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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제수용된 일본계 11만 명의 흔적

만자나 강제수용소(Manzanar National Historic Site)

프랭클린 루스벨트 대통령은 1942년 2월19일 행정명령 9066호에 서명해 적성국가 출신들을 강제적으로 거주지에서 내쫓아 수용소에 수용시겼다. 만자나 강제수용소에는 캘리포니아와 LA지역 일본계 미국인들 1만여명이 1942년 5월부터 1945년 11월까지 약 3년간 수용되었다.

프랭클린 루스벨트 대통령은 1942년 2월19일 행정명령 9066호에 서명해 적성국가 출신들을 강제적으로 거주지에서 내쫓아 수용소에 수용시겼다. 만자나 강제수용소에는 캘리포니아와 LA지역 일본계 미국인들 1만여명이 1942년 5월부터 1945년 11월까지 약 3년간 수용되었다.

강한 바람이 부는 오웬스 밸리에 위치한 이 사적지는 복원된 건물들과 사진, 영화, 구술 기록, 쌍방향 디스플레이 등을 통해 역사적 경각심을 불러 일으킨다. 방문자 센터 인근 14구역에 복원된 막사의 모습.

강한 바람이 부는 오웬스 밸리에 위치한 이 사적지는 복원된 건물들과 사진, 영화, 구술 기록, 쌍방향 디스플레이 등을 통해 역사적 경각심을 불러 일으킨다. 방문자 센터 인근 14구역에 복원된 막사의 모습.

방문자 센터에서는 22분 가량의 ‘만자나를 기억하며(Remembering Manzanar)’라는 영화가 30분마다 상영된다. 당시 수용된 일본계 미국인이 막사에서 생활하는 모습을 찍은 사진.

방문자 센터에서는 22분 가량의 ‘만자나를 기억하며(Remembering Manzanar)’라는 영화가 30분마다 상영된다. 당시 수용된 일본계 미국인이 막사에서 생활하는 모습을 찍은 사진.

당시 수용됐던 사람들의 이름을 적은 위령비. 1992년 부시 대통령은 ‘일본인 강제수용은 미국 역사의 오점이며 미국 국민을 대표해 공식으로 사과한다’는 성명을 발표했다.

당시 수용됐던 사람들의 이름을 적은 위령비. 1992년 부시 대통령은 ‘일본인 강제수용은 미국 역사의 오점이며 미국 국민을 대표해 공식으로 사과한다’는 성명을 발표했다.

에드거 케이시(Edgar Cayce)는 미국에서 가장 불가사의한 사람, 20세기 최고의 예언자로 불린다. 그는 1929년 대공황을 예견했고, 1935년 오스트리아, 독일 그리고 일본이 함께 손잡고 세계2차대전을 일으킬 것이라는 예언을 했다. 2차대전 이후 유대인의 이스라엘 탄생과 광우병, 소련 해체를 정확히 예언하는 등 인류의 운명에 관한 수많은 예언을 했다. 그리고 대량살상용 미사일이 LA를 겨냥해 극동지방에서 발사 된다고 예언 했다.



대량살상용 미사일이 LA를 겨냥해 북한에서 발사됐다. 미국의 강력해진 제재와 경제적 파탄, 선제공격 가능성으로 국가 존속의 절대절명 위기에 처한 북한이 미국에 선전포고도 없이 선제 공격을 한것이다. 그러나 미 본토에서 270마일 떨어진 지점에서 미국의 대공방어 미사일이 이를 요격해 수많은 사람들의 목숨을 구했다. 전쟁이 발발한 것이다.

미국은 전시상태를 발령함과 동시에 LA를 중심으로 미 전역에 흩어져 체류하는 한국인 영주권자, 학생, 주재원, 여행자에게 수일내 미국에서 강제출국할 것을 명령했다. 그리고 한국계 미국인인 시민권자 한인들을 오지의 집단수용소에 수용하기 시작했다. 이 가상의 이야기는 미국에 사는 한국인 이민자로서는 상상하기도 싫은 끔찍한 얘기다.

실제로 미국은 2차 세계대전이 발발하고 일본이 진주만을 공격하자 국가안보를 명분으로 약 11만명의 일본계 미국인들을 강제수용했다. 일본인들은 일찌기 하와이로 이민와 성공적으로 정착을 했고 1900년대 초에는 캘리포니아로 이주해 농업을 했다. 일본인들의 숫자가 늘어나고 경제적으로 성공해 나갔다.

일본의 진주만 공격으로 볼모가 된 일본계 미국인들은 전쟁과 무관한 선량한 미국시민들이었다. 같은 시기 적대 국가였던 독일계나 이탈리아계 미국인은 감시를 했을뿐 집단 강제수용은 하지 않았다. 일본계 미국인을 강제수용한 것은 어떻게 보면 미국 백인에 의한 동양인 인종차별이었는지도 모르겠다.

미국은 정치적, 사회적, 경제적 위기에 직면하면 특정 민족이나 인종, 새로운 이민자에게 책임을 전가하고 박해한다. 미국 역사상 차별과 천대받은 대상들은 흑인노예, 미국원주민, 동양인이다. 미국은 1800년대 미시시피강 동쪽에 살던 인디언들을 오클라호마로 강제 이주시킨 전력이 있다. 지금도 미국의 일부 정치인들은 인종차별적 정책과 발언을 스스럼없이 한다.

LA를 출발해 캘리포니아 내륙을 종단하는 395번 국도를 따라 북상하면 데스 밸리 서쪽입구 마을 론 파인(Lone Pine)이 나오고 16마일 더 올라가면 2차대전시 일본계 미국인들을 수용했던 지금은 국립사적지가 된 만자나 강제소용소가 나온다. 만자나는 LA와 캘리포니아 출신 일본계 미국인 1만여명을 집단수용했던 뼈아픈 역사의 현장이다.

1941년 12월 7일 진주만 기습 이후 1942년 2월 23일 일본 잠수함이 캘리포니아 앞바다에 나타나 사격을 가하고 사라지자 서부해안 방어를 위해 캘리포니아, 오리건, 워싱턴주 일본인들을 우선 강제수용했다. 약 11만명의 일본계 미국인을 10곳에 나눠 수용했다.

서부지역 방위사령관인 존 드윗 장군이 이 지역 일본인들이 폭동과 사보타주할 가능성이 있다고 국방부에 보고한 것이 결정적인 계기가 되었다.

1942년 5월 3일 서부지역 방위사령관인 존 드윗의 포고문이 발표되었다.

"5월 9일 정오까지 모든 일본계는 정부에서 지정한 장소로 집합할 것. 이 시간부터 일본인들은 주거를 옮기는 것을 금함. 소지품은 1인당 트렁크 2개만 가능. 나이프와 포크, 숟가락, 접시, 컵, 밥그릇, 냄비 등을 지참할 것."

만자나에 강제수용된 일본인들은 비좁은 수용소 생활보다 한여름에 화씨 110도 이상 오르는 사막의 뜨거운 열기와 겨울의 추위에 고생했다. 인권은 상상할 수 없는 단어였다.

일본인들은 만자나 강제수용소에 1945년 11월까지 약 3년간 갇혀 지냈다. 수용소에서 멸시를 받으며 살고 있던 일본계 미국인 청년 1200명이 미군에 자원입대해 이탈리아에서 전공을 올렸다. 당시 LA에 살던 한국계 미국인 김영옥은 442연대 100대대의 작전장교(김영옥 대령은 미군 최초 동양인 출신 전투부대 대대장이었고 한국전에도 참전한 전쟁 영웅이다)로 일본인들을 이끌고 참전해 이탈리아와 프랑스 정부로부터 최고 무공훈장을 받았다.

만자나 수용소는 1972년에 캘리포니아주 사적지로 지정이 되고, 1988년 미국정부는 당시 강제수용되었던 일본인들에게 1인당 2만 달러씩 보상했다. 1992년에 부시 대통령은 '일본인 강제수용은 미국 역사의 오점이며 미국 국민을 대표해 공식으로 사과한다'는 성명을 발표했다.

만자나는 한국인과 직접적인 관련은 없지만 이시기 한국을 식민통치했던 일본이기에 감정적으로 자유롭지 않은 곳이다. 한반도의 평화와 민족번영을 걱정하는 미국에 사는 한국인 이민자로서 한번 쯤 들러봐야 할 곳이 아닌가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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