딸아이의 변화를 무시하고 아이들이 무엇을 요구하는지 알지도 못한 채 일방적인 아버지의 결정으로 막내를 미국동생에게 양녀로 보냈다. 무조건 미국에 가면 잘 되겠지 하는 일방적인 생각과 미국이면 무엇이든지 이루어지겠지 하는 막연한 기대를 갖고 미국행을 선택하게 한 아버지의 결정은 시간이 지나 크게 잘못된 생각이었다는 것을 알았다. 막내는 그 당시 사춘기로 마음의 갈등 속에 살아가고 있었던 거였다. 그런 아이를 낯선 땅에 보내니 친구가 필요한 나이에, 대화 안 돼 부모의 사랑이 필요한 시기에 부모는 멀리 있고, 이민생활이 그렇듯 동생도 비즈니스에 발이 묶여 새벽에 나가 밤늦게 돌아오니 막내는 기댈 곳도 대화할 곳도 없이 사춘기를 힘들게 보내고 있었던 거였다. 동생도 나름대로 노력해 봤겠지만 결국은 미국 땅에 적응을 못하고 한국으로 돌아오게 되었다. 한국에 돌아오니 2년의 공백이 막내를 한국에서도 적응을 못하게 만들었다.

아버지의 독단적 결정이 큰 불씨가 되어 우리 가정에 가장 힘든 시기를 만들어냈던 것이다. 특히나 한국사회에서는 자식에 대한 교육열은 세계에서도 알아주는 터라 내게도 예외는 아니었다. 그렇게 막내 때문에 고민을 하던 중 미국 이민국에서 편지 한 통이 날아왔다. 이야기는 안 했지만 이 편지는 5년 전 어느 날부터 매년 한 번씩 날아오는 편지였다. 내용은 나의 초청 순번이 되었으니 이민 준비서류를 진행하라는 편지였다. 어느 날 느닷없이 날아든 편지에 영문을 몰라 자세히 알아보니 미국에 있는 동생이 형제초청을 하여 12년 만에 순서가 되었으니 서류진행을 하라는 내용이었다.

동생이 한마디 상의도 없이 우리를 초청하였다는 것도 이상하고 초청해놨다는 말도 들은 적이 없어 미국으로 전화를 하니 동생도 기억을 못하고 있었다. “내가 초청을 했었나? 글쎄 잘 모르겠네”라는 황당한 대답이었다. 아마도 이민을 간 동생이 처음엔 외롭고 힘들어 가족의 그리움과 외로움으로 생각없이 초청을 해 놓았던 것 같다. 당시에 공부하면서 변호사 사무실에서 근무를 한다는 소리를 들었는데 거기서 그랬던 것 같았다. 그 당시 나의 직장이나 집사람 사업이 번창하여 그리 이민이란 것을 생각하고 싶지도 않았고 이민을 가고 싶지도 않았다. 그래서 난 집사람과 의논도 없이 미국 이민국 편지를 버렸다. 그런데 서류진행이 안되니 매년 이 편지가 날아오는 거였다. 그렇게 5년을 관심 없이 버렸던 편지가 운명이랄까, 왜 그날은 그 편지가 관심이 있던지… 뜯어보지도 않고 버려왔던 편지를 그 날은 뜯어보게 되었다. 내용은 간단했다. ‘이제껏 너에게 편지를 보냈는데 서류진행이 안 되고 있어 마지막 편지를 보낸다.

이제 너의 서류진행 순서 기한이 다 되어 이번에도 서류진행이 안 되면 이민을 포기할 걸로 알고 이민 진행과정을 끝내겠다. 이민 올 뜻이 있는 것인가 없는 것인가’ 하는 질문이었다. 두 장의 편지에 한 장은 이런 질문이고, 한 장은 ‘이민 올 뜻이 있으면 YES에, 안 올 거면NO에 체크를 해라. 그리고 NO를 체크하는 공란에는 이민 안 오는 이유를 체크해라’ 하면서 ‘이민 오기가 싫어서, 이사를 해 편지를 못 받아서, 좀더 미루었다가 오려고 등등’ 여러 문구를 나열해 놓고 체크하라고 되어 있었다. 점쟁이가 그랬다. 난 외국물을 먹을 팔자라고… 그래서일까, 시기적으로 막내 때문에 고민을 하고 있던 때라 그 핑계로 난 YES에 체크를 하여 미국 이민국으로 편지를 띄웠다. 그것이 내 운명을 바꾸리라고 전혀 생각도 못하고....

(필자 김종박 약력)
중앙대 부속 중고 줄
육군 삼사관학교 18기
영주전문대 경찰행정 졸
동양대 사회복지과 졸
사회복지사
현) 코리아 시애틀 익스프레스 오너 및 오퍼레이터


Log in to Twitter or Facebook account to connect
with the Korea JoongAng Daily
help-image Social comment?
lock icon

To write comments, please log in to one of the accounts.

Standards Board Policy (0/250자)


많이 본 뉴스





실시간 뉴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