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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물 오디세이] 덴톤스 로펌 박재균 변호사, 더불어 행복한 세상을 꿈꾼다

12세 때 이민 온 1.5세
직장생활하다 법대 진학
65개국, 변호사 8천명
대형 글로벌 로펌 근무
10년째 무료법률 봉사
청소년 멘토링도 앞장
전미아태변호사협 선정
'무료법률 변호사' 영예


진중함과 유쾌함을 오가는 이 남자, 나지막한 저음으로 조근 조근 이야기를 풀어낸다. 직업병인건지 선천적 기질인지 단 한마디도 허투루 내뱉는 법 없었지만 대화가 깊어질수록 그 솔직함에 놀라게 된다. 적당히 가리고 적당히 부풀린다고 한들 '슬기로운 사회생활'이라는 명목 하에 미덕으로 봐줄 법도 할 터인데 그는 극구 끈질기게 솔직했다. 세계 최대 글로벌 로펌 덴톤스(Dentons US LLP) 박재균(44) 변호사다. 그 솔직함 덕 세계 최대 로펌 변호사니 인권변호사니 하는 자극적인 겉모습 뒤 소외된 이웃들과 함께 사는 법을 고민하며 고군분투하는 평범한 한 남자의 민낯을 엿볼 수 있었다. 뚝심 있게 묵묵히 자신의 길을 만들어가고 있는 박 변호사를 덴톤 LA지사에서 만나봤다.

#역사학도에서 변호사로

서울 출생인 그는 대한무역투자진흥공사(KOTRA)에 재직 중인 부친 덕분에 어려서부터 부친의 발령지인 호주와 인도에서 8년여를 거주하는 등 한국과 외국을 오가며 살았다. 그리고 초등학교를 졸업하던 해인 1986년 샌호세로 가족이민 왔다. 미국에 와 부친은 부동산 에이전트와 비즈니스 컨설팅을, 어머니는 피아노 교습을 시작했다. 중학교 졸업 무렵 가족은 LA 밸리로 이사했고 그는 채츠워스 고교 졸업 후 1992년 UCLA 사학과에 입학했다. 졸업 후 진로를 고민하다 교수가 되겠다 결심한 그는 대학원 학비를 모을 요량으로 UCLA 법대 행정관리팀에 취직했다. 2년 예정으로 시작한 직장생활이었지만 그곳에서 4년여를 근무했다.

"대학입학 무렵 아버지의 사업실패로 집안 형편이 어려웠어요. 그래서 대학원 진학도 미루고 있었는데 한 교수가 법대가 적성에 맞아 보인다며 진학을 권유했죠. 사실 어려서 장래희망도 변호사였지만 막상 대학시절 로펌에서 파트타임으로 일해 보니 이상과 현실이 달라 포기했었는데 그 교수의 말이 자극이 됐죠. 그러나 법대에 가려면 당시 10만불 학비융자가 필요했는데 도저히 엄두가 나질 않았어요. 그래도 오랜 고심 끝 일단 저를 믿고 도전해 보기로 했죠."

그리고 그는 2001년 샌디에이고 대학(USD) 법대에 진학했다.

#진짜 행복을 좇다

2004년 가주 변호사시험에 합격한 그는 그해 샌디에이고 소재 중형 로펌에 취직했다. 1년 뒤 로스쿨 선배의 추천으로 샌디에이고 유명 로펌으로 이직한 그는 2006년엔 법대 동기인 캐시 박(40)씨와 결혼해 슬하에 남매를 두고 있다. 2013년 재직 중이던 로펌이 글로벌 로펌 덴톤스와 합병했는데 현재 덴톤스는 전 세계 65개국 지사에 총 8000명이 넘는 변호사를 거느린 세계 최대 로펌이다. 그의 전문 분야는 상법과 노동법. 그중에서도 건설공사 관련 케이스를 주로 담당했는데 지금껏 그는 미국 내 통신사, 대기업, 정부기관 등에서 의뢰받은 굵직굵직한 사건에서 승소를 이끌어내 그 실력을 인정받았다. 현재 그는 시간 당 600달러에 육박하는 몸값 귀한 변호사가 됐지만 대나무 천장(bamboo ceiling)을 뚫고 이곳까지 오는 여정이 그리 녹록지만은 않았지 싶었다.

"제가 근무 중인 샌디에이고 지사나 LA지사에 동양인 변호사는 몇 안 됩니다. 백인 변호사가 대다수죠. 그러나 보이지 않는 대나무 천장이 있다하더라도 열심히 하다보면 실력이 쌓이고 그러다보면 좋은 평판도 따라오게 됩니다."

이야기가 길어질수록 그는 돈 잘 버는 변호사이기 보다는 좋은 남편이며 아빠이길 원했고 무엇보다 세상에 도움을 줄 수 있는 사회구성원이고 싶어 했다.

"변호사라는 직업이 워낙 스트레스가 심해 돈 벌 목적으로만 하면 매일이 불행하거나 오래 버티지도 못하죠. 제 주변에서도 행복하게 일하는 변호사들을 보면 누군가를 돕는데 소명의식이 있는 분들이거든요. 저 역시 변호사라는 직업을 지금껏 계속 할 수 있는 건 제 의뢰인을 돕는 보람과 무엇보다 사회적 약자를 위한 무료 법률서비스인 프로보노(pro bono) 활동을 할 수 있었기 때문입니다."

#함께 사는 세상을 위하여

변호사가 된 후부터 꾸준히 프로보노 활동을 펼쳐오고 있는 그는 지난해 11월 전미아태변호사협회(NAPABA)가 선정한 '올해의 무료법률봉사 변호사'로 선정됐다. 또 2016년엔 인권피해자를 돕는 비영리재단인 카사코넬리아 법률센터로부터 '올해의 무료법률봉사 변호사상'을 수상할 만큼 법조계에선 이미 인권 변호사로 유명하다.

"변호사자격증으로 사회적 약자를 도울 수 있는 게 뭘까 찾다 시작한 일입니다. 처음 맡은 케이스가 에티오피아 난민 신청이었는데 법원에서 난민신청이 받아들여지자 의뢰인이 '당신이 내 생명을 구했다'고 울며 감사를 건넨 그 순간의 기쁨과 보람이 저를 지금까지 오게 했습니다."

이후에도 그는 남미, 중동, 아프리카 난민들을 돕기 위해 케이스당 적게는 1년 많게는 2~3년의 시간을 들여 그들을 도왔다. 이뿐만 아니다. 그는 지역사회 봉사에도 팔 걷고 나서 2007년 샌디에이고 한인변호사협회 창립에 앞장섰고 2009년엔 샌디에이고 팬아시안변호사협회 회장을 역임하기도 했다. 특히 그는 저소득층 청소년 및 소수민족 청년들의 멘토링에 관심이 크다. 그래서 5년 전 로펌 내 동료 변호사 9명과 팀을 꾸려 비영리재단과 함께 저소득층 고교생들의 법률공부 및 법조계 커리어 계발을 적극 지원해오고 있다. 또 2014년엔 본보 샌디에이고 지사와 함께 한인청소년들을 위한 멘토링 및 자기계발 프로그램 'TYP'를 발족시킨 이래 지금까지 봉사활동을 이어오고 있다. 무엇일까. 그를 돈도 안 되고 그리 빛나지도 않는 자리로 이끈 건.

"말도 통하지 않고 시스템도 다른 나라에서 고생하는 이민자들을 보면서 어려서부터 그들을 돕고 싶었어요. 특히 진로문제에 있어 적절한 조언을 해줄 이들이 없는 소수민족과 저소득층 청소년들에게 인생선배로서 멘토가 돼주는데 큰 보람을 느낍니다. 제가 그들과 나눌 수 있는 무언가를 갖고 있다는 게 오히려 감사할 따름이죠."

루쉰은 말했다. '희망이란 것은 있다고도 할 수 없고 없다고도 할 수 없다. 그것은 마치 땅 위의 길이나 마찬가지다. 원래 땅 위에는 길이란 게 없었다. 걸어가는 사람들이 많아지면 그게 곧 길이 된다'고. 각자도생이 미덕이 돼버린 21세기, 더불어 사는 세상을 꿈꾸는 그의 한 걸음 한 걸음이 더 특별해 보이는 이유다.


이주현 객원기자 [email protecte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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