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물 오디세이] 글로벌원 써니 채 대표…화려하거나 혹은 눈물겹거나
13세 때 유타 이민
고교생 모델로 인기
86년 모델에이전시 오픈
양성교육 클래스로 대박
한미 오가며 사업 키워
올해 비영리재단 설립
노숙자 돕기 사역 열심
빛바랜 컬러 사진 속엔 동양인치고 유달리 팔다리가 긴, 모델 포스 짱짱한 아가씨가 서 있다. 40년 전 그녀다. 그리고 바로 오늘의 글로벌원(globaloneltd.com) 써니 채(59) 대표이기도 하다. 눈물 나게 반짝이는 청춘이 그곳에서 무심한 듯 시크하게 40년이란 세월을 건너 웃고 있었다. 어쩐지 영화 속 한 장면 같은 묘한 비현실감 마저 느껴졌다. 흥미진진한 판타지와 냉정한 현실의 경계를 넘나들며 영화보다 더 화려하게 그러나 그 굽이굽이 역경과 사연도 많았던 그녀의 아주 특별한 인생 이야기를 들어봤다.
#당찬 소녀, 모델이 되다
서울이 고향인 그녀는 1973년 유타주 솔트레이크 시티로 이민 왔다. 당시 그녀 나이 열세 살. 혈혈단신 오른 미국행이었다.
"제가 사춘기에 들어서면서 새어머니와 갈등이 심해지고 골목대장 노릇 하면서 말썽만 부리니까 당시 육군 장성이던 아버지가 잘 알고 지내던 유타에 사는 미군 장교 댁으로 절 보내셨죠. 저 역시 어릴 때부터 미국에 오고 싶기도 했고요."
어린 나이에 쉽지 않은 이민살이였겠다 싶었는데 웬걸, 이런 걱정을 무색하게 만들 만큼 그녀는 참 씩씩하게 살았다. 오자마자 패스트푸드 체인 점원을 시작으로 8학년 때는 자전거를 타고 집집마다 돌아다니며 화장품 방문판매원을 하며 용돈을 벌어 썼단다. 그러다 레스토랑 웨이트리스로 일하던 11학년 때 식당을 찾은 한 고객이 백화점 모델을 해 볼 생각이 없냐는 제안을 해왔다. 요즘으로 치면 길거리 캐스팅인 셈이다.
"당시 노스트롬 백화점 본사가 유타에 있었어요. 그래서 매 시즌 카탈로그 촬영을 하는데 동양인 모델이 필요하다며 저에게 캐스팅 제안을 해왔죠."
첫 촬영에서 그녀가 받은 보수는 600달러. 당시 그녀가 식당에서 한 달간 버는 돈의 두 배가 넘는 액수였다. 이후 유타대학교 영문과에 진학한 그녀는 본격적으로 각종 로컬 지면광고 및 TV 광고 모델을 하며 유타주 스타로 떠올랐다.
#모델 에이전시로 대박
대학 4학년 때 그녀는 유명 모델 에이전시에서 캐스팅디렉터 어시스턴트로 인턴십을 하면서 에이전시 사업 전반에 대해 익히게 된다. 그러면서 모델 양성교육 사업에 전망을 발견하고 전국을 돌며 모델교육 세미나를 시작했다. 1년여 간의 세미나 사업은 성공적이었고 이런 경험을 바탕으로 졸업하던 해인 1986년 본격적으로 모델 에이전시 사업에 뛰어들어 솔트레이크 시티에 '써니 채 인터내셔널' 간판을 내걸었다. 그녀의 명성을 듣고 모델들이 몰려들었고 에이전시는 금세 150여명의 소속 모델을 거느리게 됐다. 그러나 모델 매니지먼트보다 그녀를 더 유명하게 만든 것은 모델 수업. 처음엔 모델 지망생들이 수업을 들었지만 시간이 가면서 입소문을 타고 상류층 자제들이 몰려들기 시작했다.
"모델 교육이라는 게 걸음걸이부터 생활매너, 에티켓 같은 걸 가르쳐서 그런지 부잣집 사모님들이 앞 다퉈 딸들을 보내기 시작했죠. 나중엔 유타뿐 아니라 아이다호, 와이오밍, 덴버에서까지 학생들이 밀려와 감당이 안 돼 수업료를 1인당 3000달러까지 올렸는데도 줄질 않았으니까요. 덕분에 떼돈을 벌었죠.(웃음)"
큰돈을 번 그녀는 솔트레이크 시티 다운타운 소재 4000스퀘어피트 규모의 유서 깊은 랜드마크로 사무실을 이전했고 오프닝 당시 주지사가 와 축사를 해줄 만큼 그녀는 지역사회에서영향력 있는 사업가로 발돋움 했다.
"호시절이어죠. 당시 촬영장에 엑스트라 1000명을 보내면 그날 오후 더플백에 10만달러 현금을 담아주던 시절이었으니까요."
이후 그녀는 한국과도 활발하게 사업적 교류를 가졌다. 1989년 개장을 앞둔 실내 테마파크 롯데월드에 마술사 및 전문 공연단원을 파견하면서 한국과 인연을 맺은 그녀는 1996년 마이클 잭슨의 첫 내한공연 당시 한국과 미국 대행사간 다리 역할을 하면서 업계에 주목을 받았다. 그리고 90년대 후반 한국에서 큰 화제를 모았던 브룩 쉴즈, 브래드 피트, 피어스 브로스넌 등 할리우드 스타들의 광고모델 계약도 그녀의 손끝을 거쳤다.
#노숙자 사역, 꿈을 품다
사업은 승승장구해 그녀는 1998년 시애틀을 필두로 댈러스, 휴스턴, 조지아 등에 연달아 지사를 설립했다. 그러나 2001년 9·11테러 이후 광고시장이 급속도로 냉각되면서 그녀의 사업도 적잖은 타격을 받았다. 그래서 그녀는 전국 지사를 모두 닫고 본사를 LA로 이전하면서 회사명도 '글로벌 원'으로 교체했다. 몇 년 뒤 사업은 안정을 되찾았지만 2008년 그녀는 이혼의 아픔을 겪는다. 마흔 넘어 한 10여 년간의 결혼생활을 정리한 것이다.
"정신적으로 많이 힘들었죠. 그래도 그때 신앙을 가지면서 이겨 낼 수 있었습니다."
현재 한인교회에서 신앙생활을 하고 있는 그녀는 지난 10년간 한국어를 제대로 배운 것이 가장 큰 수확이라 말한다.
"설교 이해는 물론 교인들과도 소통해야 하니까 한국어 공부가 절실했죠. 그래서 매일 아침 한국어 신문을 처음부터 끝까지 다 읽었어요. 이젠 한국 아줌마 다 됐죠.(웃음)"
현재 LA다운타운에 본사를 둔 글로벌원은 10대부터 70대까지 모델 및 배우 500여명을 거느린 토털 매니지먼트 업체로 자리매김했으며 시애틀, 휴스턴, 조지아 지사도 다시 오픈했다. 그러나 요즘 사업보다 그녀가 더 마음을 쏟고 있는 것은 바로 노숙자 사역.
"지난해 평소 아무 생각 없이 지나쳤던 노숙자들을 보면서 마음에 소망이 생기더라고요. 그래서 이들을 집으로 데려다 씻기고 입혀 이야기도 나누고 자립할 수 있게 일자리를 찾아 주기 시작했죠."
그러나 개인적 도움만으로는 갈수록 늘어나는 LA 노숙자들을 감당할 수 없다는 생각에 그녀는 올해 비영리재단 '리조이스 인 호프'(rejoiceinhope.org)를 설립하고 본격적으로 노숙자 돕기에 팔 걷어붙이고 나섰다. 그녀의 꿈은 노숙자들이 함께 모여 살며 자급자족할 수 있는 캠핑장을 짓는 것. 그래서 그녀는 주정부에 이에 관한 계획서를 제출했고 관련 부서에서도 긍정적으로 검토 중이라고 한다.
"요즘 그 어느 때보다 살맛나요. 한 사람을 살리는 일에 작은 힘이나마 보탬이 된다고 생각하니 매일 매일이 행복하고 감사할 따름이죠."
허튼 말이 아니었다. 일견 이 평범한 말이 특별하게 와 닿았던 건 그저 말뿐이 아닌 그녀의 현재 삶이 그 행복을 온 몸으로 보여주고 있었기 때문이다. 진심만큼 힘이 센 감동은 없는 법이니까.
이주현 객원기자 joohyunyi30@gma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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