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아침에] 금수저 아들, 흙수저 아들
그가 죽었다는 소식을 들었다. 그의 아버지가 생각났다. 그의 아버지는 내가 대학 다닐 때 우리 과의 학과장 교수였다.이생에서 그와의 인연은 그날 짧은 스침이 전부다. 그날, 대학 졸업식 날, 그도 나도 졸업생이었다. "지금도 마로니에는…" 이런 노래로 유명해진 문리과 대학 교정, 우리 때는 여기서 입학식과 졸업식을 했다.
그때는 이 대학을 졸업하는 것은 '가문의 영광'으로 여겨졌다. 우리 '가문'에서는 어머님, 그리고 시골에서 올라오신 삼촌, 이모, 그렇게 단출한 '축하 사절'이 왔다. 당시 대통령이 축사를 하고 졸업생들 중 소수의 선택 받은 몇 사람들이 이런저런 상을 받는 엄숙한 행사가 지루하게 끝났다. 나는 구경하는 다수 중의 하나였다.
단과 대학별로 서 있던 대오가 흐트러지며 축하객들과 졸업생이 자연스럽게 섞였다. 우리 식구들은 꽃다발, 사진 등 '서울스러운' 축하 의식을 어색하게 바라보았다. 어머님께서 눈물을 글썽거리시며 내 어깨를 두드려 주실 때는 나도 눈물이 날 것 같았다. 혼자서 아들 하나 대학까지 보내신 엄마, 그 맘을 알 것도 같았다.
그때 그의 아버지이며 나의 교수님이신 그분이 내 이름을 불렀다. "김지영이 사진 한 번 같이 찍자." 의외였다. 그리고 고마웠다. 나는 대학 4년 동안 그렇게 눈에 띄는 학생이 아니었다. 그 교수님 방에서 몇 번 번역 심부름을 한 적이 있지만 그분의 총애를 받을 만한 제자는 아니었다.
교수님과 사진을 찍는 영광, 그리고 그 감격. 그런데….
그 다음 말씀에 당황했다. "모자 위의 그 술(tassel)을 좀 빌려줘." 졸업식장에서 입는 졸업복과 모자를 졸업식 직전에 나누어 준 것이었다. 사각 학사모에는 황금색 술이 달려있었다. 교수님 아드님, 그가 받은 학사모에는 그 술이 없었던 모양이다. 그 술을 나에게 빌려 달라는 것이었다.
나는 내 모자에서 술을 풀어서 교수님께 드렸다. 교수님은 아드님의 모자에 나의 술을 걸어 주셨다. 그는 아버지를 닮아서 훤칠한 키에 귀공자 타입이었다. 교수님과 그의 가족은 행복한 기념 사진을 여러 번 찍었다.
그 교수님은 졸업 후에도 여러 번 뵈었다. 내가 서울에서 영자지 기자를 할 때 그 교수님은 그 신문의 고정 칼럼을 쓰셨다. 신문사에 오실 때마다 나를 찾았고, 같이 저녁도 먹고 소주도 마셨다. LA에 오셨을 때는 내가 동문들을 모아 환영회를 마련하기도 했다.
세월이 지나며 그때 서운함은 사라졌다. 그러나 그 순간의 헛헛한 서글픔은 아직도 내 기억 어느 구석에서 가끔 서걱거린다. 46년 전의 일이다. '금수저' '흙수저' 이런 말들이 일상화되기 훨씬 전의 이야기이다.
아버님의 자상한 배려, 모든 아들들이 향유하는 것은 아니다. 그렇다고 그걸 갖지 않는 아들들이 공평성이라는 잣대로 분노만 할 수는 없다. 부족한 것은 부족한 그 곳에서부터 채워 나갈 수밖에 없는 것이 인생이다. 이제 교수님도 돌아가시고 그 아드님도 세상을 떠났다. 그때 그 순간을 인간의 원초적 자식 사랑 자연스러운 한 장면으로 볼 수 있을 것 같기도 하다.
김지영 / 변호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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