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현 "캡틴 보고 있나"…거침 없는 황금세대
글로벌 돌풍 '5G' 스포츠 스타들
정현이 3세트 타이브레이크에서 마지막 포인트를 따내 자신의 '우상' 노박 조코비치(31.세르비아.14위)를 상대로 세트스코어 3-0 승리를 확정한 순간, 모든 관중이 일어서 환호와 박수를 보냈다. 어쩌면 경기는 클라이맥스로 가는 서곡이었다. 코트에서 진행된 인터뷰(온 코트 인터뷰)에서 정현은 유창한 영어와 재치 있는 언변으로 관중을 다시 한번 열광시켰다. 이어 맘 졸이며 경기를 관전한 부모를 향해 큰절을 올렸다. 그리고 사인을 위해 준비된 카메라 렌즈 앞 유리에 '캡틴, 보고 있나'라고 휘갈겨 썼다.
유창한 영어·언변에 관중들 또 열광
메이저 4승의 '레전드' 짐 쿠리어(48.미국)가 진행한 인터뷰에서 정현은 "어릴 적 우상인 조코비치의 플레이를 모방(copy)했다"고 자신을 낮췄다. 하지만 곧바로 "조코비치보다 젊어 체력적으로 유리했다"는 반전의 자신감을 내비쳤다. 패자 조코비치마저 팬들에게 "(내 부상을 이유로) 정현의 승리를 깎아내리지 말라"고 당부할 만큼 정현은 경기 내적, 외적으로 칭찬받을 만했다.
정현은 새로운 유형의 스포츠 스타다. 선수로서의 천재성(Genius)이란 토대 위에 무서운 집중력(Geek.마니아)으로 세계 무대에 자신을 각인시켰다. 세련된 매너(Gentle)와 외국어 실력(Global)까지 두루 갖춘 한국 스포츠의 새로운 황금(Golden) 세대다. 2018년 한국 스포츠는 바로 '5G-제너레이션(Generation.세대)'의 시대라고 부를 수 있다. 정현 외에도 축구의 손흥민(26.토트넘), 골프의 전인지(24.KB금융그룹) 등을 '5G-제너레이션'의 대표라 할 수 있다.
특히 거침없는 외국어 인터뷰는 '5G-제너레이션'의 상징과 같다. 인터뷰 때 웃음만 지은 채 고개만 끄덕이던 이전 세대와는 확연히 다른 선수들이다. 손흥민은 독일어와 영어가 유창하다. 데뷔 초부터 통역 없이도 자신의 의사를 확실하게 전달했다.
독일 분데스리가 함부르크SV 시절 동료 라파엘 판데르 파르트(35.레알 베티스)는 손흥민의 독일어 실력을 "현지인 수준"이라고 평가했다. 손흥민은 독일 방송사 토크쇼에 출연해 독일어 실력을 뽐내기도 했다.
전인지는 2016년 미국 여자프로골프(LPGA)투어 메이저 대회인 에비앙 챔피언십에서 우승한 뒤 또박또박 영어로 소감을 말했다. 해외 거주 경험이 없는 한국 여자 골퍼가 영어로 우승 소감을 말한 건 이례적이었다. 우승을 일찌감치 확정한 뒤 전인지가 마지막 홀을 돌며 혼잣말로 영어 소감을 외우는 장면은 인상적이었다.
손흥민·전인지 등 천재성·매너 갖춰
유상건 상명대(스포츠정보기술융합학과) 교수는 "예전 운동선수들은 기량이 좋지만 세계 무대에만 나가면 주눅 들고 압도되기 일쑤였다. 인터뷰나 동료 선수들과의 교류 등 경기 외적인 부분이 항상 아쉬웠다"며 "요즘 세대는 문화적 자신감과 경제적 배경을 바탕으로 세계 무대에서도 당당하다"고 분석했다. 김유겸 서울대(체육교육과) 교수는 "정현이 카메라 렌즈에 '보고 있나'라고 쓴 건 잘 준비된 액션이다. 요즘 세대 선수들은 자신의 의사를 표현하는 데 스스럼이 없다"고 설명했다.
'5G-제너레이션'은 수영의 박태환(29), 피겨스케이팅의 김연아(28), 스피드스케이팅의 이상화(29) 등 척박한 환경을 딛고 자신의 길을 개척했던 직전 세대 천재들과도 좀 다르다. 일찌감치 재능을 보인 이들은 탄탄한 지원 속에서 '온실 속 화초'처럼 성장했다. 하지만 과학적.체계적 프로그램 덕분에 이들은 '수퍼 화초'로 자랐다.
손흥민은 어린 시절 학교 운동부를 거부하고 프로축구 선수 출신인 아버지 손웅정씨에게 축구를 사사했다. 손웅정씨는 어린 아들에게 6년간 볼 리프팅 훈련만 시켰다. 이런 독특한 훈련은 아들의 플레이에 큰 영향을 미쳤다. 손흥민은 동북고 1학년이던 2008년 대한축구협회 우수선수로 뽑혀 독일에 유학했다. 이후 함부르크에서 분데스리가에 데뷔했다.
정현도 아버지 정석진 삼일공고 전 감독에게 테니스를 배웠다. 2008년 세계적 권위의 국제주니어 대회인 오렌지볼과 에디 허 인터내셔널 12세부 정상에 올랐다. 2009년 IMG아카데미 후원으로 세계적인 코치 닉 볼리테리가 운영하는 미국 플로리다의 테니스 아카데미에서 유학하면서 급성장했고, 2011년 오렌지볼 16세부를 제패했다.
김유겸 교수는 "국내 지도자도 마인드가 바뀌었는데, 국제 경험을 쌓은 지도자도 늘어나는 추세"라며 "어릴 때 재능을 보이는 선수는 선진 환경에서 배울 기회를 쉽게 얻을 수 있다. 이처럼 새로워진 환경에서 새로운 유형의 선수가 등장한 것"이라고 설명했다.
주눅 든 기성세대에 던진 메시지
'5G-제너레이션'은 뛰어난 실력을 갖췄으면서도 튀지 않는다. '플라잉덤보'(디즈니의 아기 코끼리 만화 캐릭터)라는 별명을 가진 전인지는 언제나 미소를 띤 채 경기를 즐긴다. 반대로 버디를 하거나 심지어 우승해도 화려한 세리머니는 삼간다. 패전으로 힘들 경쟁자에 대한 예의다. 정현 역시 소박하고 소탈하다. 화려한 헤어스타일과 패션을 추구했던 그 전의 스포츠 스타들과는 뭔가 다르다.
최동호 스포츠문화연구소 이사는 "이들은 박찬호.박세리.박지성 등 1세대 월드 스타를 보면서 자랐는데, 어떤 행동이 팬들로부터 존중받고 존경받는지 배웠고 그런 행동양식을 따라 한다"며 "정현이나 조코비치의 인터뷰가 호평받는 이유를 선수들 스스로 잘 알고 있다. 팬도 스타의 행동에 감동할 만큼 충분히 세계화됐다"고 설명했다.
유상건 교수는 "정현의 인터뷰는 당당한 젊은 세대가 주눅 들었던 기성 세대에게, 도전하는 젊은 선수가 좌절하는 젊은이에게 던지는 메시지다. 그 메시지에 사람들이 열광하는 것"이라며 "스포츠 스타의 일거수일투족과 말 한마디, 이를 수용하는 팬들의 달라진 자세는 우리 사회의 변화를 보여주는 거울"이라고 말했다.
김원 기자
with the Korea JoongAng Daily
To write comments, please log in to one of the accounts.
Standards Board Policy (0/250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