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물 오디세이] 캘스테이트 풀러턴 연극학과 김현숙 교수, 무대의상에 영혼을 불어넣다
대학시절 연극반서 활동미국 유학…무대의상 전공
95년 뮤지컬 명성황후로
한국 넘어 해외까지 주목
05년 미국대학 교수 임용
지난해 CSUF로 자리 옮겨
미국서도 작품 활동 왕성
"영화 의상도 도전하고파"
그녀의 무대의상보다 더 마음을 빼앗긴 건 그녀의 디자인 스케치였다. 실크와 시폰, 레이스 소재에 잔잔한 플라워 프린트가 돋보이는 19세기말 로맨틱 드레스(연극 '사랑의 헛수고')부터 1920년대 파리 물랭루즈 무대를 연상시키는 과감한 블랙드레스에 초크 목걸이, 망사스타킹(뮤지컬 '와일드 파티')까지 그녀의 스케치엔 어쩐지 20세기 초 영미 문학작품 냄새가 짙게 배어있다. 1995년 초연된 '명성황후' 무대의상 디자이너로 세계를 사로잡은 캘스테트 풀러튼 연극학과 김현숙 교수다. 그녀의 무대의상만큼이나 열정적인 삶을 살고 있는 그녀를 만나 봤다.
#연극에 빠지다
고대 신문방송학과 72학번인 그녀는 대학 2학년부터 졸업 때까지 연극반에서 활동했다.
"고교시절 미술가가 되고 싶었어요. 예술방면에 관심이 많았거든요. 그래서 대학에 들어가 비슷한 동아리를 찾다 연극반에 들어갔죠. 그러면서 작품을 분석해 무에서 유를 창조하는 작업인 연극의 매력에 빠지게 됐죠."
대학 졸업 후 국제복장학원에서 1년간 패션 공부를 마치고 1981년 일리노이주립대 시카고(UIC) 대학원에 진학, 무대의상 디자인을 공부했다.
"대학 졸업 후 전공을 살려 신문·방송사 입사를 생각하기도 했지만 오랜 꿈이었던 예술가가 되고 싶어 고민하다 연극과 패션을 둘 다 할 수 있는 무대의상을 공부해 보기로 했죠. 가족들과 주변에선 만류했지만 적어도 그 분야 최고가 되겠다는 생각으로 유학길에 올랐습니다."
2년 뒤 석사학위를 취득한 그녀는 다시 일리노이주립대 어바나샴페인(UIUC) 대학원에서 무대의상디자인에 있어선 최종 학위인 MFA(Master of Fine Arts) 과정을 시작한다. 당시 한인은 물론 동양인도 찾아보기 힘든 백인학생들 틈바구니에서 빡세기로 유명한 커리큘럼을 쫓아가느라 고생이 이만저만이 아니었다고. 그러나 이런 그녀의 '엄살'과 달리 실상은 미대를 졸업한 동기생들보다도 월등한 드로잉 및 디자인 실력을 인정받아 장학금을 받으며 학교를 다닐 만큼 일찌감치 두각을 나타냈다.
#뮤지컬 명성황후의 탄생
MFA 학위취득 후 1986년 귀국한 그녀는 한양대, 중앙대, 서울여대, 한예종 등의 의상학과와 연극과에서 강의를 시작했다. 또 한국 1세대 유학파 무대의상 디자이너라는 스포트라이트를 한 몸에 받으며 1985년 국립극장에 오른 '내일 그리고 또 내일'을 필두로 '한여름 밤의 꿈', '구렁이 신랑과 그의 신부' '우리들의 사랑' 등 내로라하는 유명 작품들의 무대의상 디자이너로 참여하면서 한국 공연계의 주목을 받기 시작했다. 그렇게 대학 강단으로, 무대로, 어린 두 딸을 키우는 엄마로 종횡무진하며 10년의 세월이 흘러갔다. 그리고 얼마 뒤 그녀는 뮤지컬 '명성황후'와 운명적인 조우를 한다. 1995년 서울 예술의전당에서 초연된 이래 20년 넘는 세월동안 장장 1000회가 넘는 공연에 관객 수만도 160만이 넘게 든, 지금까지도 국민 뮤지컬이라 불리 우는 '명성왕후'의 무대의상이 그녀의 손끝에서 탄생한 것이다. 리서치부터 스케치, 제작까지 꼬박 1년이 걸렸고 무대에 오르는 의상만 총 600벌. 여기에 버선, 속적삼, 속치마 등 속옷까지 합치면 1000여점이 넘는 당시로선 보기 드문 대형 프로젝트였다.
"공연의상은 박물관 의상은 아니에요. 시대 고증을 바탕으로 하지만 작품에 맞게 스타일이 재창조되죠. 그래서 명성황후 의상엔 색상이 선명하고 질감이 풍부한 벨벳이나 오간자, 자카드, 레이스 등과 같은 서양 직물들도 사용됐고 디자인도 선과 형태를 과장시켜 무대를 더 풍부하고 장엄하게 만들었죠."
이렇게 탄생한 명성황후의 웅장하면서도 아름다운 무대의상은 이후 미국과 영국, 캐나다 공연 당시 관객들을 매혹시켰고 현지 언론들의 찬사도 쏟아졌다. 이처럼 대중과 평단의 호평이 이어지면서 그녀는 1996년 한국 뮤지컬 대상 시상식에서 '명성황후'로, 이듬해 백상예술상에선 '구렁이 신랑과 그의 신부'로, 1999년 동아연극상에서 '유랑의 노래'로 무대의상 상을 수상했다. 이후 그녀는 오페란 카르멘(한국오페라단·1998), '코리아 환타지'(국립극단·2000), '춤 춘향'(국립무용단·2001), 지하철 1호선(학전·2001) 등 한국 공연계에 한 획을 그은 다수의 작품들에 참여하면서 명실상부 대한민국을 대표하는 무대의상 디자이너로 자리매김했다.
#미국대학 교수로 인생 2막
이처럼 잘 나가던 그녀가 2005년 돌연 미국행을 선택한다. 인디애나 볼스테이트 대학(BSU) 연극학과 부교수로 임용된 것이다.
"그 무렵 큰 딸이 사법고시에 합격, 판사로 임용돼 엄마로서 한시름 놓으면서 세계를 무대로 무대의상 디자인도 하고 후학도 양성해 보자 싶어 미국 대학에 지원해 왔죠."
그리고 어느새 강산이 한번 바뀌고도 2년이란 시간이 더 흘렀다. 나이 쉰 넘어 시작한 인생 2막 길이 결코 녹록지 않았을 터지만 지난 시간 그녀는 강단에서 즐겁고 행복했다고 말한다.
"학생들 가르치는 게 참 보람 있어요, 학생들이 잘 되면 본인보다 더 기쁘고 바로 그 즐거움에 힘든 것도 잊을 정도니까 가르치는 게 천직이지 싶어요.(웃음)"
또 그녀는 학생들의 무대의상 디자인을 감독한 것을 포함, 뉴욕 팬아시아 레퍼토리 시어터, 캐피털 레퍼토리 시어터 공연 등 지금껏 총 40여 편의 작품 속 무대의상을 맡아 현역 디자이너로도 왕성하게 활동하고 있다. 또 내년 5월 샌프란시스코에서 개막되는 셰익스피어 페스티벌에서 '한 여름 밤의 꿈' 무대의상도 맡아 준비 중이다. 이처럼 숨 가쁘게 달려온 그녀가 지난해 캘스테이트 풀러튼 연극학과 교수로 임용돼 캘리포니아로 왔다.
"너무 좋죠.(웃음) 둘째 딸이 이곳에 살기도 하고 무엇보다 다양성이 존중되는 환경이어서 꼭 이곳 대학에 와 가르치고 싶었어요."
이처럼 쉼 없이 달려온 그녀이지만 새로운 무대에 대한 갈증은 여전했다.
"영화를 너무 좋아해요. 그래서 기회가 된다면 한국이든 미국이든 영화 의상에 꼭 한번 도전해 보고 싶습니다. 언젠가 할리우드 한인들과도 작업해보고 싶기도 하고요."
인터뷰 내내 큰 감정 표현이 없던 그녀가 순간 소녀처럼 들떠보였다. 그 미세한 설렘과 떨림이 맞은편 자리까지 와 닿는다. 그 희망사항 속 뜨거운 진심과 열정이 눈에 보이지 않는 행간을 가득 메웠다. 바로 그녀처럼.
이주현 객원기자 [email protecte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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