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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물 오디세이] 나눔 실천 앞장서는 이의진씨 "나누는 삶이 내 행복의 원천"

한국서 잘나가던 사업가
IMF때 망해 무일푼 LA와
청소·식당·목수 헬퍼 전전
6년전 LA에 분식집 오픈
어려운 이웃·노숙자 위해
작년 한해만 1만불 기부
"죽을 고비 넘긴 인생
이웃 도울 수 있어 행복"


산전수전 공중전까지 다 치른 고희(古稀)를 목전에 둔 사내의 순수한 마음이라니. 당혹스러웠다. 그러나 이야기가 길어질수록 그 마음이란 게 누구나 한 번쯤 삶의 고비를 겪으며 다짐했던 '언젠가 지금의 나와 같은 어려운 처지에 처한 이를 보면 꼭 돕겠다'는 일견 평범한 결심이라는 걸 알게 된다. 다만 대부분의 이들이 시간이 지나면서 잊어버리는 걸 그는 기어코 지켜내고 있는 것일 뿐. 바로 이의진(68)씨다. 롤러코스터처럼 부침 심한 LA살이 20년이었지만 그 누구보다 행복한 시간을 통과하고 있다는 그의 인생이야기를 들어봤다.

#잘 나가던 사업가에서 가난한 이민자로

부산에서 나고 자란 그는 일찍 부모님을 여위어 고등학교를 중퇴하고 건설현장 막노동으로 생계를 이어갔다. 그리고 1982년 그간의 경험을 밑천삼아 건설 사업에 뛰어들었다. 주로 4~5층 규모의 상가 건물이나 주거용 빌라를 시공해 팔았는데 당시 부동산 경기 붐을 타고 사업체는 성장가도를 달렸다. 덕분에 90년대 중반 그가 소유한 부동산만도 빌라와 상가 등 10여 채에 이르렀다. 그러나 그 역시 1997년 터진 IMF사태를 비껴갈 순 없다. 공들여 추진한 30억 규모의 공사 계약 건이 은행융자 불발로 엎어졌고 IMF로 일자리를 잃은 세입자들의 앞 다퉈 전세금을 빼달라는 독촉전화가 이어졌다.



"당시엔 제 정신이 아니었죠. 그래서 모든 부동산과 재산을 처분하고 아내에게 살집 하나 간신히 장만해 주고 무작정 서울로 갔어요. 죽을 각오였죠."

그리곤 다음 날 아침 그냥 무작정 인천공항으로 가 LA행 비행기에 몸을 실었다. 항공권을 끊고 나니 수중에 남은 돈은 620달러가 전부였다고.

"당시엔 삶의 의욕이 없었어요. 그냥 무조건 한국을 뜨고 보자는 생각뿐이었죠."

LA공항에 도착해 한인택시를 잡아 탄 그는 택시 기사의 소개로 월 400달러짜리 LA한인타운 하숙집에 짐을 풀었다. 짐이라고 해야 세면도구와 속옷이 든 배낭 하나가 전부였다. 1998년 6월의 어느 날이었다.

#산전수전 LA살이 20년

이후 용접공 보조로, 목수 헬퍼로도 일했지만 기술이 없다보니 번번이 잘리기 일쑤였고 결국 하숙비를 내지 못해 쫓겨나게 됐다. 이후 LA인근 소도시를 전전하며 식당 일에 하우스 청소 등 닥치는 대로 일했다. 그리고 한국에 있는 아내도 데려왔다.

"한 2년쯤 그렇게 일했는데 정말 힘든 시간이었죠. 약속한 월급을 못 받기도 하고 인격적인 모독도 비일비재했으니까요. 같은 한인들끼리 그러는 게 더 화나고 야속했습니다."

이후 우연찮게 한 라디오 방송에 출연해 그간의 힘든 시간을 이야기할 기회가 있었는데 방송이 나간 후 일자리를 알선해주겠다는 청취자들이 온정이 답지했다. 그래서 그는 LA한인타운 소재 아파트 매니저로 취직할 수 있었고 아파트도 제공받았다. 덕분에 한국에 있는 아들과 딸도 데려 올 수 있었다.

"다시 LA한인타운에 정착하곤 정말 좋은 분들을 많이 만났습니다. 이곳저곳에서 일자리를 주겠다는 이들이 생겼고 응원과 격려도 아끼지 않으셨죠."

가족들은 재기를 위해 힘을 합쳤다. 온 가족이 돈을 벌기 시작하니 금세 돈이 모였단다. 덕분에 2002년엔 LA베벌리센터 인근에 작은 샌드위치숍을 인수했고 그해 LA한인타운에 주택도 장만할 수 있었다. 주택을 리모델링해 하숙 사업을 시작했고 아들은 햄버거 가게를 열었다, 그러나 얼마 안가 아들의 사업에 문제가 생기면서 사업체와 집까지 날린 그는 다시 아파트 매니저로 취직했다. 그러나 좌절하지 않고 다시 열심히 일한 그는 2012년 LA한인타운에 '김밥천국'을 오픈할 수 있었다. 2016년엔 토런스에 2호점도 오픈해 딸네 부부에게 맡겼다. 그리고 최근 그는 LA점을 팔고 현재는 딸네 부부의 식당일을 도와주고 있다.

#나누면 행복 두 배

이처럼 평범한 식당 주인이었던 그가 세간의 주목을 받게 된 것은 지난 2016년 연말 본지에 노숙자들을 위해 써달라며 2000달러를 기탁하면서다.

"어휴 정말 부끄러웠죠. 그저 할 일은 한 건데요 뭘. 그 무렵 중앙일보에 게재된 노숙자 심층기사를 읽고 너무 가슴이 아팠어요. 그 사람들도 그렇게 되고 싶어선 된 게 아니거든요. 제가 겪어봐서 그들의 사정을 너무 잘 아니까요."

순간 그의 눈가가 붉어지더니 눈물이 맺히기 시작했다. 그 눈물의 의미를 물어볼 엄두는 나지 않았다. 그저 지난했던 20년 LA살이가 주마등처럼 지나간 탓이리라 짐작만 해 볼뿐.

"죽을 생각까지 했던 제게 지금의 삶은 보너스죠. 게다가 많은 한인들의 도움으로 지금에 이르렀으니 저도 보답하는 의미로 누군가에게 도움을 주며 살고 싶을 뿐입니다."

그의 기부와 이웃돕기는 하루아침에 시작된 것이 아니다. 아파트 매니저로 일할 땐 형편이 어려워 쫓겨나게 생긴 세입자들을 위해 렌트비를 대신 내주고 식료품까지 사 들려줘야 발 뻗고 잠을 잘 수 있었단다. 또 식당 앞에 노숙자라도 오면 입던 옷을 벗어주는 건 물론 다음날 집에서 이불까지 챙겨왔다고. 이후 식당 사업이 자리 잡으면서는 한인사회 크고 작은 봉사단체에 기부를 해왔고 작년 봄엔 한국에서 입양한 7남매를 키우다 어려운 사정에 처한 김영란씨 관련 본보 기사를 읽고 2000달러를 쾌척하기도 했다. 그렇게 기부한 돈이 작년 한해만 1만달러가 넘는다. 그리고 지난 1월에도 노숙자들을 위해 2000달러를 본지에 쾌척했고 조만간 1만달러를 또 기탁할 예정이란다. 도대체 무엇일까. 부침 심했던 인생인 만큼 만일을 대비해 쌈짓돈이라도 모으려 드는 게 인지상정일터인데 기부라니.

"힘든 이들에게 작은 도움이나마 될 수 있다 생각하면 얼마나 뿌듯한데요. 그래서 요즘은 돈 버는 것보다도 누군가를 도와주려 돈 쓰는 게 훨씬 더 행복합니다."

그에게 물었다. 행복하냐고. 1초의 망설임도 없이 행복하다는 답이 돌아왔다. 요 근자에 자신의 행복을 이토록 확신하는 이를 본적이 있었던가. 돈과 명예가 넘쳐나 남부러울 것 없어 보이는 이들조차 미래를 걱정하느라 현재를 불안에 저당 잡혀 사는 각자도생의 시대에 이 김밥집 사장님의 확신은 묘한 힐링을 건넸다. 톨스토이의, 아니 인류의 오래된 물음 '인간은 무엇으로 사는가'에 대한 답이 스치는 순간이었다. 단언컨대 유레카.


이주현 객원기자 joohyunyi30@gma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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