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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앙신인문학상 수상작 : 수필 부문] 동백 아가씨 - 이한창 <장려>

내가 난생처음 동백꽃을 본 것은 어릴 적 고향 집 담 너머 옆집에서 전통 혼례식이 치러지던 어느 겨울날이었다. 앞마당 낮은 돌담을 따라 세워진 외지에서 사들여 온 둥근 화환들 속에 짙푸른 동백 잎새와 붉은 꽃잎과 그 안에 샛노란 수술의 동백꽃이 아름드리 꽂혀 있는 것을 본 순간 나는 눈이 동그래져 버렸다. 그도 그럴 것이 요즘 같으면야 추운 겨울에도 비닐하우스 재배로 꽃을 보는 것은 흔한 일이지만 그 옛날 두메산골의 엄동설한에 그런 생화를 본다는 것 자체가 전설의 고향 속에서나 있을 법한 일이었기 때문이었다. 그 어릴 적 동백의 선분홍 붉은 꽃이 어찌나 곱고 선명했던지 40여 년이 지났어도 정물화 사진을 찍어 마음 속에 간직해 둔 마냥 눈에 선하다.

원래 동백은 따뜻한 바닷가나 섬지방에서 바다의 습한 기운을 좋아하는 차나뭇과의 상록수다. 그러나 겨울철 영하로 내려가는 날이 많은 미 북동부 지방에는 그 꽃봉오리가 쉽사리 얼어 버려 원예수로는 버지니아 위쪽 지방부터는 키울 수 없다고 들었다. 하여 실내용으로 가꾸어 보려고 수년 전 백방으로 수소문해서 동백 묘목으로 어렵사리 구해 분재 화분에 심어 두었는데 각별히 지난해 가을부터 햇볕과 바람이 잘 드는 곳에 두고 이번 겨울에는 실내 창가에 두어 정성들여 물을 주면서 관리한 덕인지 이 녀석이 꽃봉오리를 하나씩 보여 주기 시작하더니 지난 연말부터 꽃을 피우기 시작했다.

지금 여섯 꽃봉오리에서 둘이 피었으니 몇 주 후면 나머지 것들도 부끄러움을 잊고 꽃잎을 살포시 터트릴 것을 기대하며 퇴근 후 집에 오자마자 애들 얼굴보다는 거실 창가에 핀 동백꽃을 살펴보며 오는 봄을 기다리는 것이 요즘의 일상의 재미이다. 집 뒤 살갑게 얼어붙은 호수 건너편 자작나무 숲속에서 간헐적으로 들려 오던 목이 긴 철새들의 울음소리도 정적만을 남기고 사라진 이 차가운 겨울밤. 식구들이 다 잠든 자정이 넘는 이 시간에 침대 위에서 뒤적뒤적하다 아래층 거실로 내려와 불을 켜고 창가에 다소곳이 핀 동백꽃을 살포시 살펴봤다. 농익은 분홍빛 꽃잎이 새색시 입술처럼 곱고도 붉다. 그러면서 내 마음 속에 조용히 생각해 주기를 기다렸다는 듯 또 하나의 추억 속의 동백꽃이 피어오른다.

토모미(智美).

내가 그녀의 집에 초대받은 것은 1995년 12월 31일이었다. 일본 관동지방의 남녘 끝자락인 카나가와(神奈川)현 미우라(三浦)시에 있는 그녀의 집에 가기 위해 동경에서 전철로 족히 2시간을 달려 종착역에서 미리 나를 마중 나온 그녀와 같이 다시 마을버스로 들어가 전형적인 일본식 목조로 된 그녀의 바닷가 집에 도착한 것은 해가 저문 저녁 무렵이었다. 일본에서는 신년 새해가 일 년 중에 친척들이 제일 많이 모이는 큰 명절인데도 나만을 특별히 초대한 것을 알아채고서는 내심 긴장의 빛을 감추지 못했다. 그런 내가 안쓰러웠는지 그녀의 가족들은 현관에 나와 반가운 얼굴로 정중히 맞아줬고 서로 인사를 나눈 나를 그녀의 어머니는 향나무 욕조에 따뜻한 물이 담긴 욕실로 안내해 줬다.

목욕을 마친 후 준비해준 실내복(유카타 浴衣)으로 갈아입고 다다미가 널찍이 깔린 거실에 들어서자 낮게 놓인 장식대 위에는 그녀의 어릴 적 사진과 스무 살 성인식 때 찍은 기모노 입은 단아한 사진이 장식되어 있었다. 저녁 식사를 마친 후 나는 대를 이어 건축업을 하는 그녀의 아버지와 오빠 이렇게 남자 셋이서 일본 술을 그녀의 어머니가 한 솥 가득히 만들어 준 오뎅탕을 안주 삼으며 이런저런 이야기들을 나누며 밤늦도록 마셨다. 그러나 그녀의 집 정원에 푸르른 동백나무가 있다는 것을 알아챈 것은 다음날 새해 첫날 해가 중천에 떠 늦게 일어나 마을을 구경시켜 주겠다던 그녀와 함께 근처 신사(神社)를 산책하고 그녀의 집 대문에 되돌아 와서였다.

드물게도 그녀는 대학 졸업 논문으로 조선 통신사를 연구했고 더 나아가 통신사의 발자취를 직접 느껴보겠다며 일본 열도를 기차로 횡단해 다시 배로 대마도까지 갔었다. 그리고 한국어를 배우러 일 년간 한국 유학도 했었고 가야금도 열심히 배워서 어느 한국 신문사 기사에도 소개된 적이 있는 그녀와의 셀 수 없는 나에게는 과분한 추억들 …. 주마등처럼 흐르는 이 추억들을 이제 와서 돌이켜 보면 동백 열매에서 짜낸 동백기름이 어두운 밤 등불을 밝히는 데 쓰인 것처럼 토모미와의 인연은 외롭기만 했던 나의 가난한 동경 유학 생활에 밝은 등불과도 같은 존재의 아가씨였을까? 아니며 옛 여인들의 삼단 같은 머릿결에 단정히 윤을 내는 데 쓰이는 것처럼 그녀와의 만남이 각박했던 나의 유학 생활 속에 웃고 견딜 수 있는 매끄러운 윤활유 같은 여인이었을까?

나비나 벌 같은 곤충이 없는 추운 겨울에 꽃을 피우는 동백은 꿀을 좋아하는 아주 작고 귀여운 동박새가 꽃가루를 옮겨 열매를 맺게 한다고 한다. 하지만 그녀와 나 사이에는 그 꽃가루를 옮겨 줄 그런 새가 맺어준 인연이 없었던 탓에 결국 열매를 맺지도 못한 채 그 후 20여 년을 태평양을 사이에 두고 각자의 인생을 살아가면서 단 한 번도 만나지 못하는 사이가 되어 버렸다.

지금은 아는 지인을 통해 들어온 이야기로는 그녀가 오오사카 주재 한국영사관에서 몇 년을 일하다 그만두고 외동딸을 두었으며 코베시 근교에 살고 있다는 정도다. 5년 전 일본 출장으로 동료 일행과 나고야(名古屋)를 들를 때 한 시간 정도면 만날 수 있는 지근 거리까지 간 나였지만 지인을 통해 전화 연락이 되어 그녀만 허락한다면 서로 만날 수도 있었지만 망설임 끝에 결국 다시 동경 숙소로 발길을 되돌리고 말았다.

자신을(이) 사모했던 사람에게는 언제나 옛 그 모습과 그때의 감정 그대로 남아 주길 원하는 게 인지상정이겠지만 그녀를 만날 반가움보다 나이 들어 새치마저 생긴 나의 중년의 모습을 보여 주기에는 나 자신이 용기가 없었다. 아니 그녀의 마음속에 담겨있는 20여 년 전의 앳된 청년이던 나의 모습을 그녀의 기억 속에 새겨둔 채로 살아가 주길 바라는 나의 이기적인 생각 때문일까! 그녀의 마음 속에 동백 꽃잎에 새겨진 말 못 할 나와의 사연을 가슴에 안고 사는 그런 '동백 아가씨'로 남아주길 바랄 뿐이다. 그녀와의 인연도 동백꽃의 습성처럼 아름답게 화사히 피다 갑자기 봄바람에 톡 떨어져 버리는 그런 뒤끝이 산뜻한 추억이길 바랄 뿐이다.

지금쯤이면 잔설이 쌓인 토모미의 고향집 정원 담장 아래에 피었던 정월 초하루에 봤던 그 동백나무에도 봄의 전령처럼 빠알간 겹동백이 어김없이 그때처럼 소담히 붉게 피어 있을게다. 눈을 지그시 감으니 그 붉은 동백 꽃잎들이 마냥 내 마음 속에서 빠알갛게 불타오르더니 창밖의 꽁꽁 얼어붙은 호수 위에 사뿐히 내려앉아 쌓여 있던 그 희미해져 가는 옛 추억을 조용히 녹여 내리고 있다.

한 잎씩 또 한 잎씩 눈꽃이 내려오듯 ….

[수상소감] 인생을 나누는 아름다운 그날

30여 년 전 방황하던 청소년기를 보내고 있었을 때 문득 길지 않은 인생을 살아가면서 일기를 쓰면 삶을 더 값있게 보내지 않을까 하는 막연한 생각을 한 적이 있었습니다. 그때 이후 일상의 소소한 일들을 일기로 기록해 두는 습관이 생겼는데 용기를 내어서 이번 수필부문에 응모하게 되었는데 뜻하지도 않은 상을 받게 된 것을 먼저 하나님께 영광을 돌립니다.

그리고 발달장애가 있는 아들도 언젠가는 자신의 삶을 글로 남겨서 다른 사람들과 함께 인생을 나누는 아름다운 그날이 오기를 고대하면서 앞으로도 좋은 글로 독자분들과 만나기를 원합니다.

[심사평] 구성에 대한 아쉬움 남아

'동백아가씨'는 20년 전 동경 유학 중에 알게 된 토모미라는 여인과의 동백꽃 같은 사랑 이야기다. 구성이 더 치밀하고 전체가 아우러지도록 문장을 꼼꼼히 챙겼더라면 훨씬 좋은 글이 되지 않았을까 싶다.

이민자들이 살아가는 곳에 이민 문학이 꽃핀다. 알렉스 헤일리의 '뿌리'가 세계적인 관심을 받았듯 디아스포라 문학이야말로 한국문학이 세계문학으로 통하는 지름길이 될 수 있다. 이민 생활이 도드라진 글을 기대한다. 당선작을 내지 못해 아쉽다. 미주 수필의 현주소를 겸허하게 성찰하는 계기가 되었으면 좋겠다.

<심사위원: 김영중 수필가, 정찬열 문학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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