헐값에 사들인 광활한 땅의 지도 그렸다
루이스와 클라크 탐험대
오리건주 북서부와 워싱턴주 남서부에는 이들이 탐험을 하며 생활했던 흔적들이 곳곳에 남아있다. 아스토리아시에서 해안선을 따라 남쪽으로 10여마일을 내려가면 인구 6000명을 조금 넘는 작은 도시 시사이드(Seaside)가 나온다. 탐험대는 해안을 따라 이곳까지 탐사했다.
클라크의 기록에 의하면 그들은 시사이드에 머물며 바닷물을 끓여 소금을 만들었고 130여마리의 순록과 20여마리의 사슴을 사냥해 겨울을 지냈다. 또 이 지역의 식물, 물고기, 야생동물 등 자연환경과 인근 인디언들을 접촉해 그들의 외모, 생활습관, 거주환경도 면밀히 관찰해서 기록으로 남겼다. 탐험의 끝지점이었던 시사이드 해변에는 그들의 업적을 기리는 동상이 서있고 그들이 소금을 만들었던 지점에는 동판이 새겨져 있다.
미국은 1776년 독립 당시 대서양 연안에서부터 애팔래치아 산맥에 걸쳐 있는 13개 주로 이루어진 대서양 연안국가였다. 신생국가 미국은 1803년 3대 대통령 토머스 제퍼슨의 주도하에 나폴레옹의 프랑스로부터 헐값에 루이지애나 땅을 사들였다. 프랑스는 1762년 영국과의 7년전쟁 패배 후 영국이 루이지애나 영유권을 요구할 우려가 커지자 스페인에 이를 양도했다. 1800년 나폴레옹이 스페인에 압력을 가해 이 땅을 다시 찾았다.
프랑스의 탐험가 라 살(La Salle)에 의해 루이 14세를 기려 명명된 루이지애나 영지는 사실 그 누구도 땅의 넓이를 정확히 알지 못했다. 루이지애나는 당시 미국 영토의 두 배나 되는 광대한 지역이었다.
현재의 아칸소, 미주리, 아이오와, 오클라호마, 캔사스, 네브래스카, 미네소타, 사우스 & 노스 다코타, 몬태나, 와이오밍, 뉴멕시코, 콜로라도, 텍사스를 포함하는 약 83만 스퀘어마일에 해당하는 광활한 땅이었다.
미국은 나폴레옹 정부에 한반도의 10배나 되는 거대한 땅을 인류 역사상 가장 황당한 가격인 1㎢당 7달러라는 헐값에 사들였다. 미국은 루이지애나 매입을 계기로 본격적인 서부 개척 시대가 열리며 대륙국가로 성장해갔다. 역사가 헨리 애덤스는 '세계사적 사건'이라고 단정했다.
1800년대 초 오리건 지방은 러시아에 속해 있었고 캘리포니아 태평양 연안에서부터 로키산맥까지는 스페인이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었다. 제퍼슨 대통령은 루이지애나를 사들인 이후 매입한 땅을 탐사하고 대륙을 관통하여 태평양까지 이어지는 교역로 확보를 선점하기 위해 서둘러 루이스, 클라크 서부 탐험대를 파견했다.
탐험대는 1804년 5월 14일 미주리 주의 세인트루이스를 출발해 미주리 강을 따라갔다. 아이오와, 캔자스, 네브래스카, 사우스 다코타, 노스 다코타, 몬태나를 지나 로키 산맥을 넘고 워싱턴주를 횡단해 오리건 태평양 연안을 확인하고 1806년 9월 23일 복귀한 28개월의 여정이었다.
탐험대는 합법적인 땅 소유권을 주장하기 위해 미 북서부 지역을 확인하고 약 140장의 정확한 지도를 그렸다. 이 지도는 로키 산맥 너머 오리건 지역에 대한 영유권을 주장하는 유력한 근거가 되었다.
탐험대는 미시시피강 너머 알려지지 않았던 서부의 기후와 자연생태와 24개 인디언 부족들의 위치, 삶, 활동 그리고 문화를 관찰하고 기록했다. 탐험대는 인디언들에게 제퍼슨 대통령의 은메달과 기념품을 선물하며 미국이 통치하는 지역임을 시사했다.
'루이스와 클라크의 답사기'는 미국을 초강대국으로 만든 미국인의 서사시이다. 석양이 아름다운 오리건 북서부 태평양과 컬럼비아강 하구에는 루이스와 클라크 탐험대의 흔적이 곳곳에 남아 있다.
with the Korea JoongAng Daily
To write comments, please log in to one of the accounts.
Standards Board Policy (0/250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