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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물 오디세이] LA한인타운 시니어커뮤니티센터 이영송 이사장, 인생 최고의 황금기는 지금부터다

서울대·USC 치대 졸업
이스트LA서 치과의 40년

상의·치과협·평통 회장 등
한인사회서 왕성한 활동

작년 센터 이사장 취임
활성화 위해 동분서주
"은퇴 후 인생 후반전
도전하며 행복 찾고파"


인생이란 풀어야 할 문제가 아닌 경험해야 할 여정임을 그는 너무도 잘 알고 있는 듯 했다. 그래서일까. 삶의 힘든 고비에서도 서두르는 법 없이 침착했고 길 떠난 소년의 유쾌함마저 엿보였다. LA한인타운 시니어커뮤니티센터(이하 시니어센터) 이영송(74) 이사장이다. 잘나가는 치과전문의로, 사업가로, 또 한인사회 유명인사로 어느새 40년 세월이지만 꽃길만 즈려밟는 인생이란 있을 수 없듯 그 역시 행복과 시련을 들실 날실 삼아 오늘에 이르렀다. 그리고 누구도 피할 수 없는 이 희로애락 속 누구나 얻을 수 있는 건 아닌 인생을 통찰할 수 있는 지혜를 손에 쥔듯 했다. 그 지혜를 발판삼아 자신만의 역사를 만들어 가고 있는 그를 시니어센터에서 만나봤다.

#잘 나가는 치과전문의 되다

평안북도 태천 출생인 그는 한국전쟁 통 유년시절 대부분을 대전과 경북 경산 등지에서 피란생활을 하며 보냈다. 전쟁이 끝난 후 내과의였던 부친은 서울 후암동에 병원을 개원했고 그는 1963년 서울대 치대에 입학했다.



"진로를 결정하는 데 아버지의 영향이 컸죠. 피란 생활을 하면서 아버지는 늘 의사가 되면 밥은 안 굶는다고 하셨거든요.(웃음)"

대학 졸업 후 세브란스 병원에서 인턴과 레지던트를 거친 그는 병원 후배였던 아내와 함께 1975년 LA로 왔다. 이듬해 USC 치대에 입학해 보철전문의가 된 그는 1979년 가을 이스트LA 위티어에 병원을 개업했고 1981년부터는 USC 치대 임상 조교수로도 6년간 근무했다. 병원은 오픈과 동시에 문전성시를 이뤘다.

"치대 시절 제 별명이 골드 핑거였어요.(웃음) 개원 후 아프지 않게 치료한다는 입소문이 나면서 환자들 소개로 베이커스필드, 롱비치에서까지 환자들이 몰려들었죠."

당시 그의 월수입은 5만달러를 넘어섰고 개원 두 달 만에 그는 패서디나에 25만달러짜리 저택도 마련할 수 있었다. 그리고 1983년 16유닛 규모의 투자용 아파트 매입을 시작하며 본격적인 부동산 투자에 뛰어들었다.

"대학생 때 부친께서 후암동 3층집을 제게 상속하셔서 그 세를 가지고 대학 학비 내고 용돈까지 썼죠. 아마 그때 부동산 투자의 이점을 알게 된 게 아닌가 싶어요.(웃음)"

#아메리칸 드림을 일구다

이후 LA와 세리토스, 오렌지카운티 소재 건물들을 사고팔면서 그는 부동산 투자로 승승장구했다. 90년대 초반엔 300만달러를 투자해 LA한인타운 버몬트 길에 있는 2에이커 규모의 반스마켓 건물과 대지를 매입하는가 하면 동부에 있는 부동산까지 사들였다. 그러면서 베벌리힐스에 250만달러 저택으로 이사도 했다. 미국 이민 20년 만에 일군 아메리칸 드림이었다. 그러나 1994년 4·29 LA폭동이 터지면서 부동산 경기가 악화됐고 그의 사업체도 큰 타격을 받게 된다.

"경기악화로 세입자들이 렌트비를 안내니 더 이상 페이먼트를 못하게 됐고 6개월 만에 은행 차압이 들어왔죠. 결국 모든 부동산은 은행으로 넘어갔고 그 후유증은 꽤나 컸습니다."

그러나 당시 이 경험은 그의 인생에 소중한 자산이 됐다.

"투자는 성공했을지 몰라도 관리를 제대로 못했다는 걸 절감했죠. 이렇게 실수를 인정하고 받아들이면 겸손해져요. 그러면 또 다른 길이 보이기 시작합니다. 그러니까 실패했다 낙담 말고 이를 인정하고 다시 시작하면 됩니다."

사업뿐 아니라 그는 LA한인사회에서도 왕성한 활동을 펼쳤다. LA올림픽 라이온스 클럽 회장(1984)을 거쳐 LA상의 이사장(1987)과 회장(1988), 남가주상공인총연 회장(1988), 재미한인치과협 회장(1989)을 맡았고 1992년엔 한미문화교류재단을 창립해 '6·25참전 미군용사 위안의 밤'을 개최하며 한미 우호를 다지는데 노력했다. 사업이 힘들어져도 그의 활동은 멈추지 않았다. 그가 사업적으로 가장 힘들었던 1994년 가을 그는 박찬호 선수의 LA다저스 입단을 위해 백방으로 뛰어다닌 것은 물론 이후 박찬호 후원회 회장으로도 활동했다.

"당시 4·29 LA폭동으로 한인사회가 크게 침체됐던 시기였어요. 그때 LA구단주와 식사할 기회가 있었는데 그가 박찬호 선수에게 관심을 보이길래 영입을 제안했죠. 힘든 한인들에게 용기와 희망을 줄 수 있는 일이라 확신했으니까요."

이후 반년 간 한국을 세 번씩 오가며 영입을 추진해 결국 그해 연말 박 선수의 입단을 성사시켰다. 뿐만 아니다. 한국중소기업 LA추진위원회 위원장(1996), 평통 회장(1997), 미주예총 고문(1997) 등도 그가 사업적으로 가장 힘든 고비를 넘길 때 맡은 직함이다. 선뜻 이해가 되질 않았다. 내 코가 석자인데 단체 활동할 정신이 어디 있단 말인가.

"그래도 집도 있고 병원도 있잖아요.(웃음) 당시 건강만 잃지 않게 해 달라 기도했는데 그래서 의기소침하기보다는 더 열심히 사람들을 만나려 노력했던 것 같아요. 워낙 제가 사람들 만나 이야기하는 걸 좋아하기도 하고요.(웃음)"

#행복한 인생 후반전을 위해

현재 그는 시니어센터 이사장직을 맡고 있다. 2008년 대한노인회미주총연합회 회장에 취임한 이래 시니어들의 복지에 관심을 가져온 그는 2013년 시니어센터 개관 당시 이사장으로 취임했지만 아내의 입원과 그 역시도 심장협착증 수술로 넉 달 만에 사임해야 했다. 그러다 지난해 다시 이사장직을 맡아 센터 활성화에 공을 들이고 있다. 그의 이런 열정은 그의 아픈 개인사와도 무관치 않아 보인다. 8년간 치매를 앓던 소아과 전문의였던 아내가 2015년 세상을 떠난 것. 이후 그는 1년간은 집과 치과만을 오가며 두문불출했다.

"당시엔 왜 먹는지 왜 사는지 무의미하게 느껴질 만큼 우울했죠. 그런데 시간이 지나면서 인생을 보는 시각이 달라지더군요. 사별 후 못해 준 것에만 연연해하기보다 누군가를 도와줄 수 있을 때 열심히 돕는 게 의미 있는 인생이란 걸요. 그래서 작년에 갑작스러운 이사장직 제안을 수락했죠."

그는 내년엔 은퇴해 그동안 못했던 일들을 해보고 싶다 했다. 20년 전 입문했다 중단한 사진촬영부터 세계 여행까지 그동안 바쁘게 사느라 뒷전으로 밀어뒀던 진짜 해보고 싶었던 일에 도전할 계획이란다. 소설가 오스카 와일드는 말했다. 나이 드는 게 비극적인 이유는 우리가 사실은 젊기 때문이라고. 맞다. 청춘이 뭐 별거던가. 하고 싶은 일로 인해 여전히 가슴 뛰며 내일을 기대하는 한 그는 여전히 청춘의 한때를 살아가고 있는 것이리라.


이주현 객원기자 joohyunyi30@gma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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