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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차파 한인촌과 도산의 삶] "판잣집 마루는 쪼개져도 고칠 엄두도 못내"

도산 공화국 <11>

1910년 센서스엔 24가구 100명 거주
코트 살 돈 없어 밤새 손으로 만들기도
이주해온 이유는 대부분 직장 구하려


#파차파 캠프의 한인들

한인 역사 저술가 이선주는 "1910년 인구 조사에 따르면, 리버사이드에 살고 있던 한인 수는 65~70명가량이었다. 그러나 실제 숫자는 2배가 넘을 만큼 더 많았다"고 밝히고 있다. 필자가 1910년 미국 인구 센서스 통계에서 1532 파차파 애비뉴(Pachappa Ave)를 찾아본 결과 근처에 살고 있던 한인들은 총 24가구로 100여 명의 한인들이 거주하고 있었다.

따라서 파차파 캠프의 한인 인구의 규모는 지금까지 알려진 50~60명보다 거의 두 배 이상 큰 규모일 가능성이 매우 높다. 다만 11명이 거주하고 있는 하마히 멘킨 가족은 한국인으로 구분되어 있으나 한국인 이름이 아니어서 확인이 필요하다.

이 가족을 포함하면 총 106명이며 그렇지 않으면 95명의 한인들이 거주하고 있는 것으로 확인이 됐다. 1920년 인구 조사 통계에서는 한인의 숫자가 9가구 총 40명으로 줄어들었다. 역시 하마히 멘킨 가족이 거주하고 있어 그들의 숫자까지 포함한다면 51명이다. 그러나 인구조사 통계에서 빠진 한인들도 있을 수 있어 그 규모는 조금 더 컸던 것으로 추측된다.

또한 리버사이드 한인 장로 선교회의 한인 명단과 리버사이드 시 거주자 명단 그리고 '신한민보'에 나오는 명단을 합치면 약 165명의 한인 이름을 찾을 수 있었다. 물론 이들이 같은 기간에 리버사이드 파차파 캠프에 거주한 것은 아니다. 다만 1910년 미국 인구 조사 명단에만 100여 명의 한인이 있는 것으로 볼 때 이들이 한 곳에 거주하면서 한인타운을 형성했다는 것은 확실하며 그 규모는 더 커질 가능성이 있다는 것을 밝히는 바이다.

특히 오렌지 수확 시기인 크리스마스 직전부터 약 10주 동안은 타 지역에서 한인 노동자들이 리버사이드 오렌지 농장으로 일자리 찾아온 시기였기 때문에 한인 인구가 급증했다.

리버사이드 한인 장로 선교회 명단에는 이름이 나타나지 않은 파차파 캠프 한인들의 경우에는 다른 기록을 통해 그 모습을 볼 수 있다. 백신구는 1906년 하와이에서 리버사이드로 이주하여 정착했는데 그의 딸 백광선(Mary Paik Lee)은 자서전 '조용한 방랑여행 : 미국의 한국인 여성 개척자' (Quiet Odyssey : A Pioneer Korean Woman in America, 1990)에서 리버사이드에 거주했던 백신구의 모습을 남기고 있다. 이 책에 의하면 백신구의 아내 손광도는 파차파 캠프 내에 거주하고 있던 30여 명 총각들의 하루 세 끼를 책임졌다고 한다. 백광선은 다음과 같이 리버사이드 파차파 캠프의 열악했던 판자촌 생활을 설명하고 있다.

"우리는 1880년대에 목조로 지어진 작은 방 한 칸에 거주했다. 시간이 흐르면서 나무가 수축되어 벽에 금이 가기 시작했고 그 사이로 바람이 새어 들어왔다. 4개의 벽, 창문 1개, 그리고 문 하나가 전부였다. 금이 간 벽은 진흙을 발라 바람을 막았다. 펌프로 물을 끌어 올렸는데 한 개의 펌프를 여러 가족이 함께 사용했다. 밖에서 불을 피워 물을 데운 후 집안으로 옮겨 겨우 목욕을 할 수 있었다. 가스나 전기도 없었다."

백광선은 또한 자신의 이웃에는 도산 안창호 부인과 필립이 살고 있었다고 전했다. 필립 안은 나중에 영화배우가 되어 아시안 아메리칸 최초로 할리우드 명예의 거리에 이름을 남겼다. 도산 안창호와 그녀의 아버지 백신구는 한국에서부터 알고 지냈던 사이인데 리버사이드에서 다시 이웃으로 살게 되어 기뻤다고 했다. 그녀는 또한 리버사이드에서의 생활은 매우 가난했지만 기쁜 순간도 있었다고 기억했다.

"나는 아버지에게 학교에 입고 갈 코트가 필요하다고 말했는데 아버지는 '내가 방법을 찾아볼게'라고 대답해 주었다. 아버지는 자전거를 타고 시내에 가서 필요한 것을 사서 코트를 만들어 주었다. 당시에는 재봉틀이 없었기 때문에 아버지는 저녁 내내 손수 코트를 만들어 준 것이다. 아름다운 빨간 코트였는데 그 옷을 입는 것이 행복했다. 학교에 가니 다른 아이들이 예쁜 코트를 어디서 샀는지 물어 보았다. 아버지가 손으로 만들어 주었다고 하자 모두 믿지 못하는 표정을 지었다."

또한 전낙준의 아들 전경무는 출판되지 않은 자서전을 남겼다. 그것을 읽고 사촌인 엘렌 전이 'Personal Note' 즉 개인 메모를 남겼고 거기에서 리버사이드에 관해 언급하고 있다.

"판잣집의 마루는 여기저기 균열이 있었고 쪼개진 곳도 있었는데 돈이 없어 고칠 엄두도 내지 못했다. 어머니는 돗자리라도 짜서 마루에 덮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했지만 시간이 없어 방치해야 했다. 이럴 때 경부와 경무의 어머니가 함께 있다면 돗자리를 함께 짤 수 있겠다고 생각했지만 곧 잊어버렸다."

이선주도 전경무의 기록을 다음과 같이 소개하고 있다.

"한인 커뮤니티는 두 줄의 철로 부근에 있었고 모두 스무 채 가량의 빨간 주택들로 이루어져 있었다. 최근에 도착한 약 200명의 한인들이 그곳에 살고 있었고 그 가운데는 가정을 이룬 열 가족도 포함되어 있었다."

경부와 경무의 아버지 전낙준과 어머니는 하와이에 거주하고 있었다.

"집이 좁고 침대가 모자라서 한방에서 4명이 마루바닥에서 자야 했다."

전낙준과 전낙청은 형제인데 전낙청은 '부도'라는 소설을 남겼다. 전낙청 가족은 1907년에 부인과 조카인 경무.경부와 함께 하와이에서 샌프란시스코를 거쳐 리버사이드에 정착했다. 조카들의 교육을 위해 본토로 이주한 것이다. 전낙청 가족처럼 여러 가족이 하와이에서 리버사이드로 이주했는데 그 이유는 자녀 교육을 위해서이고 보다 나은 직장을 얻기 위해서이다. 전낙청은 근처의 농장에서 월급을 받는 직장을 얻어 리버사이드 서쪽으로 이주를 했다. 월급을 받는 직장은 당시 한인 노동자들에게는 선망의 직업이었다. 그러나 1913년 한파로 인해 전낙청을 고용했던 농장주는 농사를 포기했고 전낙청은 타 지역에서 임시 노동을 하다가 1914년 다시 리버사이드로 이주했다.

차의석은 겨울 오렌지 농장 시즌인 크리스마스 직전부터 봄까지 약 10주 정도 리버사이드로 와서 농장 일을 했다고 자신의 자서전 '금산'에서 밝히고 있다. 또한 자신의 사촌과 그의 부인도 하와이에서 리버사이드로 이주했는데 공교롭게도 샌프란시스코에 도착한 직후 1906년에 대지진이 발생했다고 한다. 그 때문에 걱정을 많이 했는데 다행히 드류 박사의 도움을 얻어 리버사이드로 무사히 이주했다고 했다.

"사촌과 부인은 다행히 리버사이드에서의 생활에 만족했는데 특히 기후, 일, 그리고 생활 환경 등을 좋아했다."

리버사이드가 미국에서 가장 큰 최초의 한인타운이 된 것은 결코 우연이 아닌 듯하다. 차의석의 사촌 차정석은 파차파 캠프에서 공립협회 리버사이드 지방회 회장을 역임했다.

특히 1909년부터 1913년까지 차정석은 줄곧 리버사이드 지방회 회장을 역임하여 중요한 역할을 담당했다. 초기에는 리버사이드 파차파 캠프와 레드랜즈 지방을 오가며 활동했던 흔적이 보인다. 리운경도 초기에는 레드랜즈에 거주하다가 나중에 리버사이드로 이주했으며 레드랜즈 화재 소식에 리버사이드 지방회 한인들이 적극적으로 모금 활동을 전개하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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