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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재원이 만난 사람] 60여년 역사와 법 탐구 인생 함성택 박사

무엇을 하고 사나
좋아하는 일을 하나

“힘들죠? 언론이라는 게 쉽지 않을 텐데 어려운 용단을 내렸어요.”

인터뷰를 위해 만난 함성택(82) 박사는 격려의 말씀부터 먼저 꺼냈다. 7년 전 발병한 파킨슨 병으로 몸은 불편한 상태지만 상대에 대한 배려가 우선이었다. 그는 현재의 자신을 "하나님의 은혜이자 축복"이라고 말했다.

1936년 일본에서 태어난 함 박사는 해방 무렵 부모님과 함께 충청남도 서천으로 이사했다. “제가 강릉 함씨인데 조부 때 서천으로 터를 옮겼어요. 조부와 백부께서 천도교 충청지역 리더였죠.”

경기중학교를 졸업한 그는 1955년 서울대 사학과에 입학했다. 대학 입학 직후부터 해외 유학을 꿈꿨지만 병역 문제를 선결하느라 해군에 입대했다. 입대 후 우연찮게 중화민국 장개석 장학생을 뽑는다는 공고를 봤고 배짱으로 지원했다. 모두 7명을 선발했는데 당초 뽑히질 못했다가 심사관 중 한 명이 "어린 친구를 후원하면 양국 간의 우호 증진에 더 큰 도움이 될 수 있다"며 별도의 예산을 마련, 최연소 지원자 함성택을 추가 선발했다.

대만대학 문학원(문과) 역사학과 학생이 된 그는 이후 법학을 공부했다. 하지만 유학은 말처럼 쉽지 않았다. 중국어에 익숙치 않아 학점 대부분이 C, D였다고 한다. “국제 학생으로만 구성된 40명 학우 중 중국어를 제대로 할 수 있는 사람이 거의 없었다. 노력만으로는 한계가 있더라.”

졸업 무렵 그는 또 다른 미지의 세계를 향한 동경을 품었다. 미국이었다. 앞서 미국으로 유학을 간 친구들의 권유도 한 몫 했다. 여러 곳에 원서를 냈지만 대만대학 시절 낮은 학점이 걸림돌이 된 탓인지 오하이오주립대 한 곳에서만 입학 허가를 받았다. 장학금은 거의 없는 조건이었다.

오하이오 도착 후 1~2주일이 지났을 무렵 여러 사람을 거쳐 편지 한 통이 전달됐다. 네브라스카대학에서 장학금과 함께 입학을 허락한다는 내용이었다. 급히 짐을 싸서 간 네브라스카에서의 학업 역시 녹록치 않았다. 대학 풋볼 팀 음식 담당(Cook)과 장비 정리를 맡아 학비와 생활비를 벌어야 했다.

게다가 영어 때문에 학점이 안 좋아 학업 중단 위기까지 몰렸다. 다행히 일본인 교수가 다른 교수진에게 “당신들은 영어 밖에 할 줄 모르지만, Mr. 함은 비록 영어는 서툴러도 한국어와 일본어, 중국어, 독일어까지 한다. 앞날이 창창한 젊은이를 믿고 격려하자”고 설득해 과락은 면했다.

네브라스카 대학에서 학업을 마친 함 박사는 1964년 성탄절 무렵 시카고로 이주했다. 너무 오래 된 탓인 지 시카고에서 다니려던 학교 이름도 가물가물 하다는 그는 시카고에서의 첫 날만큼은 또렷하게 기억했다.

네브라스카에서 온갖 살림살이를 싣고 온 낡은 자동차가 멈출까 봐 시동을 걸어둔 채 아파트 렌트 사무실로 들어간 게 화근이었다. 잠시 후 돌아왔을 땐 자동차가 사라지고 없었다. 신분증은 물론 네브라스카 대학 풋볼 팀 감독이 건넨, 적지 않은 액수의 격려금까지 모두 잃어버렸다.

추운 거리를 서성이던 그에게 경찰이 다가왔다. 자초지종을 들은 경찰은 “시카고 사람으로서 너무 미안하고 창피하다”며 그를 출판 관련 Follet사로 데려갔다. 마침 회사에 있던 Follet사 오너 아들이 낯선 이방인에게 일자리는 물론 당장 지낼 아파트 렌트비까지 지원했다. 당시만 해도 이민자가 적었던 탓인지, 서로 믿는 사회 분위기 때문인지, 신분증을 분실했지만 생활에는 큰 지장이 없었다고 한다.

이후 일과 학업을 병행한 그는 로욜라 대학에 적을 올리고 역사와 법학을 전공했다.

“돈 안 되는 공부만 평생 했어요.” 유학이라는 단어조차 생소하던 1950년대 말 일찌감치 유학을 결심한 그는 대만과 미국, 미국 내에서도 중서부 지역 여러 대학을 옮겨가면서 학업에 몰두했지만 좀 더 실용적인 학문을 하지 못한 것이 아쉽다며 "외아들에게는 공대 진학을 권유했다"고 털어놓았다.

1970년대 초반 한국의 한 대학에서 역사 관련 교수를 찾는다는 소식을 듣고 한국에 나갔지만 인터뷰도 못하고 돌아왔다. 그는 "네브라스카 대학에 다닐 무렵 현지 신문과의 인터뷰에서 5.16 박정희 정권에 대해 '군사정권은 민주로 가는 길은 아니다'라고 말한 게 이유였다"고 밝혔다.

미국에서 유학하는 동안 어머니를 잃은 8남매의 맏이인 함 박사는 이후 동생들을 차례로 미국으로 불러들였다. 학업과 가족을 동시에 챙기기 위해 택시 운전대까지 잡는 등 여러 직업을 거친 그는 우연찮게 들어간 사탕제조업체(American Home Products)에서 38년 간 일하게 된다.

“학업을 병행하기 위한 근무 여건도 좋았고 보수도 많았다. 당시 미국은 성실하게 노력하면 누구나 좋은 대우를 받을 수 있었다.”

시카고에서 한미역사학회 설립을 주도하고 한인문화회관 박물관장(현 고문), 킴보•한미장학재단 등에서도 활동한 그는 한글학교와 노인학교 설립에 심혈을 기울였다. 그는 “한글학교가 지금은 1.5세나 2세가 다니는 곳이 됐지만 원래는 성인들을 위한 곳이었다”고 설명했다. 20세기 초반 하와이에 이주를 한 한인들이 성경을 읽으려고 해도 한글을 몰라, 이들을 가르치기 위해 1903년 처음 설립됐다고 한다.

평생 공부만, 그것도 역사와 법이라는 분야에만 천착해온 그에게 미국은 어떤 나라인지 물었다.

“미국에 산 기간이나 경험, 시기에 따라 다르겠지만 개인적이고 정직한데다 약자를 도울 줄 아는 사회다. 요즘은 자본주의의 단점이 지나치게 노정되는 것 같다. 부자는 더 부자가 되지만 가난한 이는 더 가난해지는. 시골은 아직 안전하고, 타인을 도울 줄 아는 ‘키다리 아저씨’의 모습이 남아 있지만 도시는 각박하다.”

함 박사는 그러면서도 미국은 기술과 머리, 노력이 있고 사회의 기본적 룰만 잘 지키면 별 탈 없이 잘 살 수 있는 곳이라고 설명했다.

다시 인생을 시작할 수 있다면 해보고 싶은 일이 많다는 그는 ‘박사는 안 할 것’이라고 웃으며 말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지금도 서재필 박사, 김영옥 대령 등 미주 한인 초기 이민사회를 주도한 이들의 자료를 하나 하나 정리하는 등 태생적 학자의 면모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인터뷰 도중 파킨슨 병 증상 완화제를 꺼내 먹던 그는 “정신적으로 병을 극복하는 것은 어렵지 않지만 육체적으로 이겨내는 것은 쉽지 않다”고 고백했다. 우리들 삶의 흔적을 기록으로 남겨두는 일을 누구라도 해야 한다는 생각을 새삼 다시 갖게 해주었다.

함 박사는 “무엇을 하고 사느냐도 중요하지만, 좋아하느냐도 소중하다”고 강조했다. 그는 "어떤 양복을 입고 구두를 신느냐에 크게 개의치 말라"면서도 "요즘 세상에서는 '얼마를 버느냐’도 중요한 것 같다"고 덧붙였다. 자본주의의 극단으로 치닫는 현대 사회를 바라보는 노 학자의 안타까움과 아쉬움이 묻어났다.

인터뷰를 마친 후 손수 운전을 해서 떠나는 함성택 박사를 바라보며, 같은 질병을 겪은 권투 선수 무하마드 알리의 '화려했던 링 위의 모습'이 떠올랐다. 격렬한 운동과 책상 위에서의 치열한 공부는 얼핏 극과 극처럼 보이지만, 한계를 극복하기 위해 끊임없이 노력해가는 아름다운 인간 본성이라는 점에선 닮아 있었다. <발행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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