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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앙신인문학상 수상작:수필 부문] 배롱나무 그늘 밑에서 - 조성환<가작>

전기에 감전된 듯 멈칫했다. 문을 여는 순간 표정없는 시선들이 내게 쏠려왔다. 병원 현관 맞은편 벽을 기대고 휠체어에 몸을 의지한 환자들이다. 주말 아침이라 누군가를 기다리는 것 같았다. 당황스럽고 미안한 마음으로 급히 돌아가는 걸음에 눈길이 따라붙는다. 뒤통수가 저릿해서 뒤돌아보면 내가 가는 곳이 궁금했던 눈들이 여전히 내 뒤를 쫓고 있었다.

어머니가 뒷마당 잔디에 물을 주다가 넘어져 꼬리뼈를 다치셨다. 다행히 금이 간 상태여서 몇 개월만 치료를 받으면 완치될 수 있다고 한다. 필리핀계 간호사는 이 양로병원에 오는 환자는 거의 죽어서 나가는 곳인데 당신의 어머니는 운이 좋으신 거라고 우리를 안심시켰다. 어머니도 양로병원의 성격을 이미 알고 계셨든지 긴장하는 빛이 역력했다. 자식들이 누누이 사정 설명을 해도 긴가민가한 눈치였다.

딸과 아들 며느리들이 돌아가며 어머니 곁을 지켰다. 늦은 밤 잠든 어머니의 손을 잡아보다가 깜짝 놀랐다. 이렇게 작은지 몰랐다. 외투도 없이 엄동을 견디던 시절 집으로 들어서는 꽁꽁 언 손을 덥석 잡아서 당신의 가슴 속에 파묻던 손이었다. 그때 어머니는 내 두 손을 감싸 쥐고도 남을 만큼 커보였다.

엄마의 작고 마른 손이 큼지막한 아들의 손에 감싸인 채 색색 고른 숨소리를 내며 야윈 잠이 드셨다. 어렸을 적 내가 아플 때 우련한 눈으로 옆을 지키다가 이마에 얹어주던 따뜻한 손. 아기 같이 잠든 엄마의 이마에 손을 대 보았다. 밭이랑 같다. 구순의 세월만큼 길고 고랑이 깊다.

어머니 곁에서 밤을 지키다 보면 병실마다 기묘한 소리가 들렸다. 병종에 따라 앓는 소리도 각각 달랐다. 고통을 못 이겨 새어 나오는 소리를 들으면 나도 아파지는 것 같았다. 이렇게도 아프고 저렇게도 아팠다. 간호사들이 분주하게 돌아다니고 잡부며 방문객이 찾아와 북적대기 시작하는 아침이 되자 나는 비로소 생기를 찾았다.

절규와 신음이 뒤섞여 돌아다니던 긴 터널의 밤을 빠져나와 병원 밖으로 나갔다. 맑은 아침 햇볕이 동그랗게 모여 있는 병원 밖 뒤뜰이 더없이 반가웠다. 배롱나무에 붉은 꽃망울이 새 희망처럼 막 터지고 있었다. 밖과는 달리 신음과 절규가 떠다니는 문지방 안쪽은 어두운 그림자만 깊게 드리워져 있었다.

이른 아침 어머니와 같은 병실 환자에게 여든은 됨직한 남편이 도시락통 하나를 들고 힘없이 들어섰다. 이 노인도 아침 저녁으로 들락거렸다. 부인은 앓고 있는 병의 종류가 많아서 장기 요양하고 있는 모양이었다. 늘 눈을 감고 있다가 무슨 까닭인지 남편만 보면 소리를 지르거나 화를 냈다.

병원에서 나오는 음식을 마다하고 남편이 만들어 오는 미음과 동치미 국물만 받아먹었다. 성을 내는 부인 앞에서 노인은 쩔쩔매면서도 그 성질을 다 받아냈다. 아내 옆에 앉아 손을 주무르거나 하염없이 쓰다듬었다. 그의 아픈 아내는 그제야 잠이든 듯 편안해 보였다.

어둑한 휴게실 옆자리에 우연히 동석했을 때 위로의 말을 전하자 다 내가 감당해야 할 업보지요. 노인은 들릴 듯 말듯 한목소리를 내려놓고 일어섰다. 의욕을 잃은 눈빛과 표정 없는 얼굴로 휘청 걸어가는 뒷모습이 정작 부인보다 더 아파 보였다.

어머니가 계시는 맞은편 병실에선 스물도 채 안 되어 보이는 청년이 할머니인 듯한 노인을 자주 찾아 왔다. 노인은 청년의 손을 연신 쓰다듬고 청년은 어깨를 들먹이며 소리 죽여 울었다. 무슨 사연이 있기에 손자인 듯한 청년만 찾아와서 저리 섧게 우는지 그 모습을 흘깃흘깃 훔쳐보면 영문도 모르는 눈물이 따라나왔다.

장기 입원한 환자를 찾는 가족이나 문병 오는 사람은 거의 없다고 한다. 환자들은 신음 속에 소중한 사람을 되뇌었다. 보고 싶은 자식들의 이름일 터였다. 피치 못할 사정으로 찾아오지 못하는 자식들도 어딘가에서 부모를 생각하며 눈시울을 붉히고 있을지 모른다.

배롱나무 그늘 밑 벤치에 앉아 이런저런 생각으로 마음이 어수선해졌다. 만일 어머니가 장기 입원을 해야 한다면 나도 형제들도 그 수발을 얼마나 충실히 들 수 있을지 알 수 없다. 어머니도 휠체어에 기대어 문밖을 하염없이 바라보며 누군가를 애타게 기다리게 될지 누가 알겠는가. 긴 병마는 천륜을 이간질하려 들지 모른다. 문득 뭔가가 불안하고 두려워졌다. 부디 살 만큼 산 그때 병마들이 찾아오기 전에 저를 거두어 주소서 하고 기도하는 심정이 되었다.

어머니가 퇴원하는 일요일 아침. 현관문을 들어설 때 일렬로 앉아 있는 환자들이 늘 부담스러워 눈길을 피하던 곳. 오늘은 일일이 손을 잡아 주어야겠다고 생각했다.

문을 열고 들어서자 내게로 쏠리는 눈. 손을 맞잡아 주리라던 마음이 멈칫한다. 무겁고 냉랭한 눈빛을 본 후였다. 숫기없는 마음에 손잡을 엄두가 나지 않았다. 못 본 체하고 들어서려다가 엉겁결에 하이 하며 손을 흔들었다.

순간 열대여섯 되는 손이 일제히 올라가며 흔들어 준다. 그리움에 겨웠던 손짓이다. 나는 용기를 내어 차례대로 손을 잡았다. 윤기 없는 손이 마른 나뭇가지처럼 뻣뻣하고 차가웠다. 마지막 남은 손을 잡았을 때 할머니가 내 손을 꼭 움켜잡고 놓지 않는다.

할머니는 눈가에 촉촉하게 이슬을 그려내며 그리웠던 사람의 이름을 부르며 자꾸 손등을 쓰다듬는다. 나는 한동안 그 손을 놓지 못한다.


"단비같은 글길 터줘 감사"
쓰고 싶은 이야기가 많았습니다. 이국의 하늘 밑에서 스치고 지나간 바람의 소리들. 애잔하거나 쓸쓸하거나 고독하거나. 사람 사는 곳이야 어딘들 다르랴마는 이방의 삶이 곤혹스러울 때 문득 모국어라는 끌어 않고 울어도 좋을 어머니가 있다는 걸 늦게서야 깨달았습니다.
밤을 새워가며 써보고 지우고 써 보기를 거듭하는 동안 생각지도 못한 언어들이 툭툭 튀어나왔습니다. 모국어가 눈 뜨는 순간의 희열. 늦게 찾아 든 사랑 앞에 밤은 청년의 잠 못 이루던 열정을 돌려줍니다.
사랑의 힘은 고독하지만 행복합니다. 저릿한 고통의 쾌감 같은 그런 것. 바람이 전하는 말을 들꽃이 눈 속을 비집고 들어오는 까닭을 바위가 때로는 울고 있는 모습을 생각하다 잠이 든 날은 내가 바람이 되고 들꽃이 되고 바위가 되어 있었습니다. 그것이 나의 이야기라는 것을 써야 할 터인데 얼마나 밤을 뜬눈으로 보내야 글의 꼬리를 잡을 수 있을지. 심사위원도 눈치를 채셨는지 아직 설익은 작품을 일단 선에 넣어두고 두고 볼 참인 것 같습니다.
'화살 하나가 공중을 가르고 과녁에 박혀/전신을 떨 듯이/나는 나의 언어가/바람 속을 뚫고 누군가의 가슴에 닿아/마구 떨리면서 깊어졌으면 좋겠다.'
이시형 시인의 '시'라는 시처럼 그런 작품이 나오도록 분발해서 뽑아 주신 것에 보답하겠습니다. 갈급한 심정에 단비 같은 글 길을 터주신 김화진.김동찬.성민희 선생님께 감사의 말씀 올립니다. 사랑하는 딸 봄이와 저의 짝 권영순과 함께 이 기쁨을 같이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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