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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재원 칼럼] ‘블프’와 ‘삼바’

'블프’. 지난 주 한국 신문에 자주 등장한 단어다. “美 블프 시작” “블프 미국 인기템” “블프 직구족 주목!”…. 잠시 '이게 무슨 말이지?' 했다가 기사 본문을 읽고서야 ‘블랙 프라이데이’를 그렇게 줄여 부르고 있다는 것을 알았다.

인터넷을 비롯한 각종 통신수단의 발달로 한국에서 미국 내 유통업체들의 블랙 프라이데이 행사에 참여하는 쇼핑객이 점점 늘고 있다. 직접 쇼핑이 어려운 이들은 친구나 지인에게 부탁을 하고, 틈새 시장을 노린 구매 대행업체까지 생겨났다고 한다. '외제' 좋아하고, 해외 문화에 대한 선망이 큰 한국인 성향의 또 다른 면모다.

‘블프’보다 더 어색한 단어는 ‘삼바’였다. 처음엔 브라질 민속 춤 삼바(Samba) 또는 디즈니 만화영화 라이언 킹의 주인공 ‘심바’(Simba)로 보였다.
알고 보니 삼성그룹 제약 바이오 산업체 ‘삼성 바이오 로직스’를 그렇게 쓰고 있었다.

한국 금융위원회 산하 증권선물위원회가 삼성 바이오 로직스의 3년 전 회계처리 변경을 고의 분식회계로 결론 짓고 법인에 대한 검찰 고발, 대표이사 해임 권고 등의 제재를 했다. 이 회사는 주식 거래 정지와 상장 폐지 대상에까지 올랐다.

‘삼바’가 관심을 모은 것은 제일모직과 삼성물산의 합병에 주요 역할을 했고 이는 삼성전자 이재용 부회장의 그룹 승계권에도 직접적인 영향을 줬기 때문이다.
이 묵직한 뉴스를 다루면서 기업명을 그렇게 줄여 부르는 것이 다소 코믹하게 느껴지기까지 했다.

삼성 바이오 로직스를 ‘삼바’로 불러도 한국에서는 모두가 다 알아들을 수 있는 건가. 경제계 최대 권력 삼성이 회사 이름을 부정적인 뉴스에 조금이라도 덜 노출시키고 싶어 어거지 줄임말을 쓴 게 아닌가 하는 생각마저 들었다.

‘블프’와 ‘삼바’는 언어의 축약을 통한 묘미를 느끼게 한다기 보다 왜곡 또는 오도에 가깝다.

하긴 ‘영어 유치원을 ‘영유’로, 일반 유치원을 ‘일유’로 부르는 게 요즘 한국인들의 언어 습성이자 문화다. 상대가 알아듣든 말든 무조건 줄여서 사용한다.

'의사소통의 기본 수단'이라는 언어의 역할이 무시되고, 민족 정체성의 상징인 우리말이 지나치게 훼손되고 있다는 감을 지울 수 없다. 10대들이 끼리끼리 사용하는 은어가 아니라 신문 방송에까지 버젓이 등장하고 있으니 안타까울 따름이다.

시인 이해인 수녀는 '우리의 말이 향기로우려면'이라는 글에서 이렇게 말한다. “글씨를 배우고, 피아노를 배우고 뜨개질을 배우듯이 삶의 질을 높여주는 좋은 말을 배우는 데도 많은 연구와 노력의 연습 과정이 꼭 필요한 것 아닐까”.

어쩌면 한국 밖에서 살아가고 있기 때문에 우리말에 대한 애착이 더 강해지는 것인지도 모르겠다. 언어의 힘, 언어가 사고와 가치•문화에 미치는 영향을 절감하며 살고 있으니까.

줄여 말하기 좋아하고 외래어 좋아하는 현대 한국인의 언어 습성은 필요한 절차와 권위마저 부인하게 만든 왜곡된 급성장 과정, 식민지 역사, 상대에 대한 배려가 없는 사회 문화의 산물이 아닌가 돌아본다.

말과 글은 이를 사용하는 사람과 집단의 수준을 반영한다. <발행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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