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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앙신인문학상 수상작: 단편소설 부문-가작] 모천(母川)

김추산

생각은 보는 것과 듣는 것의 영향을 받고 행동은 생각의 지배를 받는다 무엇을 보고 듣는가가 그래서 중요하건만 나는 듣지 말아야 할 것을 듣고 어긋난 길을 거침없이 달려왔다. 어려서부터 작고 왜소했던 나는 외모에 대한 콤플렉스로 똘똘 뭉쳐 있었다. 누군가의 말과 행동으로 인해 쉽게 상처 받고 쉽게 무너지곤 했다. 그날 슈퍼 앞 평상에서 수다 떨던 동네 아줌마들이 내 등 뒤에 툭 던진 말들이 화근이었다.

"쟈는 워쩌자고 저리 자라덜 않는겨."

"글씨 말여. 조막만 혀가지고 어데 사람 구실 지대로 허것남."

"어미젖 못 먹고 자라 그러제. 지 어미젖만 묵었어도 조로콤 작든 않았을 겨."

"왜 아녀 그 때 참으로 욕봤제..."

순간 뒤통수를 한 대 얻어맞은 듯했다.

'젖을 못 먹었다고? 왜? 그럼 내가 자라지 못한 게 엄마 때문이라는 거네? 어쩐지... 엄마한테 난 늘 뒷전이었어. 엄마한테 난 하찮고 귀찮은 존재였던 거야...'

땅꼬마라며 손가락질하던 친구들 그들과 다툼하고 들어와 이불을 뒤집어쓰고 울던 일 작고 왜소한 외모로 인해 힘들었던 일들이 주마등처럼 스치고 지나갔다. 내가 겪은 일들이 엄마 때문이었다는 사실을 알고 나니 엄마가 미워 견딜 수 없었다.

엄마 탓을 하며 살아왔는데 어느 덧 나도 엄마가 되었다. 엄마가 되고 보니 더더욱 엄마를 이해할 수 없다. 산모이기에 아기에게 젖을 물려야 한다는 일념으로 꾸역꾸역 미역국을 먹고 손목이 시큰거리도록 젖무덤을 문질러대고 있질 않은가. 아기에게 젖을 물리고 싶은 게 산모의 본성일 터. 엄마는 왜 그랬을까.

첫 손주 유나가 태어났다. 막 태어난 아기를 안을 수 있다는 건 큰 행운이요 설렘이다. 꼬물거리는 손과 발 미간을 찡그리다 빙그레 웃는 입술 배와 가슴을 들먹이며 색색 쉬는 숨소리 응애응애 우는 소리... 양수에 불어 주름진 얼굴조차 이토록 사랑스러울 수 없다. 유나에게서 인영이 보인다. 그래서 유나를 더 놓을 수 없다. 인영은 내게 꿈이요 희망이었다. 엄마 아빠 없이 할머니 손에서 자란 내게 처음으로 생긴 피붙이의 의미는 특별했다. 그날 그 사건만 아니었다면 인영도 덜 외로웠을 텐데...

그 아이가 왜 내게 그리 냉담한지 알 수 없다. 언제부터인가 쇠붙이에 부딪혀 튕겨나가는 돌멩이처럼 자꾸 튕겨져 나갔다. 동네 아이들과도 어울리지 못하고 집에만 틀어박혀 있으니 몸이 더 허약하고 자라지 못하는 것 같아 마음 쓰였다. 그렇다고 일일이 챙겨줄 수도 없었다. 하나밖에 없는 딸아이를 키워내려면 뭐라도 해야 했으니까.

긴장이 풀렸는지 인영이 깊은 잠에 빠져있다. 저리 고운 얼굴에서 어찌 그런 쇠심줄 같은 고집이 나오는 걸까. 이제 화해할 때도 되었건만 도대체 곁을 주지 않는다. 저도 자식을 낳았으니 언젠간 나를 이해하겠지. 품에서 잠든 아가 볼에 입을 맞추고 인영의 이마에도 슬그머니 입술을 갖다 댄다.

한국에서 근무할 때 그녀를 처음 만났다. 초록서점. 그녀는 서점 계산대에 앉아 있었다. 그녀는 아주 조그맣고 귀염성이 있었다. 내가 머리를 숙이면 그녀의 오뚝한 콧날과 긴 속눈썹이 보였다. 그녀는 말을 할 때마다 머리를 뒤로 젖히며 나를 올려다보았고 그녀가 머리를 젖힐 때마다 긴 머리에서 향긋한 냄새가 피어올라 코를 자극했다. 기분 좋은 냄새에 끌려 초록서점에 자주 갔고 그녀의 냄새에 탐닉하게 되었다. 그녀가 먼저 말을 걸어오는 날은 행운의 날이었다. 그런 날이면 돌아가는 길에 여자 액세서리를 하나씩 샀다. 긴 머리에 꽂을 꽃 머리핀 가는 목에 어울릴 하트 목걸이 멋스런 링 이어링도 사고 엔젤 브로치도 샀다. 보석함에 행운의 증표가 하나 둘 쌓여갔다. 액세서리가 보석함에 가득 찬 날 그녀에게 데이트를 신청했다.

그녀를 만난 이후 사년 만에 결혼하고 미국에 들어왔다. 미국에 온 이후 한 번도 자기 엄마를 초대한 적이 없는데 웬일로 엄마를 초대했다. 장모님은 미국에 와서 하루도 쉬지 않고 일만 하더니 유나가 나온 후로는 줄곧 아기만 안고 있다.

혜자는 죽은 아내의 간병인이었다. 혜자는 자기도 아기 날 때 어려움이 있었다며 아내에게 정성을 다했다. 막내가 태어나고 폐부종으로 호흡곤란을 겪던 아내는 먼 길을 떠나고 말았다. 아이들 돌볼 사람이 필요했다. 혜자에게 도움을 구했다. 혜자는 아이 엄마 장례 치를 때까지만 도와주겠다고 했다. 혜자는 갓 태어난 유석을 보면 얼굴이 하회탈처럼 변했고 우유 먹일 때는 자기 자식같이 애정을 쏟았다. 유석은 뽀얗게 커갔고 유석을 끊지 못한 혜자는 우리 집에 귀한 존재가 되었다.

혜자가 백일 떡 케이크와 수수팥떡을 준비하고 과일과 한과를 수북이 쌓아올리고 실타래와 아기 앨범까지 준비해서 유석 백일 상을 차렸다. 아이들은 풍선과 꽃과 곰 인형을 준비해서 동생 백일을 축하했다. 혜자 딸 인영도 함께 했다. 흥겨운 날이었다. 잔칫상을 정리하고 그녀가 집으로 돌아가려는데 인영이 소파 뒤에서 깊이 잠들어 있었다. 그날 혜자는 우리 집에서 처음으로 밤을 보냈다.

같은 지붕 아래 혜자가 있다 생각하니 잠이 오지 않았다. 밤새 잠을 설치고 이른 새벽 주방으로 향하는데 거실에 혜자가 앉아 있었다. 심장이 고동쳤다. 인기척을 들었는지 혜자가 돌아보았다.

"어제 고마웠어요. 덕분에 우리 유석이 백일상도 다 받고..."

"엄마가 있었음 더 잘해줬을 텐데요."

"훌륭한 백일 상이었소. 혜자 씨가 엄마 노릇을 톡톡히 해줬어요."

"그런 말 들으려고 한 건 아닌데..."

"물론 알아요. 유석일 얼마나 예뻐하는지.... 그래서 더 고맙소."

"부끄럽네요."

잠시 말이 끊겼다. 정작 하고 싶은 말은 못하고 인사치레만 하는 내가 답답했다.

"이만 들어갈게요. 그럼..."

"저 혜자 씨!"

"무슨 하실 말씀이라도..."

"우리 유석이 엄마가 되어주지 않겠소?"

"네? 무슨 말씀이신지..."

"말 그대로 우리 유석이의 진짜 엄마가 되어달라는 거요. 오랫동안 많이 생각하고 고민하다 어렵게 드리는 말씀이외다. 그간 혜자 씨를 지켜봤어요. 의도적으로 지켜본 건 아니고 그냥 봐지더라는 말이 맞겠네요. 혜자 씨를 보면서 수도 없이 생각했소. 당신이 아이들의 엄마가 되면 좋겠다는 생각 말이오." "보모가 되어달란 말인가요?"

"아니 그런 말이 아니오. 내 아내가 되어주면 좋겠다는 말인데... 내가 이렇게 밖에 말을 할 줄 몰라 미안하오. 언제부턴가 당신을 보면 마음이 훈훈해졌어요. 당신이 집에 있다 생각하면 설레기도 하고 마음이 부푼 풍선이 되었소 당신이 떠난 집은 삭풍 부는 벌판으로 변했고..."

심장이 터질듯해 말을 잇지 못했다. 그녀는 손을 만지작거리며 당황스러워했다.

"이 밤에 확실히 알았소. 당신과 함께 있는 게 내게 어떤 의미인지... 부디 곁에 함께 있어줘요. 당신과 평생을 함께 하고 싶소."

"너무 갑작스러워서 뭐라 드릴 말씀이..."

"지금 당장 말하지 않아도 되오. 당신 딸은 내가 자식같이 잘 키우리다. 그러니 마음 편하게 생각하고 결정해주면 좋겠소."

그날 이후 혜자가 인영을 데리고 집에 들어오기까지 석 달의 시간이 더 걸렸다.

엄마는 늘 바빴다. 엄마가 일 하러 갈 때면 나는 누군가에게 맡겨졌다.

엄마가 더 바빠졌다. 새 아빠와 새로운 형제들이 생겼기 때문이다. 새 아빠 집으로 들어간 후엔 엄마가 밖으로 나가진 않았지만 맏이인 나는 역시 관심 받지 못했다. 엄마가 새 아빠와 어린 동생들에게 살갑게 굴수록 비위짱이 뒤틀렸다. 나는 늘 혼자였고 엄마와 새 아빠와 배다른 형제들은 모두 같은 편이었다. 동생들은 낮에는 나를 졸졸 따라 다니며 귀찮게 하다가도 저녁에 새 아빠가 들어오면 일제히 새 아빠에게 들러붙어 재잘대곤 했다. 그럴 때면 아빠 생각이 났다.

아빠가 처음이요 마지막으로 학교 문 밖에서 기다리던 날을 잊지 못한다. 그날 아빠는 백화점에서 핑크색 원피스 블루진 바지 체크무늬 붉은 재킷 빨간 모자 핑크빛 나이키 운동화를 사줬고 뷔페식당에서 저녁 먹은 후 나를 데리고 남산에 갔다. 하얀 벚꽃이 눈처럼 흩날렸다. 예전엔 거인 같았던 아빠가 그날은 작고 왜소해 보였다. 왠지 측은한 느낌이 들어 많이 웃었다. 내가 웃으면 아빠도 웃고 아빠가 웃으면 내가 웃었다. 아빠와 손 흔들며 걷기도 했고 양 손 마주잡고 빙글빙글 돌기도 했다. 흩뿌리는 하얀 꽃잎 사이로 남산타워가 보였다. 남산타워에 올라가니 눈앞에 불빛들의 광휘가 펼쳐졌다. 한강 대교와 도로의 자동차 라이트 행렬 빌딩마다 품어져 나오는 휘황찬란한 불빛들 가히 서울은 불야성의 도시였다. 아빠가 나를 사진에 담았다.

다음날 아빠는 병원에 갔다. 엄마는 얼마나 술을 퍼마셨으면 간이 작살났느냐며 통곡을 했고 아빠는 망연하게 천정만 쳐다보았다. 병원에 입원한 아빠는 집에 돌아오지 못했다. 아빠라는 존재가 내 기억 속에서 일부는 사라지고 일부는 생생하게 되살아나고 있을 무렵 새 아빠가 내 앞에 나타났다. 아빠. 이 말은 내겐 그리움의 단어였다. 만질 수도 가질 수도 없고 불러도 대답 없는 공허의 단어요 혼자 허공에 되뇌곤 하던 단어였다. 이제 매일 그 단어로 부를 수 있는 사람이 생겼다. 유석이 새 엄마가 된 게 잘한 일인지 모르겠다. 아빠 잃은 인영이 자기 방에서 이불 뒤집어쓰고 우는 걸 알았을 때 마음이 천 갈래 만 갈래 찢어졌다. 그 슬픔을 본 후 어떻게든 아빠의 몫까지 더해 인영만은 잘 키우리라 마음을 도슬러 먹었다.

유석 아빠의 프러포즈 받고 가장 먼저 인영을 생각했다. 그의 제안은 나쁘지 않았다. 형제 여섯이 일순간 생기고 아빠도 생기는 일이었다. 내가 도저히 채울 수 없는 것들을 해결해 줄 좋은 기회였다. 그 아이가 아니었다면 아이 여섯 키우는 일에 선뜻 나설 이유가 없었다. 지금 생각해보면 잘한 선택이다. 처음엔 완강히 자기 세계에서 빠져나오지 못하고 형제들과도 어울리지 못하던 인영이 점점 시간이 지나면서 자기 방에서 나오기 시작했다.

인영이 웃는 횟수가 늘어났고 말수도 차차로 많아졌다. 인영이 시집가는 날 내 선택이 옳았음을 실감했다.

그들이 인영과 더불어 즐거워하며 친밀하게 지내는 모습은 내게 큰 기쁨이다.

인영이 나를 초청할 것이라고는 상상하지 못했다. 결혼할 때조차도 나대신 새 아빠나 형제들에게 기대어 결혼 준비를 했던 터였다. 인영의 출산 과정과 첫 손주 유나를 가까이서 지켜볼 수 있다는 게 꿈만 같다. 유나를 안고 있으면 막 낳아서 안아주지 못했던 인영이 자꾸 생각난다.

첫 아기가 세상에 나오려 한다. 예정일보다 일주일 먼저 나온 탓에 갑자기 분주해졌다. 이슬이 비쳤다. 몸 안에 둥지 틀고 자라던 아기가 세상 밖으로 나올 준비를 한다 생각하니 감동이 밀려왔다. 정성스레 목욕한 후 병원을 찾았다. 진통은 밤새 계속되었다. 허공에 노란별이 번쩍였다. 시공 어딘가로 빨려 들어가는 것 같았다. 자궁이 뒤틀렸다. 아기가 나오기 전의 긴장감은 분화구를 뚫고 화산이 폭발하려는 순간의 긴장감 폭풍전야의 고요 속에 응집된 긴장감과 다를 바 없었다. 마지막 힘을 다하는 아이와 모든 것을 쏟아 붓는 내 에너지가 조탁작용을 하고 있었다. 한 생명이 탄생하려는 찰나의 숭고함이었다. 몇 겹 지방과 자궁벽에 막힌 작은 우주 속에 살던 아이가 한 뼘밖에 안 되는 길을 밤새 굽이굽이 돌아 세상 밖으로 나왔다. 먼 시간 속 무한광속의 흐름을 업고 열 달 동안 갇혀 있던 좁은 방을 용감하게 탈출했다. 모태의 안락함을 거부하고 자기를 기다리는 사랑하는 사람들이 있는 세상에 안도와 희열과 벅찬 감동을 안겨주며 신고식을 했다. 알을 깨고 나온 새처럼 생명의 환희를 풍겨냈다.

아이가 잉태되는 순간부터 여자는 엄마로 변한다. 엄마는 생명을 품은 자다. 아기는 여자가 엄마의 마음을 품을 수 있도록 하늘이 내려준 선물이다. 어미의 마음은 자식의 아픔도 슬픔도 기쁨도 희락도 다 품고 가는 마음이다. 내가 엄마를 불러들인 건 어쩌면 내 아기 낳는 모습을 통해 그동안 쌓였던 말을 대신하고 싶었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아기에게 엄마란 어떤 의미인지 알려주고 아기에게 내가 어떻게 하는지 보란 듯 보여주고 싶었다. 그리고 보여주었다. 내가 얼마나 아기를 힘들게 낳았고 아기에게 어떻게 엄마 노릇을 하고 있는지. 하지만 마음이 편치 않았다. 엄마도 나를 이렇게 낳았을 것 아닌가. 엄마도 이런 통증과 온갖 섞인 감정들로 응집된 시간들을 경험했을 것 아닌가. 마음이 착잡했다. 유나에게 막무가내로 향하는 마음 찌릿찌릿 젖이 돌아 나오면 자동적으로 아기를 안고 젖을 물리게 되는 이 마음. 그런데 엄마는 왜 내게 젖을 먹이지 않았을까. 마음 속 깊은 곳에 꾹꾹 눌러놓았던 아픈 감정들이 슬며시 고개를 쳐들었다. 버려진 자의 고통과 아픔이 이와 비슷할 거라 생각했다. 분신 같은 아이에게 엄마는 왜 젖을 먹이지 않았는지 그동안은 혼자 생각하고 결론 내렸다. 그런데 이제는 묻고 싶어졌다. 아기에게로 향하는 마음이 간절할수록 내 속에서 갈등과 번민이 뒤섞여 나를 괴롭혔다. 엄마는 너무도 평화스런 모습으로 유나를 안고 소파에서 잠들어 있는데 내 마음은 용암처럼 부글부글 끓어올랐다.

인영과 엄마의 관계를 알게 된 건 결혼을 결정하고 나서다. 그녀가 왜 엄마와 의논하지 않으려 하는지 이해할 수 없었으나 그녀에게 말 못할 상처가 있는 거라 생각했다. 그녀는 엄마에 관한 한 침묵으로 일관했다. 그런 그녀가 아기 낳을 때 엄마를 초청하겠단다. 비행기 표를 바로 한국으로 보냈다. 언제 그녀 마음이 변할지 몰라서다.

인영이 아기 낳은 후 아주 예민해졌다. 내가 보기엔 장모님이 최선을 다해 산모를 돌보고 아기를 챙기는데 무슨 불만이 있는지 자꾸 짜증내고 화냈다. 그녀의 변화무쌍한 감정을 어떻게 다뤄야 할지 모르겠다. 유나를 보고 있으면 근심 걱정 모두 사라질 것 같은데 그녀는 왜 그리 착잡할까. 혹자가 산후우울증 같다 했다.

산후우울증(postpertum depression)은 산모의 약 10~20퍼센트 정도 발병하는데 대개 출산 후 4주 전후로 발병하고 발병 3~6개월 후면 증상들이 호전되나 치료 받지 않을 경우 증상이 일 년 넘게 지속된다고 한다. 약 85퍼센트는 우울증으로 발전할 가능성이 있어 약물치료가 필요하다. 원인은 생물학적 심리적 사회적 요소들이 얽혀 일어나는데 분만 후의 피로 수면장애 충분히 못한 휴식 아이 양육에 대한 부담과 걱정 생활상의 변화 신체상의 변화나 자아 정체성의 상실 등도 병을 유발한다. 산모의 자세가 중요하고 가족의 지지 특히 배우자의 관심이 중요하다고 한다.

인영이 산후우울증이 맞는 것 같다. 엄마에게 화내고 짜증낼 때 말고는 모든 의욕을 상실한 사람처럼 축 쳐져 있다. 우울해 하다가 슬퍼하고 때론 무기력에 빠진 사람처럼 멍 때리고 있다. 장모님은 산모가 밤에 잠을 자야 한다며 아기를 장모님 방으로 데려가 재우지만 인영은 불면의 밤을 보내곤 한다.

인영이 화를 내는 게 차라리 낫다. 정신 나간 사람처럼 멍하고 있는 건 더 마음 아프다. 처음 며칠은 정성을 다해 젖 물리고 아기를 곁에 두고 돌보는 것 같더니 언제부턴가 아기에게도 소홀하고 먹는 것도 시들해지고 자꾸 눈물을 보인다. 아빠가 죽었을 때도 자기 방에 들어가 문 잠그고 이불 뒤집어 쓴 채 울음을 삼키던 아이다. 그런 아이가 나를 보면 파르르 화를 내다가 금방 맥없이 앉아 있거나 혼자 훌쩍거리고 있다. 노아도 자기 아내가 심각한 감정 변화 있는 걸 눈치 챈 것 같다.

"인영이 산후우울증을 앓고 있는 것 같아요."

산후우울증을 앓던 산모가 아이를 창문으로 집어 던져 살해했다는 기사를 봤던 기억이 난다. 때론 자살하는 산모들도 있다던데... 그 아이가 나 때문에 힘들어 하는 줄은 알았지만 그것이 병이 되었을 줄은 생각지 못했다. 머리가 혼란스럽다.

"다 내 탓이네. 저 애가 저렇게 된 게."

"그게 무슨 말씀이세요. 그냥 많은 산모들이 앓는 병이래요."

"산모들이 다 앓는 건 아니잖나. 왜 저런 병이 왔겠나. 다 나 때문이야."

"그렇지 않아요. 시간이 지나면 좋아질 테니 기다려 봐요."

"병원에 데리고 가봐야 하지 않을까?"

"글쎄요. 인영이 병원에 가려고 할까요? 자존심이 강한 사람이잖아요."

"그렇긴 해. 저 아이가 그런 일로 병원 갈 애가 아니지. 그건 내가 잘 아네."

"제가 좀 더 신경 쓸게요. 엄마도 알고 계셔야 될 것 같아 말씀드린 거예요."

"알겠네. 내가 자네 볼 면목이 없네. 엄마라고 큰 도움도 되지 못하고..."

"무슨 말씀이세요. 엄마가 아니면 어쩔 뻔했어요."

"나보다 다른 사람이 돌보는 게 어쩜 더 나았을지도 몰라. 나 때문에 저 아이가 더 힘든 시간 보내고 있을 지도 몰라."

가슴에서 뜨거운 것이 목울대를 밀고 올라온다. 엄마가 딸의 마음도 헤아리지 못하고 어린 손녀에게 푹 빠져 마냥 웃고 행복해하고 있었으니... 미안함과 서러움이 두루뭉수리 섞여 온 몸을 요동케 한다. 행여 그 아이 들을까 봐 꺼이꺼이 울음을 삼키는데 노아가 말없이 등을 토닥여준다. 사위 가슴에 안겨 더운 눈물을 쏟았다.

"다 내 탓이네. 저 애가 저렇게 된 게."

이 말이 엄마와의 화해를 이끌어 낸 첫 말이 될 거라곤 생각지 못했다.

노아와 엄마의 대화 분위기가 심상치 않았다. 엄마의 한숨 섞인 목소리가 들렸다.

"다 내 탓이네. 저 애가 저렇게 된 게."

순간 뒷목이 쭈뼛 서며 숨이 멎는 듯했다.

"그게 무슨 말씀이세요. 그냥 많은 산모들이 앓는 병이래요."

노아가 엄마를 위로하듯 말했다.

"산모들이 다 앓는 건 아니잖나. 왜 저런 병이 왔겠나. 다 나 때문이야."

가슴이 뛰며 손끝이 저려왔다. 엄마의 또렷한 목소리가 다시 귓속을 파고들었다.

"나보다 다른 사람이 돌보는 게 어쩜 더 나았을지도 몰라. 나 때문에 저 아이가 더 힘든 시간 보내고 있을 지도 몰라."

맞는 말이다. 엄마가 있으니 더 힘들다. 엄마에게 짜증부리고 화내도 마음이 풀리지 않고 내가 그럴수록 아기에게 집착하는 엄마가 싫다. 그런데 엄마가 그 사실을 알고 있었다니. 노골적으로 적대감을 드러냈으니 알고 있는 게 당연한 지도 모른다. 온갖 투정 다 부려도 엄마는 아무 느낌도 감정도 없이 다 받아줘야 한다고 생각했는데 엄마에게 내 마음을 들킨 거다. 힘이 빠진다. 다리가 후들거린다. 주저앉고 싶다.

엄마가 서럽게 울음을 삼키고 있다. 내가 엄마 앞에서 눈물을 보이지 않았듯 엄마도 내 앞에서 잘 울지 않았다. 딱 두 번 한 번은 중동에서 돌아온 아빠를 몰아세우다 힘에 눌려 아빠 품속에 머리를 박게 되었을 때고 또 한 번은 아빠가 병원에 입원했을 때 술을 얼마나 퍼마셨으면 간이 작살났느냐며 통곡했다. 그 이후로 엄마의 눈물을 보지 못했다. 그런데 엄마가 애끊는 울음을 소리도 내지 못한 채 울고 있다. 나는 엉거주춤 문고리를 붙들고 섰다가 그 자리에 주저앉고 말았다.

나는 더 이상 화를 내지 않았다. 아니 더 이상 화가 나지 않았다. 엄마의 서러운 눈물이 내 마음의 응어리를 녹여버린 것일까. 믿어지지 않을 만큼 마음이 평화로웠다. 나의 갑작스런 변화에 놀라며 안절부절 못하는 건 오히려 엄마였다.

"너 괜찮은 거니?"

"응 나 괜찮아."

얼마 만에 편안한 마음으로 엄마를 대하는 건지 모른다. 적어도 나는 그랬다.

"엄만 괜찮으니까 힘들면 힘들다고 말해."

"아냐 엄마가 힘들지. 나야 가만 누워서 해주는 밥만 축내고 있는데 뭘."

"인영아 너 정말 괜찮은 거 맞지?"

엄마 눈에 불안의 빛이 깊어졌다. 참 묘하다. 내가 엄마를 적대시하고 표독스럽게 굴 땐 엄마 눈빛이 처연하긴 했지만 불안하지는 않았다. 그런데 내가 엄마를 엄마처럼 대하자 엄마는 오줌 마려운 강아지마냥 안절부절 못하며 불안에 떨고 있다. 아이러니다. 우리는 왜 이렇게 어긋나는 것일까. 서로의 감정에 충실한 것도 죄가 되는 것일까. 엄마의 서러운 울음을 보고 눈 녹듯 사라졌다고 생각했던 응어리들이 막 끓기 시작한 죽 표면의 일렁임처럼 마음속에서 다시 일렁인다. 엄마와 나는 잘 될 수 없는 사인가 봐. 전처럼 지내는 게 어쩜 더 편할지도 몰라. 마음이 착잡했다. 하지만 더 이상 엄마를 가혹하게 대하고 싶지는 않다. 회복을 바라지 않는 자 누가 있으랴. 그럼에도 마음 깊은 곳에서 샘처럼 솟아나는 진실 된 갈망이 하늘에 가 닿기까지는 그 거리가 결코 가깝지 않다.

인영이 갑자기 변했다. 사람이 죽음을 앞두면 변한다더니... 나만 보면 날을 세우던 아이가 소금에 푹 전 배추처럼 야들야들 부들부들해 진 게 도무지 낯설다. 다정하게 대하는 그 아이를 볼 때마다 거대한 해일처럼 불안감이 밀려왔다. 나를 몰아세우고 날선 말로 아프게 하는 게 오히려 더 나았다. 좌불안석이다.

유나가 하루가 다르게 커간다. 붉고 주름졌던 피부가 뽀얗고 탱탱해졌다. 속눈썹은 길고 검게 자랐고 머리는 놀놀한 게 미국인의 피를 받은 표시를 냈다. 방긋거리며 웃는 모습은 제 어미 아기 때와 쏙 닮았다.

인영과 정식으로 화해한 건 아니지만 불안하던 마음도 시간이 지나면서 조금씩 적응되었다. 인영이 나를 편안하게 대하는 게 내가 걱정하는 산후우울증의 심리적 기제 때문은 아닌 것 같다. 처음부터 이런 관계였다면 얼마나 좋았을까. 왜 우리는 그토록 긴 세월을 힘들게 살았을까. 이런 저런 생각에 기쁨과 감사와 후회와 회한이 범벅이 되었다. 인영이 젖을 먹인다. 젖양이 늘어 아이가 먹고도 남아 유즙기로 짜내야 하는 판이다. 어디 저런 조그만 체구에서 젖이 흘러넘치도록 나올까. 생각할수록 감사하다.

"너는 참 행복한 엄마다."

"왜요?"

"남들은 젖이 모자라 먹이고 싶어도 못 먹이는데 너는 젖도 많이 나오고 또 아기가 젖을 그리 쭉쭉 잘 빠니 얼마나 좋으냐."

"젖이 많이 나오는 건 감사한 일이죠. 그런데 젖을 잘 빠니 좋다는 건 무슨 말이에요. 젖을 안 빠는 아이도 있나요?"

인영이 의외라는 듯 말간 눈으로 쳐다보며 말했다.

"그럼. 네가 그랬잖니?"

"내가 젖을 안 빨았다고요?"

"그래. 네가 젖을 빨지 않아 결국 젖을 먹이지 못했잖니."

"그게 무슨... 엄마가 젖을 안 먹인 게 아니고 내가 젖을 안 빨았다고요?"

"그 때 일을 생각하면 지금도 가슴 아프다."

인영은 아기를 옆에다 눕힌 후 바짝 다가와 앉더니 다그쳐 물었다.

"뭐가 어떻게 된 건지 그 때 이야기 좀 자세히 해봐요."

"젖이나 다 먹이고 말하자꾸나. 젖을 먹이다 말면 어쩌누?"

"지금 그게 문제가 아니잖아. 어서 내 얘기 좀 해 봐요."

유나가 옆에서 징징거렸지만 인영은 그런 건 안중에도 없다는 듯 다그쳤다. 나는 유나를 안고 흔들며 이야기를 꺼냈다.

"너를 배고 참 행복했었다. 너도 알다시피 엄마는 고아였잖아. 네 아빠 만날 때까지 혼자였단다. 그러니 뱃속에 내 피붙이가 자라고 있다는 게 얼마나 신기하고 행복했겠니. 막달에 배가 유난히 컸어. 사람들이 쌍둥이 아니냐고 할 정도였지."

유나가 잠들었다. 아기를 침대에 눕히고 돌아서니 인영이 무릎을 고추 세워 두 팔로 붙들고 툭 건드리면 터질 듯 물 풍선 같은 표정으로 기다리고 있었다.

"너를 낳던 날 밤 밖은 칠흑처럼 어둡고 진통은 점점 심해졌지. 곧 아기가 나올 것 같았어. 집에서 멀지 않은 조산원에 용한 산파 할아버지가 있었어. 그 때가 밤 2시 경이었어. 서둘러 아기용품을 챙겨들고 조산원에 갔어. 문을 두드리니 산파가 잠이 덜 깬 표정으로 나오더라. 그 밤에 일이 난 거야."

한숨이 저절로 났다. 그 끔찍했던 기억은 떠올리기조차 싫었다. 말을 이어가지 못하자 인영이 또 물 풍선 같은 표정으로 재촉했다.

"그래서 어떻게 됐어. 엄마 어서......"

"진통이 시작됐어. 방에 들어가 배를 움켜쥐고 있는데 산파가 들어왔어. 얼마동안 진통이 계속 되다가 아기 울음소리가 들렸어. 그 때의 감격을 어찌 말로 다할 수 있겠니. 그런데 문제가 생겼어. 산파가 아무래도 아기가 하나 더 있는 것 같다는 거야. 쌍둥이 배 같단 소릴 듣긴 했지만 진짜 쌍둥일 거란 생각은 못했는데."

인영이 침을 꿀떡 삼키는 소리가 들렸다. 나도 가슴에 뭔가 치밀어 오르는 게 있어서 잠시 쉬어갈 판이었다. 인영도 더는 재촉하지 않았다.

"그 때는 정말 쌍둥이가 들어있는 줄 알았어. 그 순간의 느낌은 뭐랄까... 갑자기 복권을 맞은 기분이랄까. 예상치 못했던 복이 하늘에서 떨어진 거라고 생각했지. 가슴이 뛰었어. 잠깐이지만 행복했다. 흐음... 산파가 잠시만 참으라 했어. 그리고 일이 터진 거야. 그 찢어지는 고통... 나는 그 자리에서 기절하고 말았지."

숨을 죽이고 듣고 있던 인영의 눈에 눈물이 고이려 했다. 건드리면 터질 것 같던 표정이 곧 울 것 같은 표정으로 바뀌었다.

"깨어나 보니 읍내 큰 병원이었어. 기절한 사이에 병원에 실려 온 거야."

나는 또 숨을 가다듬지 않으면 안 되었다. 그 다음 말은 어떻게 해야 할지 몰라서였다. 지금까지 꺼내기도 기가 막혀 한 번도 입 밖으로 꺼내본 적이 없다. 더군다나 인영 앞에서 그 끔찍한 일을 말해야 한다니... 내가 더 이상 말을 잇지 못하고 큰 숨을 내리 쉬자 인영이 말없이 나를 안아줬다.

"엄마 힘들면 지금 이야기 하지 않아도 돼. 그냥 가만히 있어요."

어느 새 눈물이 사정없이 흘렀다. 그 때 일을 생각해도 그랬지만 인영이 내게 다가와 나를 안아주고 있는 그 상황 때문에 더 눈물이 났다. 인영에게 기대어 얼마를 울었는지 모른다. 속이 뻥 뚫리는 거 같았다. 마음을 가다듬고 다시 말을 이었다

"그 이야기는 나도 나중에 큰 병원에서 깨어난 뒤에 들었단다. 그날 너를 낳고 아기가 또 나온 게 아니고 너를 싸고 있던 자궁이 뜯겨져 나왔다는 것을..."

"악... "

인영이 외마디 소리를 지르며 쓰러질 듯 휘청거렸다. 나는 얼른 그 아이를 안았다. 그 아이는 한참을 흐느껴 울다 엉엉 소리 내어 울었다. 충격적인 사실 앞에 속수무책 무너져 내린 여린 감성이 거기 있었다. 우리는 한 데 엉켜 울었다. 얼마의 시간이 지났을까. 유나가 깼다. 품에 있던 인영을 떼어내고 유나에게로 갔다. 우는 아기를 고추 세워 안고 어미에게로 갔다. 인영이 눈물 콧물 범벅이 된 채로 더듬더듬 티슈를 찾아 얼굴을 닦은 후 아기를 받아들었다. 젖이 도는지 인영이 아기에게 젖을 물렸다.

"사흘 동안 병원에 있었어. 피를 너무 많이 흘려 죽을 뻔한 걸 겨우 살렸다더라. 삼일 만에 퇴원하고 집으로 돌아왔는데 네가 있었다. 사흘 동안 동네 할머니가 보리차를 끓여서 입에 떠 넣어주었다더구나. 조막만한 너를 보고 왈칵 울음이 솟구쳐 한동안 멍청이 서 있었어. 그러다 정신이 들고 보니 젖을 먹여야겠다는 생각이 드는 거야. 젖무덤을 문지른 후 젖을 물렸는데 아기가 젖을 안 빠는 거야. 기가 막혔단다. 아기에게 어서 젖을 빨라고 미친 듯 소리치며 계속 젖을 물렸어. 하지만 너는 젖을 먹는 대신 울음으로 내게 대답했어. 절대 젖을 빨지 않았단다."

그 때 인영이 왜 젖을 빨지 않았는지 아무도 모른다. 자기를 떼어놓고 여행을 떠난 부모를 기다리던 아이가 있었다. 처음엔 부모를 기다렸다. 부모가 오지 않았다. 나중엔 부모가 오면 어떻게 화를 낼까 궁리했다. 그래도 부모가 오지 않았다. 그러다 막상 부모가 왔을 때는 입을 다물고 부모를 외면해 버렸다는 이야기가 있다. 아기는 모든 걸 다 안다고 한다. 다만 말 못하고 표현만 못할 뿐이지 우주에서 일어나는 모든 걸 아는 시기가 신생아 때라고 한다. 어쩜 어린 것이 엄마를 기다리다 엄마 젖을 그리다 입을 다물어 버린 것일지도 모른다. 젖을 빨지 않게 된 그 아이에게 얼마나 큰 상처가 있었을까. 그래서 그 아일 생각하면 더 마음 아프다.

인영은 넋이 나간 사람 같았다. 그 시선 속엔 오만 가지 감정이 녹아있었다. 나는 그 아이를 부드러운 시선으로 바라보며 말을 이어갔다.

"그래서 결국 너는 젖을 먹여 키우지 못했고 자궁이 없으니 자연스럽게 더 이상 아이를 낳을 수 없었던 거야. 그래서 너를 외롭게 키우게 된 거고."

인영은 아기에게 젖을 물린 채로 눈물을 뚝뚝 떨어뜨리고 있었다. 울음을 참느라 꺽꺽 댔다. 유나는 엄마의 슬픔을 아는지 모르는지 젖을 힘차게 빨고 있었다.

"엄마 엄마 엄마 엄마......"

인영은 젖을 먹이는 내내 엄마 소리를 되뇌었다. 어디 먼 데 있는 엄마를 찾는 아기처럼 흐느끼며 엄마를 찾았다. 그 흐느낌 속에 아픔과 원망과 미움과 분노와 회한과 후회와 질책과 모든 지난 시간의 감정들이 다 녹아 있었다. 유나의 수유가 끝나고 아기를 침대에 눕힌 뒤 인영은 내 앞에 와서 무릎을 꿇으며 무너져 내렸다.

"엄마 엄마 엄마 엄마......"

끝내 말을 잇지 못하고 울기만 하던 인영이 드디어 말문을 열었다.

"엄마 제가 잘못했어요. 제가 잘못했어요......"

"아니다 아냐. 그건 네 잘못이 아냐."

"제 잘못이에요. 그런 줄도 모르고 엄마를 그토록 깊게 오해하고 있었다니 정말 제 자신이 끔찍해요. 절 절대 용서하지 마세요. 엄마에게 용서 받을 자격도 없어요."

"그런 말 하지 마라. 인간은 누구나 다 자기 관점에서 모든 것을 생각하는 동물이란다. 너는 너대로 나는 나대로 서로 오해하고 있었던 것뿐이야. 이제라도 오해를 풀게 되었으니 얼마나 다행한 일이니. 이 엄마가 네게 더 가까이 다가가지 못하고 네 마음을 헤아리지 못한 것이 더 큰 잘못이었어."

"아니에요 엄마. 그동안 저 때문에 당했을 고통을 생각하면 흑흑흑......"

인영은 더 이상 울음을 참지 않았다. 작고 여린 그 아이가 진동하듯 흔들며 폭풍 눈물을 쏟아냈다. 그날 우리 모녀가 쏟아낸 눈물은 모천(母川)이 되어 흘러내렸다.

엄마와 하고 싶었지만 하지 못했던 일이 많았다. 삼십 년 간 하지 못했던 이야기도 많았다. 퍼내도 마르지 않는 깊은 산속의 옹달샘처럼 내 속에선 끊임없이 이야기가 흘러나왔고 내가 엄마에게 그렇게 많은 말을 할 수 있다는 사실에 스스로 놀랐다.

"엄마 우리 이젠 헤어지지 말고 함께 살자."

"호호 그럴까. 내가 이런 생활을 얼마나 그리워했는데. 어쩌다 우린 지금까지 이렇게 살지 못했을까?"

"내가 문제지 뭐. 진즉에 엄마한테 내 고민을 털어놨으면 엄마도 모든 사실을 이야기 했을 테고 그러면 그렇게 골이 깊진 않았을 거 아냐."

"글쎄 말이다. 언제 적 일이니 이게. 지금도 또렷이 생각나. 네가 나를 적대감을 갖고 대하던 때가. 설마 네가 그런 생각을 하는 줄 상상도 못했다. 재가 갑자기 왜 저러나 싶었지. 먹고 살기 바빠 너를 세심하게 돌보지 못한 내 탓이야."

"동네 아줌마들이 문제였어. 어떻게 그런 말을 아무렇지도 않게 할 수 있어."

"항상 동네 아줌마들의 이바구가 문제긴 하지. 인간이란 다 그런 거란다. 내가 하는 말이 상대방에게 어떤 상처가 되는지 모르는 경우가 많아. 한번 내 뱉으면 주워 담을 수도 없는 게 말인데 말이야. 이솝의 주인이 이솝을 시험해 보려고 이 세상에서 가장 귀한 것을 가져오라 하니까 동물의 혀를 가져왔다지. 그래서 이번엔 세상에서 가장 악한 것을 가져오라고 했더니 또 동물의 혀를 가져왔대. 세상에서 가장 귀하면서도 가장 나쁜 짓을 할 수 있는 게 혀라는 거야. 얼마나 상징적인 이야기니."

"지혜롭게 말하고 살기가 쉽지 않아요. 말을 해도 문제 안 해도 문제잖아. 그 때 동네 아줌마들의 말도 문제였지만 그 말을 들은 내가 엄마한테 말하지 않고 혼자 마음대로 생각하고 판단하고 행동한 건 더 문제였어요. 그 때 엄마한테 내가 이런 말을 들었는데 그게 사실이냐고 한번만 물어봤어도 그 긴 세월을 고통 속에 살지 않았을 것을. 내가 엄마를 얼마나 맹렬히 원망하고 미워했는지 몰라요. 참 어리석지요?"

"넌 그 때 어렸잖니. 성격도 소심하고. 그럴 수 있는 일이었지. 지금이라도 이렇게 너와 잘 지낼 수 있게 되어 너무 기쁘다. 엄마는 이제 지나온 시간들은 다 잊을 거야. 지금부터 엄마와 딸의 관계가 새로 시작되는 거라고 생각할 거야."

"엄마에게 못되게 굴었던 것 다 용서해 주세요. 이제부터 잘 할게요."

"용서는 무슨 다 몰라서 그런 건데... 앞으로 잘 살자 우리."

어느 새 왔는지 노아가 카메라를 들이댄다.

"김 치!" ( 끝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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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상소감] 마음 따뜻해지는 글 쓰고 싶다

관에 안치된 시신을 망연한 눈으로 바라보다 수상 소식을 전해 들었다. 웃어야 할지 울어야 할지... 주검 앞에서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고 어물댄다.

경계에 선 순간. 매 순간이 그렇다. 때론 명료하기도 하고 때론 안개 속인 듯 희뿌옇다. 머물 수 없어 앞으로 나가지만 시작점이기도 하고 끝이기도 한 길. 소설의 길이 내겐 그렇다. 그 길 위에서 어우러진 그 시간들 속에서 울고 웃는 우리들의 이야기 마음 따뜻해지는 글을 쓰고 싶다. 소설의 길로 이끌어준 김 종광 교수님 문우 해나와 은아 사랑하는 가족들 경계에서 한걸음 뗄 수 있게 기회주신 심사위원들께 감사드리며 오늘의 나를 있게 하신 주님께 감사드린다.

▶약력: 1959년생. 한국문서선교회 편집장 지냄. 서울디지털대 문예창작과 졸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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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사평]

엄마와 딸의 오해와 갈등을 다룬 작품이다.

엄마의 난산으로 딸은 미숙아처럼 왜소하게 자랐다. 그런 자신의 모습으로 인해 그늘지게 살면서 잘 키우지 못한 엄마를 원망한다. 엄마는 딸과의 관계를 사랑으로 이해하려고 노력하는 마음이 안타갑기만 하다.

결국 딸은 자신이 아이를 낳은 다음에 엄마의 사랑을 이해한다는 해피엔드의 결말이다. 그런데 이 작품은 화자의 시점이 엄마에서 새 아빠로 또 사위로 딸에게로 바뀌는 복잡한 구성으로 되어있어 흐름이 매끄럽지 못한 단점이 있다. 가작의 이유이다.

심사위원-이언호·명계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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