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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삶의 뜨락에서] 뜨거운 액체

지난주에 모임에서 도시락을 싸 들고 브롱스에 있는 웨이브힐(Wave Hill)에 봄나들이를 다녀왔다. 땅에는 연보라색 꽃 잔디가 융단보다 곱게 피어 방실방실 웃고 하늘에는 등꽃나무에서 흘러내려온 연보라와 아이보리 등꽃이 흐드러지게 피어 내려와 사랑을 나누고 있었다. 아, 이곳이 바로 무릉도원이로구나! 생각이 들었다.

그 중 한 그루가 유독 내 눈길을 끌었다. 완전히 죽은 듯 마르고 갈라지고 부러진 가운데 뒤쪽으로 뒤틀리면서 역동적인 기운으로 두 가지가 뻗쳐 있고 용이 불을 품어내듯 등꽃을 마냥 하늘에 품어내고 있었다. 우리 모두 환상의 연보라에 취해 다 시인이 되어 노래를 힘껏 부르고 보랏빛 영혼의 신선이 됐다. 절정에 이른 꽃을 따라 가지와 줄기를 더듬어 내려가니 분명 그 밑 둥은 고통으로 일그러진 볼품없는 해골이었다. 놀랍게도 뒤틀린 고통의 극점에서 갈라진 틈새를 비집고 두 팔을 벌려 하늘과 햇빛을 영접하고 있는 이파리들이 영롱하게 빛을 토하고 있지 않은가. 특히 아이보리 색의 등꽃은 처음이었고 그 자태는 고귀했다.

며칠 전에 곧 95세가 되실 시어머님을 안아볼 기회가 있었다. 신체는 점점 허약해지고 기력이 쇠잔해가고 있어도 정신만큼은 또렷하시다. 몸이 말을 듣지 않으니 자격지심에 피해의식이 커져 가끔 노여움이 폭발하신다. 왜 어머님을 안았을 때의 느낌이 그 등꽃나무의 밑 둥 같다는 생각이 들었을까. 잎과 수액은 다 사라지고 꼭 껴안으면 금방이라도 바스러져버릴 것 같은 바짝 마른 고목! 젊은이의 싱그러운 기상을 젊은 나무에서 볼 수 있듯 노인의 스러짐은 고목을 닮아간다.

나무는 죽어갈 때 가지와 잎을 다 잃어가면서도 DNA만 나이테에 간직하듯 사람도 늙어가면서 근육과 살을 다 잃어도 DNA 만 혈액 속에 남아있지 않은가. 나무는 생명을 위협 당하며 역사에 기록될만한 가뭄이나 허리케인을 나이테에서 읽을 수 있듯이 사람도 견디기 힘든 고통이나 경험을 혈액이나 기억 속에서 읽을 수 있다.

1923년 한국에서 태어나신 어머님은 격동하는 역사적 사건들을 겪고 조국을 잃고 일본 땅에서 디아스포라의 생활 그리고 해방을 맞은 후 6.25 등 참으로 험난했던 드라마 같은 삶을 사셨다. 그녀의 이 자그마한 육신에 스며있는 쌩쌩한 겨울바람과 그녀가 견뎌온 시간이 산채로 저장되어 있을 그녀의 머릿속을 여행하고 싶다. 몇 번의 전쟁을 겪으며 죽을 고비를 넘긴 그 아슬아슬했던 순간을 읽고 싶다.

어머님은 인간은 죽는다는 사실은 인정하고 받아들이겠는데 살아있는 동안은 보고 듣고 먹는 데 불편함이 없었으면 좋겠다고 귀여운 투정을 하신다. 시력보다 청력이 나빠지면 의사소통이 불편해 대인관계가 수월하지 못하다. 어머님이 좀 더 건강하셨을 때 충분한 대화를 나누지 못한 사실이 안타까울 뿐이다.

'아마 무너뜨릴 수 없는 고요가/ 공터를 지배하는 왕일 것이다/ 빈 듯 하면서도 공터는/ 늘 무언가로 가득 차있다/ 공터에 자는 바람, 붐비는 바람/ 때때로 바람은/ 솜털에 싸인 풀씨들을 던져/ 공터에 꽃을 피운다/ 그들의 늙고 시듦에/ 공터는 말이 없다/ 있는 흙을 베풀어주고/ 그들이 지나가는 것을 무심히 바라볼 뿐// 공터는 흔적을 지우고 있다/ 아마 흔적을 남기지 않는 고요가/ 공터를 지배하는 왕일 것이다' 최승호 시인의 '공터' 라는 시다. 빈 듯 하나 우리가 살아온 격동의 시간이 일렁대는 공터가 바로 우리 육신이다. 노 시인은 텅 빈 공터에서 지나가는 바람, 꽃, 흙, 새, 빗방울 등을 본다. 나는 어머님의 텅 빈 육신에서 고통, 슬픔, 비애 그리고 사랑을 본다. 그녀의 사랑은 가지를 치고 잎을 내고 꽃을 피웠다.

언젠가 우리 자녀들을 보며 아 이 땅에 우리는 씨를 뿌렸고 자녀들은 꽃이 됐고 그 꽃이 지고 나면 그 자리에 열매가 여물어 가겠지 생각하니 가슴 속에 뜨거운 액체가 솟는다. 생명이 유한하다고 좌절하거나 슬퍼하지 말자. 우리는 다음세대를 위한 비옥한 대지였다.


정명숙 /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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