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삶의 뜨락에서] 누름돌
겨울나무는 을씨년스럽게 팔 벌리고 당당한 자세로 우뚝 서 있다. 그 틈새에 새들은 집을 짓고 보금자리를 만들어 새벽을 깨우며 얼음꽃들은 햇살을 받고 반짝이며 크리스털 보석이 나무마다 아름다운 성탄 트리가 되었다.잎이 진 나뭇가지가 모진 바람과 눈보라를 참고 견딜 수 있는 것은 따뜻한 봄이 있기 때문이다. 마음먹은 대로 살지 못하고 후회하며 한해 끝자락에서 지금의 인연들을 소중히 여기고 기쁘게 살라고 겨울맞이에 바쁜 바람은 일러준다. 내 인생에 겨울이 오고 있다며, 내려놓으라고.
인고의 삶의 뜰에서 무언가 위해 갈등하고 고민하는 삶을 머리에 이고 사는 사람들을 위해 서로 따뜻하게 물들어 가는 것이 행복의 비결이라는 것을 깨달아간다. 아들이 어렸을 때 방학이면 같이 여행을 다녔다. 해변을 거닐다 주어온 납작하고 반짝이는 돌들이 누름돌로 아직 쓸모가 있다. 한 줌 햇살도 즐겨 자라는 텃밭에서 깻잎·오이·고추는 단비를 맞고 더욱 풍성한 열매로 보답해 주었고 그것들을 간장과 설탕으로 각종 장아찌를 담가 유리병에 넣어 꾹 눌러서 올려놓으면 살짝 무거운 무게감이 장아찌를 서서히 숙성시켜주는 역할을 제대로 한다. 그런 누름돌은 유년의 고향 냄새가 나는 듯하다. 겨울 준비로 김장하는 날 소금에 절인 배추를 눌러주면 그 많은 배추는 숨이 죽어, 씻은 후 온갖 양념으로 버무린 김치를 독마다 가득 담아 누름돌로 지그시 눌러주면 시간이 지나면서 김장김치가 맛있게 익어가던 세월이 흑백사진이 되어 돌아간다. 어머니의 젊은 날 흐뭇했던 모습이 그리움과 함께.
스물여섯에 결혼 후 뉴욕에 이민 와서 서로 너무 다른 성격과 자란 환경 차이로 신혼의 갈등이 심해지면서 외롭고 그리움과 절망의 고통 속에서 견디기 힘든 시간에 어리석은 생각도 했다. 지금까지 내게 주어진 일들을 얼마나 성실하게 실천하며 살아온 것일까 자문해 보면서 색깔이 다른, 인내의 시간으로 서로 닮아 가기도 하면서 조화를 이루며 평안의 시간이 흐른 후, 내년이면 어느덧 결혼 50주년이 된다. 전에 직장에 있을 때 35주년 결혼 얘기로 눈을 크게 뜨고 “싫증 나지 안았어?” 하고 묻던 미국인 동료들이 떠올랐다.
옛 어른들은 누름돌 하나씩 가슴에 품고 사셨다. 어느 부모인들 별반 다름이 없을 것이다. 모난 데를 둥글게 가다듬으며 인생의 겨울 앞에서 정신적인 열매인 이타적 사랑으로 얻어지는 삶이 때로는 나누고 싶은 풍성함이 없는 것이 아니고, 나누고 싶은 마음이 없는 현실이 서글플 뿐이다.
우리는 신발 신는 시간에 겸허를 배운다. 제아무리 권력과 부와 명예를 누리는 사람일지라도 이때만큼은 고개를 숙인다. 오래전 텃밭을 일구다 찾아낸 미끈하고 예쁜 돌을 간직했다. 싱크대 밑에서 다시 찾아내고 요즘 그것을 내 삶의 누름돌로 사용해야겠다는 생각을 했다. 바꿀 수 없는 것에 집착하며 살아오지 않았나 반성하며 조용히 받아들여 평온한 시간을 가지고 싶다. 송곳이 마음을 후벼 파도 희생과 사랑으로 아픈 시간을 견디며 누름돌 하나 지긋이 올려놓을 것이다. 스치듯 던진 말 한마디에도 쉽게 상처받고 돌아선 감정도 꾹 눌러 서로 이해하면서 지그시 누르고 회개하는 심정으로 서로에게 누름돌이 되어주는 연말과 새해 경자년을 맞이하고 싶다.
이재숙 / 수필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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