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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물 오디세이] ABC 상담대화교육원 여명미 대표 "받은 축복 나누는 삶 살고 싶다"

73년 UCI 의대 임상교수 거쳐
오렌지카운티 한인 개업의 2호
가정폭력 피해자들 돕기 목적
93년 '푸른 초장의 집' 설립

봉사 위해 의사직 58세 은퇴
ABC상담대화교육원 설립
"많은 분들의 도움 잊지 못해
나누며 살아야 진짜 행복한 삶"


호모 헌드레드(Homo-Hundred) 시대를 맞아 너나 할 것 없이 인생 2막의 중요성을 말한다. 그러나 먹고 살기 바쁜 인생 1막을 이리 뛰고 저리 뛰다 떠밀리듯 올라간 2막 무대 위 조명이 켜지는 순간 머릿속은 아득해지기만 하다. 왜 아니겠는가. 세상은 2막 배우들에게 청년처럼 살라고 부추기지만 대개의 경우 아무 준비 없이 얼떨결에 오른 2막 무대 위의 그 두려움은 겪어보지 않고선 알 수 없을 터. 그러나 그 어렵다는 인생 2막을 1막보다 더 멋지게 살아가는 이가 있다. 바로 ABC 상담대화교육원 여명미(74) 대표다. 50대 후반, 어찌 보면 조금 이른 나이에 의사 가운을 벗고 대화 전문가로 활발한 행보를 이어가는 그녀를 만나봤다.

#OC 한인 개업의 2호

6남매 중 장녀인 그녀는 경기여고를 거쳐 1961년 이화여대 의대에 입학했다. 졸업 후 서울대학병원에서 인턴 수련을 마치고 1968년 뉴욕주로 와 작은 시골마을 트로이의 종합병원에서 인턴생활을 시작했다. 그리고 이듬해 그녀는 정신의학과 전문의 여천기(77) 박사를 만나 결혼했고 시카고 종합병원으로 자리를 옮겨 임상해부병리학과에서 레지던트 생활을 시작했다.

1973년 가주 의사면허증을 취득한 그녀는 UC어바인 대학병원에서 임상강사로 재직하면서 다시 가정의학과 전문의 공부를 시작해 3년 뒤 자격증을 취득했다. 당시 세 살배기 막내아들까지 어린 삼남매를 키우면서 전문의 면허를 두 개나 딴 것이다.

"애들 셋 키우며 자격증 시험 준비하는 일이 만만치는 않았죠, 출근길에 애들 맡기고 퇴근해 다시 밤늦게까지 공부하고…그 시절 어떻게 시간이 지나갔는지도 모르겠네요.(웃음)"

1977년 샌타애나에서 개인병원을 오픈한 그녀는 오렌지카운티 한인 개업의 2호다. 이후 1985년 오렌지시티로 병원을 이전한 뒤 은퇴할 때까지 쭉 그곳에서 진료해 왔다.

#시련 넘어 대화·상담 전문가로

이처럼 평화로워 보이는 그녀의 일상에도 시련이 찾아왔다. 당시 그녀는 한국에 있던 가족을 모두 미국으로 초청했는데 1980년대 초반 온 가족이 나선 여행길에서 여동생이 자살하는 사건이 벌어진 것이다.

"우울증이 있었던 여동생이 극단적인 선택을 한 후 그 충격은 이루 말할 수가 없죠. 의사가 되서 여동생이 그렇게 될 때까지 뭘 했나 싶은 자괴감으로 정말 힘든 시간을 보냈죠."

순간 그녀의 눈시울이 붉어지더니 안경너머로 눈물이 떨어진다. 40년 가까운 시간이 흘렀지만 그녀에겐 여전히 어제 일처럼 생생한 아픔이리라.

"이후 신앙을 통해 시련을 극복하면서 주류사회의 각종 부부·가정 문제 관련 세미나 및 교육과정을 쫓아 다니며 배우기 시작했어요. 불행했던 부모님의 부부관계로 가족 모두가 행복하지 않았고 여동생의 우울증도 이런 가정환경과 무관하지 않았기 때문이었죠." 그러면서 그녀는 다니던 교회에서 가정문제 세미나를 진행하는 등 봉사활동을 시작했고 1990년부터는 OC가정법률상담소 부이사장직을 맡아 상담 및 교육을 진행했다.

그러다 그 무렵 부부싸움으로 인한 한인가정 내 총기사건이 잇따라 터지자 그녀는 가정폭력 피해자들을 위한 셸터의 필요성을 절감하고 이를 위해 3년간 백방으로 뛰어다닌 끝 1993년 오렌지시티에 '푸른 초장의 집'을 오픈해 10년간 초대 이사장을 지냈다.

또 1990년대 중반 OC검찰청의 의뢰로 한인 가정폭력 가해자 및 피해자를 대상으로 하는 부부 및 부모 대화교육 강사로도 3년간 활동했다.

"원래 가정폭력 사건이 접수되면 이런 교육을 이수하는 게 의무화 돼 있는데 OC 한인사회에는 한국어 교육이 없다보니 제게 의뢰가 들어 와 시작하게 됐죠. 그리고 그 교육을 통해 변화하고 회복되는 부부나 가족들을 보면서 가족 간 대화교육이 얼마나 중요한지 절감하게 됐습니다."

이후 그녀는 본격적으로 주류사회 각종 기관에서 운영하는 대화상담, 심리치료, 아동학대방지 등과 관련된 공부를 시작했다. 그리고 2000년 그간의 연구와 세미나 등을 묶어 '이런 대화가 삶을 바꾼다'란 책을 출판하기도 했다.

#나누며 사는 행복한 삶

이처럼 10년간 의사로, 상담자로, 교육자로 분주하게 살던 그녀는 2000년 병원 문을 닫고 은퇴했다. 당시 그녀 나이 58세. 다른 의사들의 은퇴연령과 비교하면 좀 이르다 싶었다.

"그 무렵 3남매 다 키워놓고 나니 이젠 정말 내가 하고 싶은 걸 해야겠다는 생각이 들더라고요. 그래서 제가 정말 하고 싶은 게 뭔지 생각해보니 가르치는 것, 그중에서도 대화교육이더라고요. 무엇보다 이 일을 언제까지고 저 혼자 할 수 있는 게 아니니까 저와 같은 생각을 가진 이들을 리더로 키워놓으면 그만큼 보람 있는 일이 없겠다 싶었죠."

그래서 그녀는 2002년 신학교에 진학, 가정사역자 과정을 시작했고 2007년 ABC 상담대화교육원을 설립했다. 그동안 교육원에서 배출한 대화교육 강사는 타주 및 해외 한인들까지 합쳐 약 20여명. 강사교육 외에도 교육원에선 정신질환자 가족들을 위한 세미나와 부부·부모교육도 진행 중인데 내년부터는 암환자 서포트그룹 및 재소자 상담, 출소자를 위한 사회적응 프로그램도 운영할 계획이다. 특히 그녀는 부모·자녀 간 대화법에 관심이 커 이와 관련한 세미나 및 교육이라면 열일 제쳐놓고 나선다.

"아이들 키울 때 두 딸들은 제가 시키는 대로 잘 따라 왔는데 막내아들이 사춘기에 접어들면서 부모와 대화도 잘 안하고 공부도 게을리 하는 것 같아 애를 먹었죠. 이후 아들을 고쳐보겠다고 대화법을 공부하다 결국 아들을 고치는 게 아니라 제가 변화해야 한다는 걸 알게 됐고 시간이 걸렸지만 이후 저희 가족들도 진심으로 통하는 사이가 됐죠."

이런 그녀의 열린 마음과 열성적인 교육 덕분에 삼남매는 모두 하버드대학을 졸업하고 훌륭한 사회인으로 성장해 지금은 그녀의 둘도 없는 친구가 됐다. 이처럼 평생에 걸쳐 본업을 제쳐두고 사회적 약자를 돕기 위해 동분서주하는 까닭은 무엇일까.

"제가 많은 분들의 도움으로 여기까지 왔으니 그 빚은 갚고 죽어야 할 것 같아서요.(웃음) 그리고 물이 고이면 썩듯 받은 축복을 끼고만 있으면 안 될 것 같기도 했고요. 나누며 살아야 진짜 사는 재미가 있으니까요."

이렇게 아름답게 나이들 수 있다면 좋겠다. 세상과 소통하며, 살아온 연륜을 나누며, 무엇보다 고난과 고통 속을 헤매는 이들의 상처를 따뜻하게 감싸 안아주며.


이주현 객원기자 [email protecte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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