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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물 오디세이] 역사학자·작가 이자경 "나와 같은 세상의 아웃사이더 위로하고파"

77년 LA로 가족 이민
극작가·미술평론가 활동
88년부터 멕시코 이민사 취재
96년 '해외한인 기록물' 대상
4·29·인종차별·위안부 문제 등
사회성 짙은 희곡 꾸준히 발표
"한 시대 힘들게 살다 간 이들
이야기 전하는 게 평생 소명"


그녀에게선 68혁명 냄새가 났다. 그해 5월, 흑백사진 속 파리의 거리를 살펴보면 금방이라도 그녀가 튀어나올 것만 같았으니까. 극작가이며 역사학자인 이자경(73)씨다. 고희를 넘긴 노(老) 작가에게서 탈권위와 저항의 상징이었던 60년대 파리의 앙팡 테리블(무서운 아이들)을 떠올리다니. 68세대들은 '서른이 넘은 사람을 믿지 마라'했지만 고희를 넘긴 노(老) 작가의 눈빛은 청년처럼 서늘했고 여전히 68세대들이 그토록 외쳤던 '금지된 것을 금지하기'위한 창조적 파괴의 지난한 여정에 서 있었다.

#시대를 앞서 간 허무주의자

함북 회령 출신인 그녀는 1966년 서라벌예대 문예창작학과 입학했다. 고교동창들은 대학을 졸업하던 무렵인 스물 셋 되던 해 대학에 진학한 것이다.

"중·고교 때부터 학교 가길 싫어했어요.(웃음) 제도권 교육에 대한 반감도 있었고 학교에서 배울게 없다는 생각도 했죠. 대학은 부모님이 원해서 갔지만 대학 이후에도 아카데미즘엔 별 매력을 느끼진 못했어요."

대신 그녀는 책속으로 파고들었다. 데카르트, 칸트, 쇼펜하우어를 지나 카뮈, 사르트르, 볼테르 등 유럽 사상가와 철학가가 그녀의 스승이 돼줬다. 또 대학시절엔 연극에도 관심이 많아 '극단 가교'에서 연출 공부를 하기도 했다. 그런가하면 1968년 한국정부가 실시한 한국 최초의 컴퓨터 프로그래머 양성 교육에 홍일점으로 참가하는 등 새로운 기술과 신문물에도 관심이 많았다. 대학 졸업 후 행정 전문잡지 '월간 중앙행정' 기자로 취직한 그녀는 워터게이트 등 세계 정치사에 한 획을 그은 굵직굵직한 사건분석 기사로 실력을 인정받아 입사 1년도 안 돼 편집장으로 고속 승진했다.

"당시 여성들의 사회진출이 많지도 않았고 한국 사회전반에 만연한 성차별로 직장생활이 쉽지 않아 2년 뒤 사직서를 냈죠. 이후 미국행을 결심한 것도 답답한 한국사회를 떠나 자유롭게 공부하고 싶었기 때문입니다."

1972년 결혼한 그녀는 파트타임으로 출판·잡지 관련 일을 하다 1977년 남편, 어린 딸과 함께 LA로 와 재봉일과 건물청소 등으로 생계를 이어갔다. 그렇다고 글쓰기를 작파한 건 아니었다. 한국 여성지 통신원으로 기사를 보내고 소설 공모전에도 응모하는 등 이역만리 타국에서도 창작열은 여전했다.

#한인사회 문화부흥기를 주도하다

당시 그녀의 아파트는 LA에 거주하거나 LA를 방문하는 한국 예술가라면 반드시 들러야하는 사랑방이 됐다. 특히 미술과 연극계 인사들과 왕래가 잦았던 그녀는 1981년 LA 연극인들과 의기투합, '극단 1981'을 창단하고 그해 연작 '곡(哭) 1·2·3'을 선보여 LA타임스 등 주류 언론의 극찬을 받았다. 이외에도 그녀는 '20세기 고객 여러분'(1979) '단혈'(1983) '산타마리아 애비뉴의 살인'(1992) '니느웨로 가라'(1999), 4.29LA폭동 10주년 기념극 '블랙 아메리카'(2002) 등 사회의식 짙은 다양한 희곡을 발표해 무대에 올렸다. 또 그녀는 미술평론가로도 활발한 활동을 했다.

"80년대 LA 한인사회는 문화 부흥기였어요. 특히 실력 있는 한인 미술가들이 많았는데 평론가가 없다보니 이들이 제게 평론을 부탁해왔죠. 그래서 그때부터 독학하며 평론을 쓰기 시작했죠."

이처럼 극작가로 미술평론가로 왕성한 활동을 하던 그녀에게 잊을 수 없는 순간이 찾아온다. 1988년 멕시코를 방문했던 친한 지인으로부터 그곳에 한인 3세, 4세가 있다는 이야기를 전해 듣게 된 것이다.

"노예로 팔려간 이민자들의 후손의 이야기를 듣는 순간 가슴이 뛰기 시작했죠. 피가 당긴 거라 할까요. 당시엔 무조건 만나봐야겠다는 생각밖엔 없었어요. 그래서 일단 배낭 하나 달랑 메고 멕시코 행 비행기에 올랐죠."

한 달간의 취재를 마치고 돌아온 그녀는 1년 뒤 이 취재기를 '일요뉴스'에 연재했고 독자들의 반응은 뜨거웠다.

#멕시코 한인 이민사와 운명적 만남

이후 10년간 그녀는 틈만 나면 멕시코를 찾아 멕시코 이민 후손들의 발자취를 추적했다. 한인 2세, 3세 가정을 찾아 그들을 얼싸안고 뜨거운 눈물을 흘리며 밤새 이야기를 나누기도 하고 주 멕시코 한국대사관 및 한인회 창고에서 옛 자료를 뒤지기도 했다. 그리고 그 10년 간의 기록은 1996년 문화일보와 SBS, 지식산업사가 공동 주관한 '광복50주년 기념 해외 한국인 기록문화상'에서 대상을 받게 된다. 그리고 1998년 '한국인 멕시코 이민사'(지식산업사)가 세상에 나왔다. 그동안 대한민국 현대사에서 잊혀졌던, 1905년 에네켄(용설란)농장에 노예처럼 팔려갔던 1000여명의 한인들과 이후 100년 간의 비극적인 멕시코 이민사에 대한 재조명에 한국 언론과 학계는 뜨거운 관심을 보냈다. 이후 멕시코 이민 100주년을 맞아 한국정부와 대기업의 후원으로 2006년 그녀는 '멕시코 한인 이민 100년사'를 출판했다. 그러면서 소설 및 시 창작활동도 게을리 하지 않았다. 위안부 문제를 다룬 '할로윈 파티'(2000), 80년대 군사정권을 비판한 '육손이'(2001), 일본계 회사의 인종차별에 항의하다 자살한 고 이명섭씨 사건을 다룬 '어느 한국인을 위한 보고서'(2010), 성경을 모티브로 현대사회를 비판한 시 바벨론별곡(2012) 등 대한민국 현대사와 미주 한인사회의 아픔을 다룬 작품들을 꾸준히 발표했다.

젊은 시절 허무주의와 실존주의 철학에 빠져 자살충동에 시달린 그녀는 스스로를 아웃사이더라 부른다. 그래서일까. 그녀는 평생을 자신과 같은 아웃사이더와 그들의 연대기를 기록하는 데 바쳤다.

"한 시대를 힘들게 살다 간 이들에 대한 연민이랄까 동질감이 저를 이곳까지 끌고 왔죠. 그들과 눈 맞추고 그들의 이야기를 세상에 알리는 일이 결국 제 평생의 소명이지 싶습니다."

젊은 시절 그녀가 탐독했던 '아웃사이더'의 저자 콜린 윌슨은 '아웃사이더는 인간이 붐비는 곳에서 태어났지만 어떤 알 수 없는 정열적인 동경이 그들을 사막 속으로 몰고 간다'고 말했다. 그래서인가. 그녀는 오늘도 황량한 사막 속을 터벅터벅 걷고 있다. 그 여정 어디쯤에선가는 오아시스를 만날 수 있게 될까. 아니면 이미 그녀 오아시스 어디쯤에 도달해 그 주위를 배회하고 있는 걸까.


이주현 객원기자 joohyunyi30@gma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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