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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량해전 준비 과정을 통해 보는 이순신의 참모습 (상)

1597년 정유재란의 해 음력 9월16일(양력 10월25일) 해남과 진도 사이의 좁은 물목 울돌목에서 벌어진 13척 대 133척의 압도적 열세의 조?일 대혈전은 여러가지 면에서 진기록을 남기며 조선 수군에 기사회생의 승리를 안겨 준 불가사의한 해전 드라마이다.

우선 이 해전의 배경이 1592년 4월13일 일본의 조선 침략으로 시작된 임진왜란이 5년이 넘게 이어지는 동안 한번도 패한 일 없이 압도적 우위를 유지하던 조선 수군의 삼도수군 통제사직이 선조 임금의 오판으로 이순신에서 원균으로 바뀌면서 칠천량 해전에서 전멸에 가까운 패전을 당하여 비롯된 결사 비상 응급 해전이라는 아주 특수한 의미를 담고 있다.

왜 ‘결사 비상 응급’인가? 믿음직스럽기만 하던 160여 척의 막강 판옥선단이 사라져 맨손으로 수백척 일본 수군을 맞아야 하니 죽을 각오 없이는 할 수가 없는 일이요, 지난 5년여 이순신 수군의 철벽방어로 막아냈던 일본군의 물자보급 생명선인 서해 북상 해로(남해를 지나 서해안을 따라 북상하여 한양과 평양에 군사와 물자를 공급하는 필수 해로)를 막지 못하여 나라가 위태롭게 되었으니 비상이며, 밀려오는 일본 수군을 막을 준비를 할 시간이 허용되지 않으니 응급인 것이다. 그러나 이와 같은 극한의 위기 상황속에서도 침착하고 단호하게 위기를 헤쳐나가는 충무공 이순신 장군의 참 모습은 우리에게 커다란 교훈이 되니 힘써 살펴 볼 일이다.

이제, 7월 16일 원균의 칠천량 참패로부터 9월 16일 이순신의 명량대첩까지 정확히 두달간의 이순신 행적을 따라가 보기로 한다.

1597년 정유년 7월 18일 새벽, 초계(합천)에 있는 권율 원수부에서 백의종군 중이던 이순신은 노량으로부터 달려 온 이덕필과 변홍달(이순신의 외가쪽 사람)로부터 이틀 전 16일 새벽의 칠천량 참패와 옛 전우 통제사 원균, 우수사 이억기, 충청수사 최호의 전사 비보를 듣고 통곡한다.

곧이어 도원수가 찾아와 대책을 구했으나 정확한 상황을 몸소 확인하지 못한 이순신이 자기가 직접 해안가를 답사하여 상황을 확인한 뒤 대책을 정하는 것이 좋겠다는 의견을 말하자 도원수 권율이 쾌히 동의했다. 이순신은 그날 오후 지체없이 9명의 수행 군관을 거느리고 길을 따난다.

여기서의 이순신의 교훈은, 5년 동안 온갖 어려움을 이기고 목숨 걸고 남해를 굳건히 지켰건만 선조 임금은 자기를 파면하고 고문까지 한 후 백의종군이라는 불명예 처벌을 내려 원망스러울 수 있었으나 지체없이 어려운 과제를 자원하여 맡아 백성의 안위를 우선으로 한 점. 즉 <본질 추구의 정신> 과 <신속 위기 관리의 자세> 이다.

그리고 오직 나라만을 위해서 노심초사하시는 이순신을 신령님도 가련하게 여겨 돌보는 탓인지 난중일기 곳곳에 신의 계시를 받는 듯한 꿈이야기가 신통하게 맞아 들어가는 것을 볼 수 있다.

8월 2일의 일기에는 ‘임금의 명령을 받을 징조가 있는 꿈’을 기록하였는데 신통하게도 다음날 8월 3일 진주 정개산 손경례의 집에서 선전관 양호로부터 통제사 재임명 교지를 받는다. 이날 오후 이순신은 길을 떠나 두치에서 섬진강을 건너 석주관을 거쳐 구례에 도착했는데 한나절 후 남원성 공격에 나선 일본 수군 주력부대인 시마즈 요시히로, 도도 다카도라와 고시니 유키나가 부대는 섬진강을 따라 남원으로 북상하였으니 한나절 차이로 길이 어긋나 마치 이순신이 하늘의 도움을 받는 듯한 모습이 연출됐다.

8월 9일의 일기에는 낙안 읍성 도착 장면을 기록하였는데 ‘사람들이 5리밖까지 나와 환영한다’하였고 오후에는 낙안을 떠나 10리쯤 왔는데 ‘늙은이들이 줄지어 늘어서서 다투어 술병을 비치는데 받지 않으면 울면서 강권한다.’고 촌민들의 감동적인 이순신 복귀 환영 장면을 기록하고 있다. 이는 이순신이 백성들이 하늘처럼 믿는 통제사이었음을 말하는 것으로 그 의미가 크다.

8월 15일 보성 열선루에서 어사 박천봉으로부터 선조의 수군 포기 권고를 받는다. 요지는 싸움배 판옥선이 다 없어진 마당에 수군유지가 불가능하니 해전을 포기하고 초계 권율 수하로 돌아가 육전에 참여 하라는 지시였다. 이에 대해 이순신은 그 유명한 상유십이 미신불사(尙有十二 微臣不死) ? 우리에게는 아직도 열두척의 배가 남아있고, 이 보잘것 없는 신하가 죽지 않은 이상 싸워 볼 희망이 있다는 단호한 결의로 오히려 임금을 위로 설득한다.

명량으로 덮쳐오는 200여 척의 적군 앞에 겨우 열두척의 판옥선을 가지고도 ‘아직도’ 열두척이나 남아 있으니- 라고 극단적 긍정의 표현을 쓴데서 포기를 거부하고 끝까지 본질을 추구하는 초인적 <이순신 긍정의 사고 방식> 을 보게 된다. 그리고는 8월 18일, 초계 원수부를 떠난지 꼭 한달 만에 고흥반도의 회령포에 도착해 바다를 대하게 된다. 여기에서 우리는 바다를 지킬 수군대장이 그 긴박한 상황에서 한달만에야 겨우 바닷가에 도달했다면 그동안의 그의 행적이 궁금해 질 수 밖에 없다.

조선의 대형 목선인 판옥선 한 척에 필요한 인원은 노를 젓는 격군 80명, 활을 쏘는 사부와 화포를 발사하는 화포장 등 약 50명을 합하여 130여 명이 필요했다. 그리고 물자로는 무기인 활과 화살, 화포와 화약과 군사를 먹이고 입힐 식량과 의복의 조달이 필수였다.

당시 해안 지역의 상황은 청천벽력같은 조선 수군의 완패 소식에 해안 백성들이 서둘러 내륙으로 피난을 갔기 때문에 무인지경이 되어 이순신이 구하는 수군 재건을 위한 인원 및 물자 수집이 불가능했다. 이런 이유로 이순신은 부득이 인가가 있는 내륙을 순방할 수 밖에 없었다. 이리하여 하동, 화개, 구례, 곡성, 옥과, 낙안, 보성, 장흥, 군영구미 등 내륙을 순방하고 회령포에 도착했던 것이다.

다음날인 19일 이순신은 경상우수사 배설로부터 그가 끌고 온 10척의 판옥선을 인수받는다. 배설은 원균의 후임으로 경상우수사가 되어 원균 지휘의 칠천량 해전에 참전하였으나 원래 겁쟁이인데다가 적세가 어마어마하고 원균의 전술이 미덥지 못하여 자기 수하 10척의 판옥선을 이끌고 전장을 이탈하여 한산도 통제영에 들려 쌓여 있던 군량과 물자를 불태워 창야전을 시행하고 서진해 왔던 것이다.

여기서 우리는 드라마 같은 생생한 역사의 아이러니를 보게 된다. 결과적으로 배설은 비록 절체절명의 전투 현장을 이탈하여 사형을 당할 군법을 어겼으나 한산도 청야전을 효과적으로 수행했고 이순신에게 명량해전의 판옥선 13척 중 10척을 제공하여 나라를 구하는 승리에 결정적 기여를 하였으니 역사의 흐름은 참으로 짖궂은 데가 있다고 할 것이다.

그러나 배설은 판옥선 인수인계 현장에도 병을 핑계대며 나타나지 않아 스스로 명을 재촉하였으니 타고난 운명은 어쩔 도리가 없다고나 할까?

그 후 배설은 고향 선산에 숨어 살다가 종전 다음 해인 1599년 3월 도원수 권율에게 체포 당해 서울로 압송되어 사형에 처해졌다. 그러나 오히려 이순신보다 3개월을 더 살았으니 끝내 아이러니의 주역임을 스스로 입증한 셈이다.

8월 20일 이진으로 진을 옮긴 이순신은 다음날 21일부터 23일까지 이곳에서 지병인 속병이 도져 토사곽란으로 인사불성에 이른다. 23일에는 다시 어란포로 이동하고 28일에는 장도로 옮겼다가 다음날 29일에는 진도 벽파진으로 다시 옮긴다. 그리고 달을 바꿔 9월 2일에는 배설이 끝내 도주하고 말았다는 보고를 받고 한탄한다.

(계속)

이내원/재미 이순신 교육운동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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