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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성 로그인] "찾으면 다 나와, 잊어도 돼"

지난 마더스데이에 선물을 고르려고 인터넷 쇼핑몰을 몇 군데 돌아다녔다. 시간 가는 줄 모르고 둘러보다 브라우저를 닫았다.

며칠 지나 노트북을 열었는데, 페이지 오른쪽에서 내가 그날 구경했던 바로 그 신발이, 그 가방이 광고 배너의 주인공으로 등장한다. 화면 아래쪽에선 장바구니에 담아뒀던 화장품이, 영양제가 줄줄이 흘러간다.

나는 네가 지난번에 뭘 보고 혹했는지 다 알고 있다면서 찜을 했던 물건을 콕 찍어 줄 세운다. 이거 마음에 있잖느냐고, 잘해줄 테니 어서 와 클릭하라고 팔을 잡아끈다.

가물거리는 기억이 가물거린다는 사실을 채 깨닫기도 전에 빠릿빠릿한 인공지능 로봇이 내가 접속한 순간 바로 들이닥쳐 느슨해져 가는 기억의 회로를 부지직 이어주는 경험이 점점 잦아진다.

그 경험을 역으로, 가성비 좋네 하며 지나쳤던 자동차용 청소기 모델을 남편에게 알려주려다가 기억이 안 나 브라우저를 열면 어김없이 광고 상품으로 변신 등장해주니 어김없이 확인할 수 있다.

내 서핑 히스토리를 고스란히 빼가는 AI를 약삭빠르게 써먹었다는 쾌감에 잠시 우쭐도 하지만 생각하면 인공지능의 단맛에 중독된 무기력한 내 미래가 염려되기도 한다. 이미 나는 기억력의 일부를 스마트폰에 내어주고 '외장하드'로 곁에 두고 사는 자발적 종속자다.

식구 친지들의 전화번호·생일·기념일·주소 다 적힌 오래 묵은 수첩, 처리할 일과 약속 촘촘히 정리한 스케줄 노트, 나중에 써먹자고 그때 그때 적어둔 메모장은 물론 예전에 배운 것, 요즘 새로 익힌 것 되살릴 필요가 있을 때 냉큼 서치해서, 마치 예전부터 알고 있는 정보인 양 행세하게 해주는 엽렵한 백과사전이 그 안에 다 들었다.

흘려들어도, 스치고 지나쳐도 안심이다. 정확히 어딘지 모르지만 그 어딘가에 다 들어 있어 괜찮다.

'돌아서면 잊어먹는다'는 인생 선배들의 한결같은 푸념이 내 고백이 될 줄 미처 몰랐던 몇 해 전만 해도 나는 스마트폰이나 인공지능의 능력에 의존하지 않는 '깨어있는 삶'을 불끈 다짐했다.

하지만 냉장고에서 뭘 꺼내려고 했는지, 이층 계단은 왜 오르기 시작했는지, 집 나서는 남편을 왜 불러세웠는지 뇌 회로가 십 초씩 깜빡 깜빡 점멸등을 켜는 요즈음이 됐다.

더구나 한창 이야기 중에 누구의 이름이나 사건 발생일이나 오간 돈의 액수나 가격 뭐 그런 키포인트가 죄다 그 왜 있잖아 그 사람, 90년댄가 2000년댄가 그 무렵에, 아마 삼백불이었나 오백불이었나 아무튼…으로 흐리멍덩 뭉뚱그려질 때의 당혹감은 자괴와 자책으로 스스로를 갉기 일쑤다.

그럴 때 스마트폰을 열어 '검색' 의 능력을 빌릴 수 있는 것은 얼마나 다행인지. 잠시만 몰랐던 것으로, 잠깐 기억이 안 나는 것으로 심상히 넘어갈 수 있으니 진정 행복하다. 안개처럼 갑갑한 엉킨 기억의 회로에서 벗어날 수 있으니 더없이 감사하다.

적당히 잊고, 적당히 흘러가는 기억 떠나보내고, 적당히 인공지능과 스마트한 전화기의 능력에 기대며 살아가는 좋은 시절을 그냥 누려보기로 한다. 좀 잊으면 어때, 찾으면 다 나오는데, 궁금하면 물어보면 되는데.


최주미 디지털부 부장 choi.joomi@koreadaily.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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