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차파 한인촌과 도산의 삶] 일본인으로 오해받아 한인노동자 추방되기도
도산 공화국(8)
국무부 "한인은 일본 식민 국민 아님"
일본 간섭없이 독립운동하게 된 계기
대한인국민회 위상 높인 역사적 사건
대한인국민회 북미총회
도산 안창호가 1907년부터 한국에서 독립운동에 전념하는 동안 미주 지역의 대한인국민회 활동은 지도자 부재로 상대적으로 위축된 상태였다.
1911년 9월 도산 안창호가 뉴욕에 도착한 후 샌프란시스코와 LA를 거쳐 가족이 있는 리버사이드로 돌아온 후 대한인국민회는 다시 활발한 활동을 전개하게 된다. 1911년 11월 22일자 신한민보는 대한인국민회 북미총회가 특별히 리버사이드에서 개최된다고 보도하고 있다.
1911년 12월 11일자 신한민보는 총회 소식을 비교적 자세히 보도했는데 "대한인국민회 북미총회가 열려 11월 22일에 북미 9개 지방 대의원이 리버사이드에 모였다. 11월 23일 오후 2시에 정식 개회식을 행하고 십여 일 연구 토론하여 21개 안을 결정하였다. 12월 4일 오전 3시에 폐회했다"고 보도했다.
또한 "황사용씨는 21조 안건을 승인하고 하변에서 수일 체류하다가 며칠 전 8일 상항으로 왔다더라. 북미주 중앙 총회장 최정익씨도 참석했으며 각 지방 회장이 모두 다 참석하여 몇 해만에 처음 보는 성황이다더라. 그러나 멕시코 메리다 지방 회장은 거리가 멀어 불참했다"고 하였다.
여기서 주목되는 대목은 각 지방 회장 모두가 참석했고 리버사이드에서 거의 2주일간 체류하면서 각종 안건을 토론하고 결정했다는 점이다. 이것은 도산 안창호가 한국에서 리버사이드로 다시 돌아온 후 대한인국민회 활동이 활기를 띠면서 안정을 찾기 시작한 것을 의미하며 당시 리버사이드 한인타운이 도산의 미주 독립운동의 중심에 서 있었다는 것을 증명한다고 볼 수 있다. 대한인국민회 북미총회가 개최되었을 때 찍은 것으로 추정되는 사진이 남아 있는데 김형찬은 "1911년에 둘째 아들 필선이 태어나기 전에 찍은 사진으로 대한인국민회 지방회 설립 때 찍은 것으로 추정된다"고 밝히고 있다.
그러나 리버사이드 지방회는 대한인국민회 창설 때부터 설립되었으므로 이것은 1911년 11월에 지방회 회장 전원이 참석한 대한인국민회 북미총회가 열린 것을 기념하는 사진이 분명하다.
전낙청의 딸 엘렌 전은 "안창호는 대한인국민회 활성화를 위해 회원들에게 단합하여 독립운동에 전념할 것을 연설했다"고 전해주고 있다.
"안창호는 '일본이 모든 것을 막아 버렸습니다. 모든 것을 말입니다! 우리는 너무 슬픕니다. 일본은 우리보다 힘이 셉니다. 우리는 모든 것을 빼앗겼습니다. 우리는 울었고 집에 돌아오면서 울분을 터뜨렸습니다. 그러나 이제 우는 것은 끝났습니다. 이제부터 시작입니다. 해외에 살고 있는 우리가 시작할 때가 온 것입니다. 우리는 대한 독립을 위해 노력할 것입니다!'라고 연설했다."
엘렌 전은 다음과 같은 이야기도 전해주었다.
"안창호는 전낙준의 아들인 전경부와 전경무에게 '자네들은 나라 일을 할 것인가?'라고 물었고 그들은 고개를 끄덕이며 '그렇다'고 대답했다. 그러자 안창호는 '너희들은 공부를 끝내고 돌아와서 사람을 위해 일해라. 독립을 위해 싸워라'라고 말했다. 안창호는 일어나서 무엇인가를 경부에게 건넸는데 그것은 비단 스카프였다. 안창호가 그것을 펼치자 태극기가 모습을 드러냈다. 안창호는 '나는 여기저기 돌아다녀야 하니 네가 잘 보관해라. 네가 대한 독립 후 조국에 돌아가면 다시 제자리에 놓아 두어라'라고 말했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안창호가 미국에 도착한 후 대한인국민회 재정비 작업을 하면서 대한인국민회 북미총회를 리버사이드 파차파 캠프에서 개최했다는 점이다. 신한민보는 "대한인국민회 북미총회에 9개 지방회 회장이 모두 참석했다"고 보도했는데 그 점은 의미가 크다고 생각된다. 그러다 도산 안창호가 다시 미국에 도착하면서 리버사이드 파차파 캠프를 중심으로 대한인국민회 조직이 재정비되었고 따라서 활발한 활동을 다시 할 수 있게 된 것이다. 더욱 놀라운 사실은 "대한인국민회 북미총회는 1911년 11월 23일부터 12월 4일까지 10여 일 동안 회의를 하며 지방 회장들이 계속 리버사이드에 체류했다"는 신한민보의 보도다. 그 당시 대한인국민회 북미총회 임시의장은 김순학으로, 한인 장로 선교회 목사 역할도 한 인물이다. 이처럼 리버사이드 파차파 캠프는 초기 미주 한인 독립운동을 주도한 역사적인 지역이었다는 새로운 사실이 발굴된 것이다.
헤밋 밸리 사건과 대한인국민회
1913년에 리버사이드 카운티에 속한 헤밋이라는 조그만 마을에서 한인들이 쫓겨나는 일이 발생했다. 리버사이드에 거주하던 한인 11명이 헤밋의 살구 농장으로 일하러 갔는데 그들을 일본인으로 오해한 백인 폭도들이 그들을 쫓아낸 것이다. 이 사건을 여러 주류 신문에서 보도 했는데, 그 내용이 상당 부분 달라서 구체적인 상황을 정확하게 알 수 없었다. 당시 이 사건에 대해 영문 신문들은 11명, 15명, 20명 또는 30명의 한인 노동자들이 헤밋 밸리에 기차로 도착한 직후 백인 폭도들에 의해 추방되었다고 보도해서 정확한 인원을 파악할 수 없었다. 신한민보는 1913년 7월 4일자 신문에서 "한인 삼십여 명이 살구 따러 갔다가 축출당하였다"고 보도했다. 그런데 같은 날 다른 기사에서 신한민보는 "살구 따러 갔던 리버사이드 동포들이 축출당한 일은 정확한 보도에 근거하니 30여 인이 아니라 11인이었다. 비록 일을 못하고 돌아오기는 하였으나 최순성씨의 주선으로 왕복 여비를 다 받아왔다"고 다시 보도했다. 따라서 헤밋 밸리 사건은 리버사이드에 살던 한인 노동자 11명이 헤밋 밸리 살구 농장에 일하러 갔다가 백인 폭도들이 일본인으로 오해하는 바람에 발생한 사건임이 밝혀진 것이다. 그러나 헤밋 밸리 사건은 단순히 한인들이 일본인으로 오해받아 발생한 사건이 아니었다.
이 사건으로 미국과 일본의 외교 분쟁 조짐이 생겼고 대한인국민회가 일본 정부의 간섭을 적극적으로 차단하는 계기가 되었다. 그 결과 미국에 거주하는 한인들의 법적 지위가 확보되었는데 이것은 초기 미주 한인사에 있어서 매우 중요한 전환점이 된 사건이라 할 수 있다.
신한민보는 헤밋 사건의 전말을 자세히 보도했는데 이 사건을 빌미로 일본 정부는 미국 거주 한인들은 '일본 식민 국민'이라고 주장하면서 그들을 보호할 책임이 있다고 미국 정부에 공식 항의하였다. 그래서 이 사건은 미일 간 외교 분쟁 조짐을 보였다.
당시 미국의 국무장관이었던 윌리엄 제닝스 브라이언은 이 사건이 미국과 일본의 외교 분쟁으로 번지는 것을 우려하면서 사건의 진상 조사를 지시했다. 이때 대한인국민회 북미 총회장 이대위가 미국 국무장관 앞으로 "미주 한인들이 일본 식민 국민이 아니라는 것을 인정해 달라"고 요청하는 전보를 보냈다.
이에 국무장관 브라이언은 미국에 거주하는 한인들이 '일본 식민 국민이 아님'을 공표하였고 동시에 대한인국민회가 미국에 거주하는 한인들을 대표하는 기관임을 인정했다. 그 결과 미주한인들이 일본의 간섭을 받지 않고 계속 독립운동을 할 수 있는 근거가 마련되었고 이것은 미주 한인 독립 운동사에 있어 매우 중요한 역사적인 사건이다.
with the Korea JoongAng Daily
To write comments, please log in to one of the accounts.
Standards Board Policy (0/250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