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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의 창] 한국은 속국인가

#. 한국이 많이 의기소침해졌다. "미국의 승인 없이는 아무 것도 못한다"고 한 트럼프 대통령의 말 때문이다. 한국 정부가 대북정책에서 너무 앞서 나가는 것에 대한 불만이자 경고였을 것이다. 하지만 트럼프 대통령도 너무 나갔다.

한국이 미국의 속국인가. 식민지인가. 실상은 그 비슷하다 해도 그렇게 노골적으로 할 수 있는 말은 아니었다. 그것도 세 번씩이나 반복해서 했다는 것이 한국인들을 실로 무참하게 만들었다. '자주국이고 자주민인 줄 알았는데 역시 아니었어.' 여야 정치인을 포함해 많은 한국인들이 사실상 속국 취급 받은 것에 울분을 삼켰다.

트럼프 대통령은 작년에도 "역사적으로 한국은 중국의 속국이었다"는 발언으로 한국민의 속을 뒤집어 놓았다. 시진핑 중국 국가주석을 만난 뒤 대화 내용을 여과 없이 전한 것이다. 그래도 그때는 넘어갔다. 관점에 따라 전혀 근거 없는 말은 아니었기 때문이다. 근거란 이렇다.

#. 역사적으로 동아시아의 국제관계는 중국 중심의 '천하질서와 조공관계'로 요약할 수 있다. 천하질서란 세계가 중국 중심으로 돌아간다는 것이다. 중국이 스스로를 '중심 나라'를 의미하는 중국(中國)으로, 사방 이민족은 동이(東夷:한국)-서융(西戎:티베트), 남만(南蠻:베트남)-북적(北狄:위구르) 등 동서남북 오랑캐로 부른 것은 그런 천하질서의 한 단면이었다.

천하질서는 조공과 책봉으로 유지됐다. 조공이란 주변 작은 나라들이 중국 황실에 정기적으로 예물을 바치던 것을 말한다. 조공을 받으면 중국은 그 답례로 받은 것 이상의 하사품을 보냈다. 때문에 때론 조공을 부담스러워하기도 했지만 체면 때문에 어쩔 수 없이 받는 경우도 많았다. 조공국 입장에선 사실상의 무역이었다. 책봉은 주변국에 새 임금이 즉위하면 중국 황실이 승인해 주는 것이었다. 어떤 나라는 뒤탈을 염려해 전략상 자청해서 군신관계를 맺고 책봉을 청하기도 했다. 조공과 책봉이 이뤄졌다 해서 실상까지 주종관계는 아니었다는 말이다.

조선도 중국에 대해 조공과 책봉에 기댄 사대외교를 펼쳤다. 하지만 그것은 암묵적으로 독립과 자주권을 인정받았다는 전제 하에 이뤄진 것이지 일방적인 예속관계에 따른 것은 아니었다. 평화관계를 지속하면서 실리를 챙기겠다는 외교의 한 방편이었던 것이다.

#. '각 민족은 정치적 운명을 스스로 결정할 권리가 있으며 외부의 간섭을 받아서는 안된다.' 1918년 1월 우드로 윌슨 대통령이 의회에 보낸 연두교서에서 천명한 민족자결주의 원칙이다. 여기에 고무되어 수많은 식민지 민족들이 독립의 불씨를 지폈다. 우리의 3·1운동, 중국의 5·4운동, 마하트마 간디가 이끄는 인도의 저항운동도 마찬가지였다. 세계 역사에서 미국의 위대한 역할은 바로 이런 것이었다.

지금 트럼프 대통령의 정책 바탕은 '아메리카 퍼스트'다. 세계 유일의 수퍼파워로 다시 군림하는 것이다. 하지만 과거 중국처럼 천하질서나 조공-책봉의 파워를 미국도 똑같이 누릴 수 있다고 생각하면 오산이다. 지금의 세계질서는 한 두 강대국의 완력과 독주 대신 공존 공영, 평화 평등의 원칙 하에 재편되고 있다. 당연히 한 나라의 국익과 국격도 거친 말과 좌충우돌 힘 과시로 얻어지지 않는다.

미국 건국의 아버지들은 아무리 작은 주도 주권의 무게는 같다고 생각했다. 크든 작든 모든 주에 똑같은 수의 상원의원을 둔 이유다. 마찬가지로 지금은 아무리 작은 나라라도 주권의 무게는 같다. 트럼프 대통령은 이것을 알았어야 했다.

트럼프의 막말과 외교 결례는 한두 번이 아니다. 그래도 이번엔 너무 했다. 아무리 그래도 미국을 가장 가까운 우방으로 생각하는 한국을 두고 속국이나 식민지에게나 쓸 수 있는 '허락, 승인' 이라니. 한인으로서 심히 자존심 상하고, 미국 이민자로서 미안하고 부끄럽다. 한국은 정말 분발해야 한다.


이종호 논설실장 lee.jongho@koreadaily.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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