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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량한 벌판의 격전…전투인가 학살인가

운디드니 학살 (Wounded Knee Massacre)

사우스다코타주 파인 리지 인디언 보호구역으로 가는 길은 낮은 구릉과 벌판 외에 아무것도 없었다. 조그만 원주민 마을 파인 리지를 지나 운디드니로 향하는 벌판의 세찬 바람은 황량함을 더했다. 아메리카 원주민 부족 수족이 사는 이곳은 미국 내에서 가장 가난한 카운티다.

10여 마일을 지나면 운디드니 사건을 기록한 붉은 간판이 나온다. 운디드니 추모비가 있는 낮은 언덕 위 공동묘지로 올라가는 길은 비포장 흙길이었다. 지역 관광안내 책자에도 언급되지 않는 곳이다. 막상 어렵게 찾아 도착한 장소에는 엉성한 공동묘지와 도로 표지판이 전부였다. 역사적으로 중요한 장소지만 방치돼 있었다.

조지 암스트롱 커스터 중령과 7기병대가 수족, 사이엔족, 아라파호족 연합 인디언들에 전멸당한 국립 리틀 빅혼 전투 기념지는 잘 조성돼 관리되고 있었고 백인 영웅을 추모하려는 행렬이 끊이질 않았다. 역사를 대하는 백인들의 의식을 가늠하게 한다.

1890년은 대평원을 평정한 인디언 전쟁 막바지였다. 소탕되지 않은 인디언들 대부분 보호구역에 수용되었다. 1890년 12월15일 전설의 인디언 지도자 시팅불이 살해당하고 수족의 저항 의지는 완전히 꺾였다. 그 무렵 인디언들 사이에선 빅풋 추장 등을 중심으로 유령 춤이라는 종교의식이 확산하고 있었다.

궁지에 몰린 원주민은 유령 춤을 추면 백인들을 물리치고 옛 영광을 되찾을 수 있다고 믿었다. 정부는 유령 춤을 금지했다. 빅풋 추장은 자신을 따르는 350여 명의 수족 인디언들과 함께 운디드니로 이동했다. 이들을 검거하기 위해 제임스 포사이스 대령이 지휘하는 제 7기병대 500여 명이 출동했다. 인디언들은 항복했고 1890년 12월 29일 무장을 해제하는 과정에서 한 인디언이 저항했다. 어느 편에선지 한발의 총탄이 발사됐다.

포위하고 있던 미군은 원주민을 향해 총격을 가했다. 원주민은 반격을 했지만 역부족이었고 비무장 상태의 원주민들도 사살당했다.

빅풋 추장을 비롯한 노인, 여자와 어린아이 146명이 사망하고 51명이 중경상을 입었다. 미군은 25명이 숨지고 39명이 부상당했다.

이것이 운디드니 학살 전말이다. 이 사건은 미국 측에서는 운디드니 전투라고 하는데 리틀 빅혼 전투 패배에 대한 보복 학살이었다. 이 사건은 대평원 평정의 끝을 상징한다. 미군은 운디드니 전투를 원주민과의 마지막 전투로 기록하고 있다.

운디드니 표지판과 묘지에는 몇몇의 원주민이 서성거렸다. 슬픈 눈을 한 원주민이 다가와 주머니에서 공예품을 꺼낸다. 공예품을 샀다. 원주민 형제가 묘지를 안내해 주었다. 묘지를 둘러보는 동안 귓전을 울리던 바람소리가 희생자들의 비명처럼 들렸다.


신현식 기자의 대륙 탐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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