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앙신인문학상 수상작: 단편소설 부문-장려상] 동창(同窓)
박 보라
'아들. 부재중 전화 1통'
나간 지 얼마 되지 않았으니 서둘러 쫓으면 영숙을 잡을 수 있을지도 모른다. 오늘 영숙은 기분 좋게 미옥과 한잔하겠다고 가게 앞에 차도 두고 오지 않았던가. 버스 정류장까지는 조금 걸어 올라가야 하니 빠른 걸음으로 뛰듯이 쫓아가면 금세 영숙이 보일 것이다. 미옥은 부랴부랴 한 손엔 영숙의 휴대폰을 챙겨 들고 맨발에 슬리퍼를 신고는 서둘러 집을 나섰다. 낮에는 가을볕이 눈부시게 빛난다 싶었는데 밤이 되자 겨울의 문턱에 선 듯 찬 바람이 오롯이 미옥의 몸을 감아 올랐다. 역시 겉옷을 입고 나올 걸 그랬어. 미옥은 두 팔을 서로 포개어 가슴께를 덮었다. 아파트 단지를 벗어나 붉게 타오르는 일본단풍나무 집도 지나고 바람에 살랑이는 미송나무와 히말라야 삼나무들이 입구를 지키고 있는 산책로도 지났다. 걸음이 빨라질수록 미옥의 숨소리도 점점 더 가빠지고 있었다. 이제 곧 버스 정류장이 있는 큰길인데 여전히 영숙의 옷자락도 보이질 않다니 미옥은 영숙의 걸음걸이가 이토록 빨랐었나 싶어 놀라고 있었다.
"아얏!"
살짝 올라가는 시늉만 하는 언덕길이었는데도 너무 서둘렀는지 미옥은 발목을 접질린 것 같았다. 미옥은 차가운 바닥에 주저앉아 발목을 살폈다. 오래된 슬리퍼가 문제였다. 며칠 전 오른쪽 밑창이 사 분의 일 쯤 떨어져 나가고 있던 것을 손질해 놓지 않았더니 고르지 않은 길에 걸려 넘어지고 만 것이다. 미옥의 발목이 살짝 부어오르는 것이 눈에 보였다. 손가락으로 눌러보니 악 소리가 날 정도로 아팠다. 하지만 이렇게 주저앉아 있다가는 영숙을 놓쳐버리겠다 싶어 미옥은 이를 악물고 다시 일어섰다. 그런데 그때였다.
'끼익-- 쾅!!'
아스팔트를 긁는 날카로운 소리와 함께 둔탁한 충돌음이 들려왔다. 고무 타이어 타는 냄새가 역하게 진동했다. 큰길가 쪽이었다. 버스 정류장에서 기다리던 미국 여자가 두 손으로 입을 가리며 비명을 질렀다. 그리고 함께 기다리던 동양인 청년은 큰길가 쪽으로 퉁겨지듯 달려나갔다. 미옥의 발목이 욱신거렸다. 속이 뭔가 모를 불안감에 울렁거려 숨이 찼다. 오른쪽 슬리퍼를 자리에 그냥 버려둔 채 절뚝이는 걸음으로 큰길 쪽을 향해 천천히 걸었다. 사람들이 금세 몰려들었고 누군가는 911에 신고를 하는 것 같았다. 점점 큰길 쪽으로 다가서니 사람들 틈새로 붉은 피가 뿌려진 까만 아스팔트 바닥 위에 나뒹구는 빨간 에나멜 구두 한 짝이 보였다.
미옥은 두 손으로 얼굴을 감싸고 수술 대기실에 앉았다. 전광판에 영숙의 이름이 영어로 떠 있었다.
'Landers Young S'
옆 의자에 앉아 휴대폰 게임을 하고 있던 여자아이가 미옥을 이상하게 훑어보았다. 얇은 연갈색 티셔츠에는 화려한 데이지꽃이 색깔별로 화사하게 그려져 있었고 영숙이 준 갈색 냉장고바지는 처연하게 늘어져 있었다. 거기다 삼선 슬리퍼는 왼쪽만 한 짝 걸쳐져 있고 오른쪽 발은 신발도 신지 않은 채 발목까지 벌겋게 부어 있었다. 여자아이가 미옥의 등을 살짝 두 번 두드렸다. 미옥은 얼굴을 감싸고 있던 두 손을 내려 여자아이를 쳐다보았다.
"Are you okay? (괜찮아요?)"
미옥은 아이를 향해 씁쓸히 웃으며 고개를 천천히 끄덕였다. 그리고 미옥은 그제야 자신의 손에 쥔 영숙의 휴대폰을 발견했다. 얼마나 꼭 쥐고 있었던지 손바닥이 다 하얗게 되었다. '아! 영숙이 아들.' 미옥은 언젠가 동부에서 변호사를 하고 있다던 영숙의 아들 이야기가 생각났다. 이 소식을 아들에게 알려야 했다. 그래도 다행히 영숙의 휴대폰은 미옥의 손에 있었고 그 아들에게서 오늘 부재중 전화가 걸려왔었다. 미옥은 통화버튼을 길게 눌렀다.
'아들. 통화연결 중...'
통화연결음은 마치 미옥의 숨소리처럼 비슷한 박자로 뛰고 있었다.
"헬로우? 엄마?"
딸깍 하는 소리와 함께 굵직한 젊은 남자의 음성이 들려왔다. 남자는 서툴지만 영어 억양이 느껴지는 발음으로 정확히 '엄마'라고 불렀다. 미옥은 한 손으로 마이크 쪽을 감싸 쥐며 천천히 이 상황을 설명하기 시작했다. 영숙의 아들은 긴 한숨을 내쉬며 때때로 '예스' '오케이' 정도의 대답을 하였다. 그리고 그는 비행기 표를 구해 최대한 빨리 가겠다며 미옥에게 영숙을 부탁했다. '땡큐' 하며 끊는 남자의 목소리는 다소 격한 슬픔의 감정을 힘겹게 누르고 있는 듯했다.
미옥과 영숙이 처음 만난 것은 두 달 전 한인 마트에서였다.
"카드 좀 다시 해 보시겠어요?"
캐쉬어가 좀 피곤하다는 기색을 비치며 미옥에게 말했다. 하지만 카드 기계가 다시 성난 경고음을 내었을 때 미옥은 얼굴에서부터 목까지 벌게지는 것을 느꼈다.
"자 잠시만요. 다른 카드로 한번 해 볼게요. 이게 왜 안 될까 모르겠네?"
미옥은 서둘러 지갑을 열어 다른 카드를 찾았다. 하지만 있을 리 없었다. 카드빚을 쌓지 않겠다는 신조로 살았던 남편이 겨우 데빗카드만 하나 만들어 놓았기 때문이었다. 눈동자가 시선을 잃고 마구 흔들렸다. 그리고 지갑을 뒤지고 있는 미옥의 손도 눈에 띌 정도로 흔들렸다. 그때 데빗카드가 미옥의 흔들리는 손에서 바닥으로 떨어져 내렸다. 그리고 미옥의 자존심도 함께 떨어져 내리는 것만 같았다. 그때였다. 카드를 주우려는 미옥의 손 앞으로 다이아몬드 반지를 낀 나이든 손이 불쑥 들어왔다. 미옥보다 먼저 카드를 주운 사람은 미옥의 뒤에서 다음 차례를 기다리고 있던 한 손님이었다.
"어머 너 미옥이 아니니?" "네? 누구..."
"나야 영숙이! 어머 일단 반가운 건 나중에 하고. 저기요! 제 친구 카드가 지금 뭐가 문제가 좀 있나 본데 제 것과 같이 계산해 주세요."
'영숙이? 그런 친구가 있었던가?' 미옥은 재빨리 머릿속 옛 기억들을 뒤져 '영숙' 이라는 이름을 찾았다. 기억이 날 듯 말 듯 하면서 영 얼굴이 떠오르지 않았다. 그러는 사이 영숙이 올려놓은 소갈비 한 팩과 애플 망고 한 상자가 미옥의 것들과 함께 계산되었다.
"어머 얘 오랜만이다. 어쩜 이리 하나도 안 변했니 너는?"
"어? 어... 그래. 영숙이라 그랬나? 미안한데 내가 나이가 드니 기억이 잘 안 나서...우리가 언제 친구였더라?"
"초등학교 동창이잖아 우리. 사실... 그럴 만도 하지. 나 얼굴에 손 좀 댔거든."
영숙은 목젖이 다 보이도록 입을 크게 벌리고 호탕하게 웃었다. 그러고 보니 미옥과 같은 나이라고 하기에는 정말 젊어 보였다. 목과 손은 나이를 속일 수 없다지만 얼굴엔 팔자 주름도 없고 이마를 굵게 패는 가로 선도 보이지 않았다. 피부도 어찌나 고운지 부잣집 사모님 태가 났다. 이 낯선 땅에서 이런 돈 많은 친구 하나 어디 없나 생각했던 옛날 자신의 모습이 갑자기 생각나 미옥은 당혹스러움에 고개를 숙였다.
"어쨌든 오늘 너무 고마워. 내가 나중에 꼭 갚을게."
"얘는 무슨 친구 사이에 별소릴 다 한다. 이렇게 오랜 친구를 만난 것도 늙어서 행복인데 말을 꼭 그렇게 섭섭하게 해야겠니?
"하지만 그래도..."
"됐어 얘! 하여튼 너무 반갑다 친구야."
영숙은 미옥의 손을 꼭 쥐었다. 미옥은 좀 어리둥절했지만 타국에서 만나는 오랜 친구는 처음인지라 가슴이 설레기도 했다. 그것도 제법 부자인 것 같은 친구이니 금상첨화가 따로 없다.
집으로 돌아와서 주머니 속에 있는 종이쪽지를 꺼내었다. 영숙이 준 자신의 연락처였다. 미옥은 소파에 기대 누워 쪽지를 한참동안 바라보았다.
"영숙 영숙? 영숙..."
미옥은 영숙의 이름을 입을 열어 여러 번 불러보았다. 자꾸 부를수록 친근해지는 이름이었다. 정말 친했던 친구 같았다. 어떤 친구였을까? 반을 호령하던 반장? 아니다. 그렇게 유명한 애 같았으면 분명 기억을 하고 있었을 것이다. 그러면 키가 작고 존재감도 없던 조용한 친구? 그것도 아닐 것이다. 왜냐하면 미옥도 학창시절 내내 키가 작아 맨 앞줄을 차지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면 과연 누구일까. 남편이 떠나고 처음이다. 마음이 무언가에 대해 기대감으로 가득 차는 것은. 사별 후 하루하루가 참 의미 없다고 생각했었는데 오늘 미옥의 삶에 또 다른 의미가 생긴 것만 같아 기분이 좋아졌다.
미옥은 좀 전의 일들이 다시 떠올랐다. 데빗카드가 안 된 것은 아마 통장에 돈이 없기 때문일 것이다. 미옥은 삼 개월 전 남편과 사별했다. 심장마비로 갑작스레 떠난 남편은 미옥의 모든 것이었다. 믿을만한 자식도 하나 낳아 놓지 못하고 나이가 들었다. 주위에서는 인공수정도 입양도 권하였지만 남편은 미옥 하나만 있으면 된다 하였다. 미국 이민 올 때도 그러했다. 나만 믿으라 큰소리치던 남편 뒤를 따라 낯선 시애틀 땅에 발을 들였다. 물론 시누님께서 이민 초기에는 많은 도움을 주시기도 하셨지만 지금은 치매로 인해 양로원에 계시다니 조카들에게 손을 벌릴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남편의 그늘 아래 사는 것이 좋았다. 그 그늘은 안전했고 편안했다. 그렇게 체크 쓰는 것부터 은행 일 운전까지 모든 걸 남편이 홀로 감당했었다. 하지만 그것이 문제였다. 남편이 떠나고 나니 미옥은 스스로 할 수 있는 것이 아무것도 없었다. 일단 차를 팔아 장례를 치렀다. 운전을 못 하니 차는 없어도 상관없었다. 그리고 남은 돈으로 당장의 생활비를 대었다. 하지만 그간 이것저것 정리할 일들이 많아 은행 잔고 확인을 못 한 것이 화근이었다. 또한 그다지 그런 이유가 아니더라도 통장이 바닥나는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집의 주 수입원은 남편이 벌어오는 월급이 전부였다. 모아둔 돈도 없는 이민 생활에 통장이 바닥나는 것은 오늘 뜬 해가 내일도 다시 뜨는 것만큼이나 당연한 일일 것이다.
미옥은 크게 한숨을 쉬었다.
'앞으로 어떻게 살아가야 하나. 기댈 언덕도 없는 환갑의 아무 기술도 없고 영어도 잘 못 하는 여자가 어떻게 벌어먹고 살아야 할지....'
그때 좀 전에 만난 영숙이 떠올랐다. 순간 '영숙이 어쩌면 남편이 자신에게 남긴 마지막 선물이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런 생각이 들고 나니 영숙이 더 좋아졌다. 그러고 보니 초등학교 시절 영숙이라는 친구가 있었던 것 같았다. 머리가 길고 참 조용했었던.... 미옥은 다음번에 영숙을 만나면 자기가 할 수 있는 일이 있는지 일자리 알선을 좀 부탁해 봐야겠다고 생각했다. 아파트 블라인드 사이로 기분 좋게 아름다운 노을이 거실 안으로 들어와 앉았다. 미옥은 오늘이 정말 낭만적이고 행복한 하루였다고 생각하며 눈을 지그시 감아 내렸다.
다음날 미옥은 영숙에게 전화를 하였다. 하루라도 빨리 일자리를 찾아야 했다.
"그러니까 미옥이 네 말은 일자리가 필요하다는 거구나? 어떤 쪽으로 찾고 있는데?"
"특별히 뭐 그런 건 없어. 그냥 아무거나."
"음… 아! 나 다니는 병원 사무직원 구한다던데 거기 소개해 줄까?"
"아 그건 내가 영어를 잘 못 해서… …"
"그러면… 아! 네일샵 일을 배워볼래? 자격증 따는 것이 그렇게 어렵지는 않다던데."
"코 앞에 글자도 잘 안 보이는데 그런 게 가당키나 하겠니?"
"아 그렇구나. 그럼 뭘 해 보지? 그래. 일단 네가 잘 하는 게 뭔지 이야기해 봐. 잘 하는 게 뭔지를 알아야 그 쪽으로 일을 알아볼 거 아니니."
"글쎄… 내가 잘 하는 거라… …"
미옥은 영숙의 말에 잠시 생각에 잠겼다. 지금까지 한번도 생각해 본 적이 없는 주제라 영 떠오르지가 않았다. 그러고 보니 여태껏 살면서 무언가 절실히 해 보고 싶다고 느껴본 적이 없었다. 남편의 그늘이 너무 편해서였다. 미옥은 꽤 오랫동안 그렇게 말이 없었다. 남편 생각이 났다. 언제나 자기를 아껴주고 칭찬해 주었던 그였다.
"남편이 내 요리 솜씨가 좋다고는 했었지."
한참 후에 미옥이 던진 말이었다. 실로 그랬다. 남편은 외식하는 것을 별로 좋아하지 않았다. 입이 까다로웠던 그를 위해 돌아가신 시어머니께서도 특별히 당부하셨던 것이었다. 그렇게 신혼 초기에 시어머니께 배웠던 요리솜씨가 다행히도 남편의 입맛을 사로 잡았다. 남편은 미옥의 요리 솜씨에 항상 엄지 두 개를 치켜세우곤 했다.
"남의 식당 밑에서 하는 일은 힘들텐데…"
이번엔 영숙이 조그만 목소리로 중얼거리며 생각에 빠졌다.
"뭐라고 했니?"
"아니 그냥 생각 좀."
영숙의 눈빛은 비장하기까지 했다.
영숙은 미옥의 손을 잡아끌었다. 걸음걸이는 매우 위풍당당하기까지 했다. 여섯 개의 다른 가게가 들어서 있는 제법 규모가 있는 2층 건물이었다. 맨 끝에서부터 테리야키 보험 사무실 그로서리 한식당 네일샵 피자집이 늘어서 있었고 위층은 콘도로 사람들이 입주해 사는 것 같았다.
"여기야 미옥아. 마음에 드니?"
"뭐가? 뭐가 마음에 든다는 거야?"
"어 저기 오시네."
한식당 문 앞에 서서 아리송한 질문을 던진 영숙은 주차장으로 막 들어오는 벤츠 차를 향해 손을 흔들었다. 차는 정확히 두 사람 앞에 섰고 웬 40대 후반 정도 되어 보이는 말끔한 남자 한 명이 내렸다.
"아이고 미세스 랜더스. 이게 얼마 만입니까? 자주 찾아 주시지 않아서 섭섭할 뻔했습니다. 하하하."
"김 선생은 맨날 나를 만날 때마다 그 타령이야? 내가 찾을 일 있음 꼭 김 선생만 찾는 거 몰라?"
"아 요즘은 너무 조용하셔서 동부 아들네로 거처를 옮기셨나 했지요."
넉살좋게 눈을 가늘게 뜨며 웃는 김 선생이라는 남자는 영숙을 '미세스 랜더스'라고 불렀다. 그리고 미옥은 그 둘이 오랫동안 거래를 해 온 사이인 것 같다고 생각했다.
"일단 들어가서 보시죠. 얘기해 두었습니다."
"그래 그러자고. 미옥아. 들어가자."
영숙은 미옥의 팔에 자신의 팔을 끼워 넣으며 방긋 웃었다. 김 선생은 두 사람보다 앞서가 한식당의 문을 열어 주었다. 그 한식당은 미옥도 전에 남편과 몇 번 온 적이 있었지만 맛은 그다지 없었던 것으로 기억되었다. 그래도 집안 살림엔 소질이 있던 미옥은 요리는 좀 하였다. 친정엄마가 전라도 분이시라 솜씨가 꽤 좋았었기 때문에 그 입맛을 기억해서 그런지 남편은 언제나 미옥의 요리에 엄지를 두 개나 치켜들곤 했다.
"아이고 미세스 랜더스. 이게 얼마 만입니까? 자주 찾아 주시지 않아서 섭섭할 뻔했습니다. 하하하."
"김 선생은 맨날 나를 만날 때마다 그 타령이야? 내가 찾을 일 있음 꼭 김 선생만 찾는 거 몰라?"
"아 요즘은 너무 조용하셔서 동부 아들네로 거처를 옮기셨나 했지요."
넉살좋게 눈을 가늘게 뜨며 웃는 김 선생이라는 남자는 영숙을 '미세스 랜더스'라고 불렀다. 그리고 미옥은 그 둘이 오랫동안 거래를 해 온 사이인 것 같다고 생각했다.
"일단 들어가서 보시죠. 얘기해 두었습니다."
“그래, 그러자고. 미옥아. 들어가자.”
영숙은 미옥의 팔에 자신의 팔을 끼워 넣으며 방긋 웃었다. 김 선생은 두 사람보다 앞서가 한식당의 문을 열어 주었다. 그 한식당은 미옥도 전에 남편과 몇 번 온 적이 있었지만, 맛은 그다지 없었던 것으로 기억되었다. 그래도 집안 살림엔 소질이 있던 미옥은 요리는 좀 하였다. 친정엄마가 전라도 분이시라 솜씨가 꽤 좋았었기 때문에 그 입맛을 기억해서 그런지 남편은 언제나 미옥의 요리에 엄지를 두 개나 치켜들곤 했다.
“여기 요새 새 집들 많이 들어서고 있는 거 아시죠? 요 앞에도, 요 뒤에도 거의 완공해서 분양 시작했고요. 길 건너 저 빈 터 보이시죠? 앞에 써 붙인 시공사 팻말도 보이시고! 이 지역에 인구가 계속 불고 있잖습니까? 그래서 요 앞길이 요새 용도가 변경되었어요. 그래서 요즘 짓는 빌딩들은 다 높이 올린다는 거 아닙니까? 저 빈 터에 들어오는 게 아파트인데 무려 6층짜리랍니다. 그래서 이곳 비즈니스들이 요새 죄다 가격이 뛰었어요!!”
김 선생은 입에 침을 튀기며 흥분해서 말했다. 뿐인가. 손을 얼마나 휘둘러대는지 미옥은 현기증이 다 날 지경이었다.
“어쨌든, 그건 그렇고. 이 분이 그러니까, 이 가게 새 주인이 될 분이시라는 거죠?”
“!!”
김 선생은 미옥을 바라보다가 다시 영숙에게로 눈길을 돌렸다. 미옥의 눈동자가 커졌다.
“응. 내 초등학교 동창인데, 요리 솜씨가 참 좋아. 썩히기 아까운 마음에 일단 내가 다운페이할테니 잘 좀 봐 줘. 어쨌든 홀로 사업하는 건 처음이니까, 전 주인에게 일하는 사람들은 그대로 두어 달라고 얘기 좀 해 주고.”
미옥은 둘의 대화에 한 마디도 끼어들 수가 없었다. 뭐라고 말해야 할지 모르기도 했고, 너무 당황했기 때문이기도 했다. ‘이 가게가 내 가게가 된다니!’ 미옥은 이것이 꿈인가, 생시인가 구분이 되지 않아 탁자 아래로 자신의 허벅지를 조금 꼬집어 보았다. 바늘로 찌른 듯한 통증이 사방으로 번졌다. 꿈은 아니었다. 자기 가게가 된다고 생각하며 둘러보니, 가게가 참으로 아늑하고 좋았다. 크지는 않지만, 이 정도면 주메뉴 몇 가지에 주력하면 분명 장사가 잘 될 자리였다. 새 아파트들도 많이 들어서고 있고, 특별히 이곳은 번화가라 가만히 앉아 있어도 땅값이 천정부지로 오를 자리였다.
김 선생을 보내고나서 미옥은 집으로 돌아가기 위해 영숙의 차를 탔다. 좀 전의 둘의 이야기를 상기하며 미옥은 머릿속으로 계산을 해 보았다. 김 선생의 말에 의하면, 그 가게는 전 주인의 건강상 이유로 급매로 나온 데다가 영숙이 다운페이를 해 주기로 얘기가 다 되어 있어 돌아오는 주에 매상점검하고, 이르면 다음 달 안에도 클로징을 할 수 있다고 했다. 미옥은 마음이 급해졌다. 집에 가서 오늘부터라도 당장 주력메뉴를 만들고, 소스와 밑반찬들을 연구해 봐야겠다고 생각했다.
“영숙아, 정말 고마워.”
미옥은 영숙이 자신의 수호천사가 아닐까 하고 잠깐 생각했다.
“무슨. 그런 말 마. 친구라는 것이 어려울 때 서로 돕고 그러는 거 아니겠니?”
또다시 영숙의 그 호탕한 웃음소리가 차 안에 울려 퍼졌다. 미옥은 그런 영숙의 웃음소리가 참 시원하고 좋았다.
“그런데, 영숙아. 우리가 몇 학년 때 같은 반이었니? 초등학교 동창이라 그랬지?”
“응?”
영숙의 얼굴이 순간 굳어졌다. 미옥은 자기가 실수했다고 생각했다. 이렇게까지 어려운 자신을 초등학교 동창이라는 이유 하나만으로 도와주고 있는데, 미옥이 영숙을 제대로 기억하고 있지 못한다는 것은 참으로 섭섭해 할만한 일이었다. ‘아차.’ 하며 아랫입술을 깨물었다.
“1학년 때.”
“아! 그래. 1학년 때였다. 그치? 내가 이래. 나이를 머리로만 먹었나. 이렇게 정신이 없어서야. 큰일이다, 큰일.”
미옥은 어색한 공기를 환기시키고자 깔깔 웃으며 영숙의 어깨를 쳤다. 영숙도 그제야 같이 호탕한 웃음을 다시 웃었다.
“들어와. 누추하지만.”
미옥은 들어가며 쓸어 담듯 바닥에 늘어진 빨래들을 주워들었다. 미옥의 살림살이는 단출했다. 방 한 칸짜리 아파트. 거실엔 2인용 소파 하나와 나무로 된 티테이블 하나, 그리고 기우뚱하게 서 있는 스탠드가 전부였다. 오래된 아파트 일층 코너 집이라 뒷마당으로 나가는 문 쪽엔 거뭇하게 카펫에 흙이 묻어 있었고, 소파 뒤쪽은 비가 많은 이 지역의 문제점을 말해주듯 곰팡이가 무늬를 이루며 벽을 타오르고 있었다. 반쯤 열려있는 방 안으로는 퀸사이즈 침대와 나이트 스탠드 하나가 보였다. 그리고 화장실 하나, 부엌 하나. 부엌살림도 남편과 단둘이 살았기에 4인용 전기밥솥 하나에 월마트에서 이십 불이면 살 수 있는 커피포트, 식기 건조대에 가지런히 씻어 올려놓은 밥그릇, 국그릇이 두 개씩 포개어 있고, 숟가락 두 개에 젓가락 두 쌍만이 수저통에 꽂혀 있었다.
“앉아. 커피 줄까?”
“응. 그래. 다방 커피로 뜨끈하게 한 잔!”
영숙은 한쪽 눈을 찡긋하며 소파에 앉았다. 이 집에 남편이 아닌 사람이 오는 것이 얼마 만인가. 미옥은 갑자기 신이 났다. 봉지 커피를 하나 뜯어 커피잔에 담고, 커피포트가 물을 끓이는 동안 저도 모르게 콧노래를 불렀다. 가끔 소파 쪽을 쳐다보니, 영숙은 거실에 걸려있는 미옥과 남편의 사진 쪽에 눈길을 두고 있었다.
“우리 그 초등학교, 이제는 없어졌대. 알았니?”
미옥은 뜨거운 물을 컵에 따르며 거실에까지 들리도록 조금 크게 말했다.
“그래? 왜?”
“뭐 다 그런 거지. 요즘은 애들도 많이 안 낳거니와 젊은 사람들이 다 서울이나 대도시로 빠지니 별수 있겠니?”
“아, 그렇구나. 아쉽다. 그래도 많은 아이의 꿈과 희망이 담겨 있던 곳이었을 텐데...”
영숙은 매우 아쉬운 듯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
“그러게. 자, 여기. 뜨거우니 조심해.”
미옥은 커피잔을 영숙 쪽으로 밀어주었다. 옛날 기억을 공유한다는 것은 참으로 신기하고 마음 따뜻한 일이라고 생각했다. 남편이 없으니 미옥은 옛 추억을 공유하며 살아갈 사람이 없었다.
“아카시아 아래 앉아서 친구들과 함께 공기놀이도 하고, 흙먼지 날리는 운동장에서 까만 고무줄 사다 고무줄놀이도 하고...”
“아카시아? 아, 그 교문 밖에 있던? 고무줄놀이할 때면 남자애들 와서 죄다 끊어놓곤 했잖니.”
“선생님의 풍금 소리에 맞추어 노래도 부르고, 청소한다고 열심히 바닥도 기어 다니고...”
“그래, 맞아. 우리 선생님 예쁜 처녀 선생님이라 목소리도 참 맑았었는데.”
영숙과 미옥은 주거니 받거니 옛 추억들을 짝 맞추어갔다. 따뜻한 커피가 다 식어갈 때까지의 시간이었다. 미옥도 참 오랜만에 떠올리는 추억이라 기억이 가물가물했지만, 천천히 떠올리니 눈앞에 그림처럼 되살아나는 것이 참으로 신기하다고 생각했다. 소녀 감성이 살아나서일까? 영숙의 눈가가 촉촉이 젖어 창으로 들어오는 햇빛에 반짝하고 빛났다.
그때였다. 영숙의 휴대폰이 요란한 음악소리와 함께 울려댔다.
“여보세요? 아, 경자구나. 그런데 경자야. 미안해서 어쩌지? 내가 지금 다른 곳에 나와 있어서… 나중에 내가 집에 가서 다시 전화할게.”
영숙은 무슨 일인지 미옥의 눈치를 보며 서둘러 전화를 끊어 버렸다.
“왜 전화 받아도 되는데. 누구?”
“어? 어, 초등… 아니, 친한 교회 집사님. 급한 게 아니라 나중에 집에 가서 전화하면 돼. 걱정하지 마.”
“아… 그런데 굉장히 친한 사이인가봐? 집사님이신데 ‘경자’라고 이름도 막 부르고.”
“으,응. 워낙 허물없이 편해서 그냥 그렇게 불러. 교회에서는 아니고. 커피 맛있다.”
“얘는. 인스턴트 커피 맛이 다 거기서 거기지.”
“네가 타 줘서 그런가 봐.”
영숙은 과한 미소를 지으며 뜨거운 커피를 불지도 않고 서둘러 마셔댔다. 그런 영숙을 보는 미옥은 영숙이 평소 같지 않다고 생각했다.
미옥은 금반지와 열 돈짜리 금목걸이를 내다 팔았다. 당장 아파트세도 내야 하고, 곧 개점할 가게의 주메뉴와 밑반찬들을 미리 만들어 보며 연구하려면 돈이 필요했다. 그래도 다행히 요즘 금 시세가 좋아 그것으로 한 달 정도의 생활비가 마련되었다. 금가락지는 엄마에게 받은 것이었다. 그리고 금목걸이는 죽은 남편의 것이었다. 다 사연이 있는 물건이라 마음이 편칠 않았지만, 지금 미옥에겐 방법이 없었다. 산 사람은 살아야겠기에 눈물을 머금고, 그것들을 내다 팔았다.
갈낙찜을 만들다 보니 남편이 생각나서 갑자기 울적해졌다. 시어머니께서 남편이 특별히 좋아해서 자주 해 주셨다는 보양식이었다. 특히 일이 힘들고, 날씨가 궂어 기력이 많이 떨어져 있을 때 먹으면 뽀빠이 저리가라 할 정도의 힘이 솟곤 하였다. 미옥은 이 갈낚찜을 주메뉴로 밀기로 결정하였다. 시어머니와 남편이 하늘에게 자기를 돕고 있는 것만 같았다. 밑반찬들도 평소 남편이 즐겨 먹던 것들로 준비해 보았다. 꽈리고추를 넣은 멸치볶음은 남편이 가장 좋아하던 반찬이었다. 그리고 미역줄거리 볶음도 오독오독 씹히는 식감이 좋다고 일주일에 한 두번은 꼭 상에 올렸던 것이었다. 그 외에도 담백한 감자채 볶음과 두부조림도 빼뜨리지 않고 반찬 목록에 챙겨 넣었다. 이것저것 잔뜩 연습 삼아 차려 놓고는 미옥 혼자 식탁에 앉았다. 혼자 먹는 저녁상이 꽤나 거창했다.
그것들을 먹는데, 목구멍에서 울컥하고 뭔가가 솟구쳤다. 남편 생각이 나서였다. 이러니 저러니 해도 남편 그늘 밑이 좋았다. 하지만, 이제는 돌아오지 않을 시간이었다. 이럴 줄 알았으면 우겨서라도 인공수정을 해 남편 닮은 아이라도 하나 낳아둘 걸. 미옥은 처음으로 그렇게 후회하였다. 그랬더라면 오늘같이 외롭게 이 맛있는 밥상을 대하지는 않았었을 것이다. 하지만 미옥은 꾸역꾸역 음식들을 밀어 넣었다. 이제는 뭐든 씩씩하게 홀로 살아내야 하기 때문이었다.
가게를 개점하는 날. 미옥은 앞치마를 두르고 부엌과 홀을 오가며 음식과 손님을 챙기느라 바빴다. 첫날은 주메뉴인 갈낙찜이 반값이라고 광고를 낸 탓인지 사람들이 바글바글 몰려들어 개점 시간부터 폐점 시간까지 앉을 틈도 없이 바빴다. 더불어 영숙도 정신이 없었다. 우아하게 원피스 정장에 아들이 이번 생일에 사 보냈다는 빨간 에나멜 구두를 신고 앞치마를 둘러맨 꼴이라니. 웃음이 나오지만, 밀려드는 손님들 때문에 어쩔 도리가 없었다.
정신없이 바빴던 가게 문을 닫고 하루 매상을 세었다. 미옥은 지폐를 한 장, 한 장 꼼꼼히 침 묻혀 넘기며 매우 신이 난 표정이었다. 반값으로 팔았는데도 첫날 매상이 무려 천오백 불이 넘었다. 마음속에 기쁨의 환호성이 외쳐졌다. 이런 식이라면 영숙에게 빌린 돈도 금세 갚고, 부자가 될 것만 같았다. 이제 생활비 걱정은 안 해도 될 것이다.
“와~우리 미옥이 좋겠다. 맨날 돈 세면서 잠들겠네. 어제 돼지꿈이라도 꿨나?”
“꿈꿨지. 아주 좋은 꿈.”
“무슨 꿈? 똥 꿈?”
“아니, 네 꿈.”
영숙은 웃음을 멈추고 미옥 쪽을 바라보았다. 미옥의 돈을 세던 손도 멈췄다.
“영숙아. 내 꿈을 이루어준 것은 바로 너야. 고맙다. 친구야.”
미옥은 조용히 영숙을 끌어안았다. 영숙도 그런 미옥의 등을 따뜻하게 토닥거려 주었다.
“축하파티나 하러 갈까? 샴페인이라도 하나 터뜨리자!”
둘은 영숙의 차를 가게 앞에 둔 채, 집으로 가기 위해 버스를 탔다.
수술은 밤새 진행되었다. 회복실을 거쳐 영숙이 개인병실로 옮겨진 것은 다음 날 늦은 아침이나 되어서였다. 줄줄이 여러 가지 선을 달은 영숙을 보며 미옥은 다시 얼굴을 감쌌다. 어젯밤 너무 들떠 축하파티를 제안한 것은 미옥이었다. 왜 그랬을까. 그냥 집으로 돌아갔다면 영숙은 어쩌면 사고를 당하지 않았을지도 모른다. 미옥은 가슴이 미어져 왔다. 마치 자기의 잘못인 것 같았다. 눈물이 볼을 타고 흘러내렸지만, 미옥은 그대로 두었다. 영숙의 손을 잡고, 미안하다 몇 번이고 잘못을 빌고 있었다.
‘위잉...위잉...’
그 적막함을 깬 것은 영숙의 휴대폰이었다. 미옥이 병원 안이라 진동 모드로 바꾸어 둔 것이었다.
‘이은미’
누구일까? 순간 미옥은 급한 전화가 아닐까 생각했다. 그래서 재빨리 영숙의 전화를 들어 통화버튼을 눌렀다.
“여보세요, 영숙이 휴대폰입니다.”
“아, 영숙이 친구인데요, 영숙이가 연락이 없어서요.”
“아, 네. 사실은 영숙이가 어젯밤에 사고를 당해서 지금 시애틀의 버지니아 메이슨 병원에 입원 중이에요.”
“네?! 우리 영숙이가요?”
이은미라는 영숙의 친구는 떨리는 목소리로 병실 호수를 묻고는 전화를 끊었다. 그런데 또다시 십 분 정도가 지났을까? 또 다른 전화가 울렸다. 이번엔 ‘정경자’라는 이름이었다. 그 이름은 예전에 미옥의 아파트에 영숙이 놀러 왔을 때 들은 적이 있었다. 그때 영숙이 당황한 듯 급히 전화를 끊었기에 미옥은 그녀에 대해 조금은 궁금했었다.
“네? 영숙이가요? 아이고 우짜노, 우리 영숙이 우짜노.”
“실례지만.... 영숙이와는 어떻게 되시나요?”
미옥은 문득 궁금해져 물었다.
“아, 네. 지는 영숙이 초등학교 동창인데예.”
‘초등학교 동창?’ 힘없이 내리감았던 눈이 번쩍 떠졌다. 허물없이 친하게 지내는 교회 집사님이라고 하지 않았던가! 하지만 교회 집사님이면서 초등학교 동창일 가능성도 없는 것은 아니다. 그런데 경상도 사투리? 그것은 어쩐지 수상했다. 미옥은 강원도에서 초등학교를 나왔기 때문이었다. 물론 그것도 강원도에 사는데 경상도에서 전학 온 친구가 있을 수도 있다. 그렇지만, 역시 무엇인가 꺼림칙해진 미옥은 다시 그 ‘정경자’라는 영숙의 초등학교 동창에게 물었다.
“초등학교가 어디...?”
“부산 동래 초등학교인데... 전화 받으시는 분은 누구신데예?”
“아...네... 저도...”
미옥은 순간 ‘초등학교 동창’이라 내뱉으려다 멈칫했다.
“영숙이 친구입니다.”
“아...영숙이 친구시구나. 아무튼 곧 갈게예!”
전화를 끊고, 미옥은 한참을 멍하니 앉아 있었다. 그러다 우연히 침대 맞은편 벽면에 있는 화이트보드에 눈길이 갔다. 거기에는 필요한 영숙의 인적사항과 담당 의사, 간호사 이름들, 그리고 다양한 처치 시간이 쓰여 있었다. 그런데, 영숙의 이름 옆에 생년월일이 좀 이상했다.
‘Landers, Young S, 9/29/1954’
“1954년?!!”
“어머, 너 미옥이 아니니?”
미옥은 그때, 자기 카드를 주워들며 재빠르게 카드 앞면을 훑던 영숙의 눈이 기억났다. 그렇다면 왜! 영숙은 미옥에게 그리도 친절을 베풀었단 말인가! 초등학교 동창도 아니라면! 나이도 세 살이나 많았다. 미옥은 의식 없이 누워있는 영숙의 얼굴을 가만히 바라보았다. 영숙의 표정은 평화로워 보였다.
그 후로도 몇 번 더 영숙의 친구들 전화가 왔다. 하나같이 자동응답기처럼 똑같은 말을 하였다. 자신은 영숙의 초등학교 동창이고, 매일 전화를 해 주던 영숙이 전화를 하지 않아 걱정되어 전화했다고. 심지어 어떤 사람은 전라도 사투리로, 어떤 사람은 충청도 사투리로 말하였다.
“엄마!”
“어머니!”
영숙의 아들과 며느리가 서둘러 병실문을 열고 들어왔다. 미옥은 눈물을 성급히 닦으며 자리에서 일어섰다. 둘은 미옥을 보고 먼저 정중히 고개를 숙였다.
“아, 전화해 주신 분입니까? 정말 감사합니다. 그런데... 저희 어머님과는 어떤 사이신지...”
“아, 네... 친구입니다. 초등학교 동창이요.”
미옥은 자기도 모르게 그렇게 대답한 후, ‘그냥 친구라고만 할걸.’하고 후회했다. 실제로 영숙은 자기 동창이 아닐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아.... 네.... 아무튼 감사합니다. 이제는 저희가 있어도 되니 피곤하실 텐데 얼른 들어가 보세요.”
“예... ”
미옥은 병실을 나왔다. 아직도 정신이 멍했다. 미옥은 복도를 꺾어 돌아 벽에 기대어 주저앉았다. 잊고 있던 오른쪽 발목이 다시 욱신거려왔다. 발목은 밤새 더 크게 부어 있었다. 응급실에 내려가서 간단한 조치라도 받고 가야지 싶었다.
엑스레이를 찍은 의사는 뼈에 실금이 갔다면서 신고 벗을 수 있는 간단한 캐스트를 신겨 주었다. 또한 이렇게 한 달은 하고 있어야 한다며 경고했다. 미옥은 병원 안내를 담당하는 직원에게 부탁해 택시를 불렀다. 버스노선도 모르니, 택시를 타고 가야겠다고 생각한 것이다. 그리고 택시가 오기까지 로비 소파에 앉아 계속 영숙의 일을 생각하고 있었다.
“어머님은 형편상 학교를 못 다니셨다 하지 않았어요? 초등학교 동창이라니... 어제 밤새 어머님 곁은 지키신 분도, 한 시간 전에 왔다 가신 분도, 지금 방금 왔다 가신 분도 죄다 초등학교 동창이시라잖요? 정말 이상하지요?”
놀라서 돌아보니, 영숙의 아들 내외가 간단한 먹거리를 사 들고 엘리베이터 앞에 서 있었다. 미옥이 병실을 나온 후, 영숙의 친구들이 몇 명 더 다녀갔나 보다. 미옥은 아직도 자기 손에 쥐어져 있는 영숙의 휴대폰을 열어보았다. 영숙의 아들에게 전해주고 온다는 것이 너무 정신이 없어서 자기도 모르게 들고나온 것이었다. 그 후로도 몇 개의 부재중 전화가 더 와 있었다.
‘투둑투둑.’
병원 통유리창에 빗방울들이 사선을 그으며 빠르게 흘러내렸다. 드디어 비내리는 시애틀의 겨울이 시작되려나보다. 미옥은 잠시 통유리 밖을 내다보다가 휴대폰의 통화버튼을 눌렀다.
“여보세요? 아, 네. 혹시 영숙이 초등학교 동창이신가요?”
미옥은 그렇게 휴대폰에 있는 모든 전화번호로 전화를 걸었다. 그리고 똑같이 물었다. 그들은 모두 영숙을 보러 온다고 했다.
‘영숙아, 친구들이 온대. 그런데 이렇게 비가 와서 어째? 더 세차게 내려 길이 막히기 전에 서둘러야 할 텐데....’
미옥은 영숙이가 깨면 친구들을 모두 불러 가게에서 첫 번째 동창회를 번듯하게 열어야겠다고 생각했다.
주황색 택시 하나가 빗줄기 속을 달려 들어와 병원 문 앞에 섰다.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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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상소감] 첫 도전에 상까지 받아…
고등학교 때가 생각납니다. 글 잘 쓰는 친구가 재미삼아 쓰던 소설이 친구들에게 인기를 끌자 '나도 한 번 써 보자!' 해서 썼던 어쭙잖은 SF소설로 친구들을 즐겁게 해 주던 때가 있었습니다. 작년부터 다시 글을 쓰고 배우며 오랫동안 하지 못한 숙제같은 소설에 도전해 보았습니다.
첫 도전에 상까지 받게 되니 등 떠밀려 무대에 올라온 무명가수처럼 어안이벙벙하지만 이로써 무대에 설 수 있는 기회가 생긴 것 같아 큰 격려가 됩니다.
걸음마하는 저를 나무라지 않으시고 언제나 듬뿍 사랑해 주시며 이끌어 주신 선생님들과 가족들 그리고 무엇보다 재능을 주신 하나님께 감사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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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사평]
동창을 가장한 이웃의 선행을 그린 미스터리한 작품이다.
마켓에서 잔고가 부족한 줄 모르고 데빗 카드를 냈던 미옥은 결제를 할 수 없어 매우 당황해한다.
이때 뒷줄에 있던 영숙이 대금을 치러주면서 자신은 미옥의 동창이라한다. 그러나 미옥의 기억에는 영숙이 떠오르지 않는다. 이어서 영숙은 미옥에게 식당을 차려주는등 경제적 도움을 준다. 이런 미스터리 스토리를 작가는 영숙의 교통사고를 통해 따뜻하게 처리한다. 영숙은 미옥 말고도 다른 사람들에게도 선행을 베푼다는 사실이 알려진다. 수호천사는 있다 라는 이야기다. 문장이 세련되었다. 좀 더 자연스러운 당위성을 위한 장치가 아쉽다. 장려상의 이유다.
심사위원-이언호·명계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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