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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물 오디세이] 강령탈춤 해외전승자 강대승…우리가락 대중화 좇은 50년 예인 인생

고교 때 탈춤에 매료
10년 전수, 이수자 돼
시·국립 수석무용수 거쳐
사물놀이 '두레패' 창단
2000년 LA 이민 와
14년 해외전승자 선정
전승관 열고 후학 양성
작년 미주예총 회장 취임




혹시 기억 하는지. 90년대 후반 LA한인타운 웨스턴가 한인회 건물의 대형 벽화 속 농악패 복장을 하고 상모 돌리며 장구치고 있던 청년을. 그 사내가 바로 황해도 강령탈춤 해외전승자인 강대승(66)씨다. 당시 벽화 속 갓 서른을 넘긴 청년은 강산이 세 번 바뀌는 동안 흰머리 희끗희끗한 초로의 신사가 됐지만 그 춤사위와 소리는 더 농익어 깊어졌다. 연기 전공자에 한국무용과 탈춤까지 섭렵하고 사물놀이에 미쳐 오늘에 이른 그는 더 이상의 설명이 필요 없는 타고난 예인(藝人)이다. 그는 이를 운명이라 했다. 그 운명을 따라 산 넘고 물 건너 오늘에 이른 그를 만나봤다.

#한국무용에서 사물놀이로

연극 연출가 부친과 한국무용가 어머니의 예술적 끼를 고스란히 물려받은 그는 어려서부터 예술방면에 두각을 나타냈다. 중학교 때 밴드부에서 활동하며 색소폰과 클라리넷을 연주했고 안양예고 연극과에 진학해선 배우를 꿈꿨다. 고교 졸업 후 극단 '산하'에서 활동하다 1973년 국립가무단(현 서울시뮤지컬단) 1기 무용수로 발탁돼 입단했다. 가무단 활동을 하면서 명지전문대 무용과에 입학해 한국무용을 전공했다.

군복무를 마친 후 1978년 시립무용단에 수석 무용수로 입단했는데 당시 20명 단원 중 유일한 남성 무용수였던 그는 이후 주연을 도맡아 한국 무용계의 스포트라이트를 받았다. 이처럼 전도유망한 무용수였던 그가 1985년 돌연 안정적인 직장인 무용단을 사직하고 사물놀이 공연단 '두레패'를 창단했다. 밖에서 보기엔 갑작스러운 결정처럼 보였지만 그가 국악과 인연을 맺게 된 것은 고교시절로 거슬러 올라간다. 우연히 신문에 난 '제 1회 봉산탈춤 강습회' 공고를 보고 연기공부에 도움이 될까 싶어 갔다 무형문화재 34호인 강령탈춤 보유자 고(故) 양소운 선생과 운명적으로 조우한 것이다.

그의 실력과 열정을 높이 산 양소운 선생의 권유로 문하생이 된 그는 10년간 스승에게 탈춤을 전수받아 1980년 강령탈춤 이수자가 됐다. 이후에도 꾸준히 우리가락과 춤을 연구하다 1985년 우리 소리에 미친 다섯 남자와 의기투합해 '두레패'를 창단한 것이다. 두레패 대표직을 맡은 그는 경기도 송추에 연구소를 마련하고 활발한 활동을 펼쳤다. 마침 당시가 86서울아시안게임과 88서울올림픽을 앞두고 우리 소리와 춤에 관심이 고조되던 터라 두레패는 국내는 물론 한국관광공사 홍보사절단으로 미국, 유럽, 일본, 중국, 호주 등 전 세계를 무대로 순회공연을 하며 우리 소리를 널리 알리는데 일조했다.

#LA는 제2의 고향

이처럼 잘나가던 그에게도 시련이 찾아왔다. 바로 1997년 터진 IMF 사태다.

"IMF 여파로 공연기획사들이 줄줄이 문을 닫으면서 1년간 잡혀있던 공연도 모두 취소됐죠. 한 달이면 6~7회 잡혀있던 국내공연은 물론 연 2회 이상 잡혀 있던 해외공연까지 줄줄이 취소됐으니까요. 그 상태론 두레패 식구들의 생계를 책임지는 건 불가능했죠."

그래서 그는 두레패를 해산하고 1999년 호주 이민을 계획하고 가족과 함께 호주행 비행기에 올랐다. 그러나 낯선 땅에서 생활인으로 살아가는 건 녹록지 않았다. 페인트 기술을 배워 일을 시작했지만 급여를 제때 못 받는가 하면 일부 한인들의 차가운 시선에 속앓이를 하기도 했단다. 그러다 그해 가을 빙부상을 계기로 아예 이삿짐을 꾸려 고국으로 돌아온 그는 심기일전 2000년 2월 LA에 왔다.

"LA에 올 땐 정말 비장한 각오로 왔죠.(웃음) 호주에서 실패한 경험이 있었기 때문에 이번엔 국악인이라는 이름을 벗고 진짜 이민자로 살아 보자고 단단히 각오했으니까요."

그러나 팔자 도둑질은 못한다고 오랜 가톨릭 신자인 그가 출석한 한인성당에서 지휘자가 단박에 그를 알아보면서 미사 때 장구 연주를 요청해 와 매주 국악미사를 이끌게 됐다. 그 소식이 LA와 타지역 성당들에까지 알려지자 그에게 탈춤 및 사물놀이를 가르쳐달라는 요청이 쇄도했다. 이후 그는 낮에는 페인트 작업을 하고 저녁엔 LA, 풀러턴, 토런스, 롤랜드하이츠, 발렌시아 등에서 사물놀이 소모임을 이끌었다. 또 성당 지인의 도움으로 스왑밋을 돌며 건어물 장사도 시작했다.

"정 많고 친절한 한인들 덕분에 잘 정착할 수 있었죠. 우리 전통문화를 사랑하고 관심 있는 이들도 많아 사물놀이를 꾸준히 가르칠 수 있다는 것이 무엇보다 행복했고요."

#강령탈춤 해외전승자 되다

그는 2005년 필랜으로 이사했다.

"한국에서도 그랬고 LA 와서도 늘 시골생활을 꿈꿨어요. 필랜은 눈보라가 칠만큼 사계절이 뚜렷하고 공기가 좋아 두 번 생각 않고 이사를 결심했죠."

2.5에이커 대지가 딸린 주택을 구입한 그는 그곳에 연습실을 마련하고 농사도 시작했다.

"홍매실과 도라지 농사를 주로 했는데 홍매실은 키우기가 까다로운 작물이지만 약용작물로 인기가 높죠. 일부는 한약재로, 일부는 매실액을 담가 판매했는데 워낙 인기가 좋아 없어 못 팔정도였죠.(웃음)"

그렇게 농사일과 국악 교습으로 바쁘게 지내던 그는 2014년 강령탈춤 해외전승자로 발탁됐다. 당시 무형문화재 해외전승자는 북미 5명을 포함, 전 세계에서 10명만이 선정됐다. 그리고 이듬해 LA한인타운 8가 길에 강령탈춤 전승관을 열었다. 전승관은 회원들의 회비로 운영되고 있는데 현재 60여명이 모여 사물놀이, 탈춤 등을 배우고 있다. 무형문화재 49호 송파산대놀이 이수자인 아내 이현숙(64)씨도 그와 함께 학생들을 지도하고 있다. 이후 활발한 활동을 펼친 그는 2016년 LA다운타운 노숙자를 위해 봉사한 공로를 인정받아 오바마 대통령 봉사상을 수상했고 지난해 9월부터는 미주예총 회장직을 맡아 분주한 나날을 보내고 있다.

"건강이 허락하는 한 우리 소리와 춤을 한인들에게 전수하고 싶어요. 그리고 기회가 된다면 세계적인 탈춤축제와 타악축제를 LA에서 개최하고 싶기도 하고요. 그러나 이보다 더 오랜 꿈은 결혼식을 올리지 못한 노부부들에게 한국전통 혼례를 무료로 올려주는 겁니다."

아마도 그가 건네고 싶은 건 우리가락과 춤사위에 덧입힌 그의 따스한 마음일지도 모르겠다. 제 땅 떠나 사는 게 얼마나 고단한 일인지 잘 알기에 아프고 상처받은 이들의 마음을 가락으로, 춤으로나마 그렇게 토닥여주고 싶었나보다. 태초부터 예술이 걸어온 길은 위로의 역사였으니.


이주현 객원기자 joohyunyi30@gma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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