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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물 오디세이] 한유정 미술감독, 영화적 상상력을 현실로 소환하다

한국 대기업 다니다 유학
USC서 무대디자인 석사
선댄스 초청 독립영화로
'영화미술 마이더스' 찬사
방송·영화 종횡무진
할리우드 사로잡아
디자인업체 '본때' 설립
인테리어 분야도 진출


복잡다단한 작가적 상상력과 명쾌한 현실 그 사이 어디쯤 그녀가 서 있다. 바로 할리우드가 사랑한 미술감독 한유정(44)씨다. '베터 럭 투모로우' '허스' '댄싱 닌자'등 수십 편에 달하는 한 감독의 필모그래피만을 봤을 땐 꽤나 콧대 높고 까칠한 성격의 소유자가 아닐까 지레 짐작했다. 그러나 웬걸, 직접 만나 이야기를 나눈 그녀는 솔직담백함에 유머까지 장착했다. 그러나 무엇보다 그녀를 더 빛나게 한 건 초심이라 명명하기엔 훨씬 더 재기발랄하고 반짝이는 청춘의 열정이었다.

#무대 디자이너를 꿈꾼 소녀

서울 출생인 그녀는 예원중·서울예고를 거쳐 1992년 이화여대 장식미술과에 입학했다.



"중학교 3학년 때 만난 한 성악가가 제가 미술 공부를 하고 있다는 걸 알고 대뜸 한국의 무대 디자인이 너무 열악하다며 그 분야를 공부해 보라 권유하더라고요. 운명처럼 그 말이 가슴에 꽂혀 그 후부터 줄곧 미국 유학을 꿈꿨죠."

대학 졸업 후 유학자금을 마련하기 위해 1996년 대기업에 입사한 그녀는 새벽엔 영어학원에 다니고 퇴근 후엔 대학원 입학전형에 필요한 포트폴리오를 만들며 차근차근 유학준비를 했다. 이후 어느 정도 돈이 모이자 미련 없이 사표를 내고 1997년 유학길에 오른 그녀는 USC대학원에서 무대 디자인 공부를 시작했다. 그러나 오랜 꿈을 이룬 기쁨도 잠시, 그해 겨울 IMF사태가 터졌다.

"전액장학금을 받아 학비는 해결됐지만 환율폭등으로 생활비가 문제였죠. 그래서 조교부터 시작해 소품실 관리인까지 닥치는 대로 아르바이트를 시작했어요."

또 집세가 저렴한 곳으로 이사하고 끼니는 고추장에 밥 비벼 김 싸 먹기도 하고 매주 두 차례씩 맥도널드에서 3개에 1불하는 햄버거를 사와 냉동시켰다 데워 먹으며 생활했다.

"학업과 아르바이트를 병행하느라 하루 2~3시간밖에 못자는 고달픈 생활의 연속이었죠. 그래도 하고 싶은 공부를 할 수 있어 너무 행복한 시간이었습니다."

#미쳐도 좋아

그녀가 영화와 인연을 맺게 된 것은 USC대학원 영화과 학생들에게 단편영화 미술감독 의뢰를 받으면서부터. 이후 입소문을 타고 학생들의 의뢰가 쏟아져 들어왔다. 가뜩이나 모자란 생활비를 저예산 영화 세트 디자인에 쏟아 부으며 미친 듯 일하던 그녀에게 상업영화 데뷔 기회가 찾아왔다. 배우 정우성과 고소영이 주연을 맡고 LA에서 올로케 촬영한 한국영화 '러브'(1999) 제작진이 그녀에게 미술감독을 제안해 온 것이다.

"미술감독은 세트뿐만 아니라 영화에 나오는 모든 배경과 소품을 관장합니다. 주인공이 사는 아파트부터 세탁소, 식당에 길거리 장면까지 영화적 상황과 캐릭터에 맞게 디자인하는 거죠. 그러다보니 어떤 배우들은 제 세트에 들어와서 아 이제야 내 캐릭터가 파악 되네요 라고 말하기도 해요. 제겐 최고의 찬사죠."

이후 그녀는 독립영화 '리틀 히어로즈'의 미술감독으로 참여하는 등 학업과 영화 미술감독을 병행하며 2000년 석사학위(MFA)를 받았다. 졸업 후 그녀가 자신의 이름 석 자를 본격적으로 할리우드에 알린 건 영화 '베터 럭 투모로우'(Better Luck Tomorrow, 2001)를 통해서다. 선댄스 영화제 초청작이며 개봉 첫 주 최다관객 동원으로 스포트라이트를 받은 이 영화의 미술총감독을 맡은 그녀는 '1만불짜리 세트를 10만불짜리로 돋보이게 하는 마이더스의 손'이라는 찬사를 들으며 할리우드에 화려하게 입성한다. 그리고 2001년엔 2000만 달러가 투입된 영화 '맨 프롬 엘리시안 필즈'(The Man from Elysian Fields)에서 어시스턴트 아트디렉터를 맡아 앤디 가르시아, 믹 재거 등 할리우드 스타들과 작업했고 2003년엔 알리시아 실버스톤과 우디 해럴슨 주연의 '스코츠드(Scorched)'에서 아트디렉터을 맡았지만 촬영 중 복잡한 내부사정으로 인해 우여곡절 끝 중도하차했다.

"그러면서 슬럼프가 찾아왔어요. 그때 마침 한국에서 영화 미술감독 제안이 들어와 한국으로 돌아갈까도 생각했지만 거기서 포기할 수 없어 눈물을 머금고(웃음) 미국에 남았죠."

#할리우드가 사랑한 미술감독

심기일전한 그녀는 이후 영화는 물론 각종 TV 쇼 미술감독으로 이름을 날렸다. 2002년 파라마운트사가 제작한 TV리얼리티쇼 '제이미 케네디 실험'(JKX)을 비롯해 2007년 케이블채널 코미디센트럴에서 방영된 '하프웨이 홈'(Halfway Home), 영화 '익스포즈드'(Exposed,2003) '웨이스트 딥'(Waist Deep,2006), 라스트 나이트(Last Knight,2012) 등 수 십여 편의 방송과 영화에서 프로덕션 디자이너 및 아트디렉터로 종횡무진했다. 또 제8회 전주주국제영화제에서 최우수 작품상을 받은 한미합작 영화 '허스'(HERs,2007)의 미술감독으로 참여하는 등 한국 영화계와도 교류도 꾸준히 이어갔다. 덕분에 그녀는 2006년 KBS '지구촌 한국인 젊은 그대'에 소개되며 한국 청년들의 워너비가 됐고 2010년엔 베스트셀러 '꿈보다 먼저 뛰고 도전 앞에 당당하라'를 출간하기도 했다. 그리고 그 무렵 IT업계 종사자인 한인 2세와 결혼해 슬하에 세 살배기 딸을 둔 그녀는 출산 후 육아를 위해 제작 일선에서 잠시 떨어져 지내기도 했다. 대신 그동안 해보고 싶었던 다른 일들에 도전했다. 2012년 LA한류체험관 디자인 및 인테리어를 진두지휘했고 2013년부터 올해까지 뉴욕필름아카데미(NYFA)에 출강하기도 했다. 또 한국 드라마 로비스트(2007), 상속자들(2013)의 미국촬영 분 미술감독을 맡기도 했다. 현재 그녀는 디자인회사 '본때'(productiondesigner.tv)를 운영하며 영화, 방송, 광고의 미술 디자인 및 상업 및 주택 인테리어 사업도 병행하고 있다.

"아직 구체화 되진 않았지만 조만간 영화와 방송계에서 지금껏 시도하지 않은 실험적인 작업들을 해보려 열심히 구상 중입니다."

지금껏 달려온 것만으로 숨 가쁠 터인데 그녀는 여전히 새 길을 찾느라 여념이 없다. 있던 꿈도 슬며시 접을 나이에, 그렇다한들 하나 이상할 것 없는 지금, 다시 길 떠날 채비라니. 의아해 하는 눈빛에 그녀는 지금껏 쌓은 경험이 가장 큰 자산인데 이 보다 더 좋은 타이밍은 없다며 특유의 호탕한 웃음을 짓는다. 순간 그녀의 커다란 눈망울 위로 반짝이는 햇살 한줄기 내려앉는다. 길 떠나기 딱 좋은 날이다.


이주현 객원기자 joohyunyi30@gma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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