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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차파 한인촌과 도산의 삶] 김순학은 지방회서 헌신하다 마차 사고로 별세

도산 공화국 <26>

말이 뛰쳐나가 마차서 떨어져 숨져
같이탔던 박충섭 가족은 중상당해
장례식에 한인·미국인 50여명 참석
친구 밀러는 문상객들 호텔로 초청
아들 김태선은 암으로 28세 사망
동포들 애절한 심정으로 죽음 애도





◆김순학의 죽음

김순학은 리버사이드 지방회관이 파차파 애비뉴에서 바인 스트리트로 이동했던 1918년 말에 대의원으로 선정되었다. 리버사이드 지방회가 쇠퇴하던 무렵에도 김순학은 리버사이드에서 활동했다. 1918년 당시 리버사이드에서 실업에 종사했던 사람은 허승원, 김인수, 김순학, 박충섭이다. 김순학은 리버사이드에서 30에이커 토지에 감자 농사를 지었다. 단독 경영은 아니고 2인 합자였으며, 자본이 2600원이었다. 이때 리버사이드는 재정 부족액이 8원 65전이었다.

또한 김순학이 1919년에 마차 사고로 사망했다는 현지 신문 기사도 발굴 되었다. 리버사이드 지역 신문인 '프레스 엔터프라이즈' 1919년 2월 24일 보도에서 "한국인 김순학이 어제 마차 사고로 중상을 입었는데 42세의 나이로 사망했다"고 나와 있어 김순학이 한국인임을 확인할 수 있었다.

'리버사이드 디렉터리'에서 1914부터 1917년까지 김순학이 글렌우드 미션 인 호텔에서 베이커로 일했다는 새로운 정보도 확인했다. 그는 마차 사고로 사망할 때까지 이 호텔에서 근무했다. 지역 신문인 '프레스 엔터프라이즈(Press Enterprise)' 2월 26일 기사에 "한인 장로교회에서 있었던 김순학의 장례식에 참석한 분들에게 감사하다"는 광고도 실려 있다.

'신한민보'는 김순학의 마차 사고에 대해 보다 자세히 보도했다. 1919년 2월 27일자 기사는 "김순학 씨 비명횡사. 달리는 마차에서 떨어져 즉각 사망. 리버사이드 지방에서 리운경.송종익 양 씨의 보고에 의하면 지난 23일 오후 4시 그곳에 거류하는 김순학 씨는 박충섭 씨의 가족과 함께 마차를 타고 농장에 나가다가 중도에서 마차에 매인 말이 부지중에 총알 같이 달아나는 바람에 마차 위에 앉아 있던 사람이 모두 떨어질 때 김순학 씨는 두골이 깨어져 곧 정신을 잃었다. 병원에 입원시켜 의사의 수술을 받았으나 마침내 차도를 얻지 못하고 그날 오후 6시10분에 세상을 떠났다. 그 이튿날 10시 30분에 에버그린 매장지에 안장하였다더라."

또한 같은 지면에서 "박충섭 씨 가족은 중상. 그 마차에서 떨어지는 때에 박충섭 씨와 그 부인과 자녀가 다 중상하였으나 위태한 지경은 면하였고 다만 박 부인은 잉태한 지 6, 7달이 된 가운데 마차에서 떨어질 때에 크게 놀랐고 조금 상처를 입어 마음과 신체가 강건치 못함으로 지금 그곳 병원에 입원하여 치료하는 중인데 수일 후면 차도를 얻어 퇴원할 듯하다더라"고 보도했다. 박충섭씨 부부와 함께 마차를 타고 가다가 김순학씨는 사망하고 박충섭씨 가족은 중상을 입은 것이다.

또한 '신한민보' 1919년 3월 6일자 기사는 "고 김순학 씨의 장례. 호상자 내외국인 46 명. 리버사이드에 다년 머물던 김순학 씨의 별세의 보도는 이미 기재되었거니와 지난 25일 오전 10시에 그 장례식을 그곳의 윔 암쓰테즈 교당에서 거행하였다. LA.업랜드.클리몬트 등지에서 호상으로 온 손님이 19인이오, 서양 손님이 14인이오, 본 지방 동포 13인과 더불어 46명이 호상하였다.

장례식은 민찬호 목사가 주장하여 슬픈 기도와 영결의 노래를 마친 후에 내외국인의 슬픈 눈물로 에버그린 매장지에 안장하였다. 후에 고 김씨의 제일 믿는 서양 친구 밀러 씨는 모든 손님을 '그린웃' 여관으로 청하여 오찬을 대접하였더라"고 전하고 있다.

여기서 밀러씨는 당시 김순학 씨가 일했던 글렌우드 미션 인(Glenwood Mission Inn) 호텔 주인이다. 그가 동양인 종업원의 장례식에 참석하고 문상객을 모두 호텔로 초대해 식사를 대접한 것은 매우 파격적인 행동이다. 그러므로 이 일은 김순학씨의 인품을 잘 보여 준다고 할 수 있다. 1911년 대한인국민회 북미 총회가 리버사이드에서 개최되었을 때 임시 회장을 역임했고 한인 장로 선교회 목사로도 활동한 김순학은 글렌우드 미션 인에서 일하면서 신임을 많이 얻었던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애석하게도 마차 사고로 사망한 것이다.

◆김순학의 아들 김태선

김태선(Joseph Kim)의 묘비에는 한글로 김티션의 묘사진을 확인해보니 '김티션'이것을 현대어로 읽으면 '김태션'이나 '김태선'이다. 김태선에 관한 새로운 신문 기사도 발굴되었다.

김태선은 현지 신문인 '프레스 엔터프라이즈(Press Enterprise)' 1915년 11월 23일에 자신이 주방장으로 일하고 싶다는 광고를 내기도 했다. 1925년 11월 24일에는 그가 사망했다는 신문 보도와 함께 1925년 11월 27일에는 장례식이 거행됐다는 보도도 발견되었다. 놀라운 사실은 김순학과 김태선은 부자지간이었다는 사실이다.

1925년 12월 3일 '신한민보'는 사망 소식을 다음과 같이 보도했다. "김태선 씨는 '캔서'로 불행 별세. 리버사이드에 거류하던 고 김순학 씨의 장남 김태선 씨는 불행히 '캔서'라는 중병을 얻어 그곳의 공립병원에 입원하여 치료하였었으나 마침내 백약이 무효하여 24일 오후 12시에 별세하여 같은 달 27일 오후 2시 반에 그곳의 공동 매장지에 안장하였다. 김 씨는 금년이 28세 된 아주 젊은 청년 학생으로서 그 목적을 이루지 못하고 황천의 나그네가 된 고로 당지에 거류 동포들은 동정의 뜨거운 눈물을 뿌린다더라. 리버사이드 통신"

이로부터 김순학과 김순학의 장남인 김태선이 부자 사이이며 그의 정확한 사망 원인도 밝혀진 것이다.

1918년에 김태선은 대한인국민회 회원으로서 아버지 김순학과 함께 의무금을 납부하였다. '신한민보' 1918년 2월 7일 "국민의무금. …김순학 5원, 김태선 2원 50전…"으로 나타난다.

'신한민보' 1918년 2월 14일 "창립기념절 각 지방, 리버사이드 지방회. 재류 남녀 동포 23인이 당일 식장에 출석하여 동 지방회장 구정섭 씨 주례하에 좌와 같은 예식을 순서로 거행하였다더라. 1. 개회…주석 구정섭, 2. 국가…일동, 3. 취지…주석, 4. 창가…아이들, 5. 축사…리운경, 6. 사현금…최재덕, 7. 축사…(누구나), 8. 우리 하변 지방회 역사…김순학, 9. 창가 …김태선, 10. 애국가…일동, 11. 삼호만세, 12. 폐식 다과 (리운경 씨 축사는 폭원이 없어서 생략함)"이라고 보도하였는데, 창립기념절 예식에서 아버지 김순학이 강연하고 아들 김태선이 노래를 불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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