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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물 오디세이] 탑 메디컬그룹 오형원 박사 "끊임없이 배우는 게 늙지 않는 비결"

59년 서울대 의대 졸업
월남전 참전, 무공훈장도
76년 메릴랜드서 개원
81년 LA 와 25년 개업의
무료진료, 인술 펼친 공 인정
미 의회 수여 '올해의 의사상'
"저소득층 환자 위해
무료진료 봉사하고파"


그와는 구면이었다. 수 년 전 야간진료센터에서 환자와 의사로 한 번 만난 적이 있기 때문이다. 물론 그는 기억하지 못했지만 환자입장에서 그날의 만남은 꽤나 강렬했다. 당시 그는 약 처방과 함께 생활습관 교정과 증상에 좋은 식품까지 친절히 설명해 줬다. 환자 진료에 적잖은 시간을 할애하는 그 낯선 노(老)의사와의 만남은 신선하다 못해 당황스럽기까지 했다. 바로 가정의학과 전문의 오형원(83) 박사다. 다시 그는 여전했다. 남들은 은퇴할 나이에 진료 현장을 종횡 무진하는 그는 한인 환자들, 특히 자신과 함께 나이 들어가는 시니어 환자들에 대해 각별한 애정을 드러냈다. 이달 중 개원을 앞두고 있는 탑 메디컬그룹 진료실에서 오 박사를 만나봤다.

#한인사회와 함께 나이 들다

대구 출생인 그는 경북고 1회 졸업생으로 1953년 서울대 의대에 입학했다. 1959년 의대졸업 후 외과전문의가 된 그는 군의관 시절이던 1965년 월남전에 참전해 무공훈장을 받기도 했다. 월남전에서 돌아와 수도육군병원 외과 부장으로 복무했고 제대 후엔 한미병원 외과 과장으로 재직하다 1973년 아내와 어린 두 딸을 데리고 미국에 왔다. 메릴랜드에 정착한 그는 지역 종합병원에서 인턴십과 레지던트를 거쳐 1976년 개인병원(가정의학과)을 개원해 5년여 간 진료했다. 그러다 1981년 처가식구들이 있는 LA로 이주해 라크라센타에 병원을 개원했다. 2년 뒤 LA한인타운 6가 길에 분원을 오픈했고 1987년 라크라센타 병원은 닫고 8가길 동서식품 인근으로 이전해 LA한인타운에서만 20년 넘게 진료했다. 이처럼 진료경험이 풍부하다 보니 요즘도 젊은 한인 의사들이 그에게 한인 환자, 특히 시니어 환자 진료 노하우를 자문해오기도 한다고.

"한번은 한 2세 의사가 시니어 환자들에게 어디가 아파서 왔냐고 물어보면 많은 분들이 온 전신이 아파서 왔다고 한다는 겁니다. 그럴 땐 너무 당황스럽다고 어떡해야 하느냐고.(웃음) 그럼 제일 아픈 데가 어디냐 부터 차근차근 물어보라고 해요. 그러다보면 원인을 발견할 수 있게 되거든요."

LA로 병원을 옮긴 80년대부터 본격적으로 한인사회에서 다양한 활동을 시작한 그는 재미서울대 의대 총동창회 회장을 비롯, 서울대 남가주 총동창회장, 남가주 한인의사협회 회장 등을 역임했다.

#'올해의 의사상'부터 '의료 봉사상'까지

그러나 당시 그가 무엇보다 심혈을 기울인 것은 80년대 중반부터 확산되기 시작한 HMO 한인 가입자들을 위한 한인 의사들로 구성된 IPA(Independent Providers Association)를 조직하는 것. 그래서 그는 뜻 맞는 한인 의사들과 함께 1988년 '유나이티드 MPO'를 출범시켰다. 이후 유나이티드 MPO는 LA 및 오렌지카운티 한인 의사 100여명이 가입된 명실상부 남가주 한인사회를 대표하는 메디컬그룹으로 성장했지만 몇 년 뒤 여러 한인 IPA가 출범하면서 자연스레 해체됐다. 이처럼 진료하랴 IPA 관리하랴 바쁜 와중에도 그는 보험이 없는 한인들을 위해 각종 의료혜택을 주선하는 것은 물론 이들을 위한 무료진료도 마다하지 않았다. 이런 노력을 인정받아 그는 2003년 미국 의회로부터 '올해의 의사 상'을 수상했다. 이후 은퇴준비를 시작한 그는 두 딸들이 살고 있는 샌디에이고로 이주를 계획하고 2005년 병원 문을 닫았다. 그리고 2년 여간 한인건강정보센터에서 가정의학과 전문의로 근무하다 2007년 샌디에이고 소재 한 한인 병원의 제안으로 파트타임 진료를 시작한다. 그러면서 샌디에이고 노인회와 연이 닿아 건강 세미나 및 서예 클래스를 이끄는 등 7년 넘게 LA와 샌디에이고를 오가며 살았다. 이처럼 한인 노인들의 건강증진을 위해 힘쓴 공을 인정받아 그는 2013년엔 오바마 대통령이 수여한 '의료 봉사상'을 받기도 했다. 그러나 그는 7년 뒤 샌디에이고 이주를 포기한다.

"30여 년 넘게 LA에 살아 이곳에 생활터전이며 친구들이 다 있다 보니 샌디에이고에서 영구 정착이 쉽지 않더라고요. 그래서 다 접고 다시 LA로 왔죠."

LA로 돌아온 그는 2015년 LA한인타운 야간진료센터에서 1년간 근무했다.

#서예는 평생의 길동무

한평생 의사로 살아온 그이지만 그의 인생을 이야기할 때 빼놓을 수 없는 것이 바로 서예. 20년 전인 60대에 서예를 배우기 시작한 그는 목판에 붓글씨를 새기는 서각(書刻)까지 섭렵했다. 이처럼 늦은 나이에 붓을 잡게 된 것은 운명일지도 모르겠다. 그의 부친은 한국서화가협회 회장을 지낸 고 서관 오해용 선생. 그러다보니 아주 어려서부터 서당에 다니며 집에서 붓글씨 연습을 즐겨했다고.

"나이 들어서는 공부하랴 진료하랴 바빠 서예에 대해 생각해 볼 틈이 없었는데 60대에 들어서니 아버지 생전에 서예를 배워야겠다는 생각이 들더군요. 그래서 당시 아흔을 넘긴 부친께 말씀드렸더니 너무 좋아하셨죠."

한국에 거주하던 부친은 그에게 문방사우를 보내왔고 그는 서예가에게 지도를 받으며 퇴근 후 3~4시간씩 연습에 매달렸다. 이후 미주한인서예협회 회장을 지내기도 한 그는 지난 20년간 협회에서 실시하는 연례 회원전에 참가했고 2년 전 한국 서예공모전에 응모해 오체상(五體賞)을 수상하기도 했다. 또 6년 전엔 먹으로 난초와 꽃, 나무를 그리는 문인화에 입문했다.

"끊임없이 새로운 걸 배우는 게 제 건강 비결이라면 비결일 겁니다. 그리고 나이 들어서도 봉사가 됐든 직업이 됐듯 일을 놓지 않고 사람들과 어울리는 것이 젊음의 비결이 아닐까 싶어요, 그래야 늙을 새가 없거든요.(웃음) 그리고 무엇보다 기회가 된다면 저소득층을 위한 무료 의료봉사활동을 꼭 하고 싶습니다."

문득 히포크라테스 선서 한 구절이 떠올랐다.

'이제 의업에 종사할 허락을 받으매 나의 생애를 인류봉사에 바칠 것을 엄숙히 서약하노라/(중략)/나의 양심과 위엄으로서 의술을 베풀겠노라/나의 환자의 건강과 생명을 첫째로 생각하겠노라'

<히포크라테스 선서 중에서>

반세기도 훨씬 전 한국의 한 젊은 의학도에게 큰 울림을 줬을 이 히포크라테스 선서는 이역만리 타국에서 어느새 백발성성 해진 노 의학자에게 여전히, 아니 세월의 무게를 덧입어 더 반짝이고 있었다. 가늠할 수 없는 그 세월 앞에 절로 고개가 숙여지는 순간이었다.


이주현 객원기자 [email protecte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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