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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양심에 어긋난 행동은 옳지도, 안전하지도 않아"

종교개혁 500년, 개혁의 현장을 가다 (4)

종교 재판대 섰던 루터의 답변
목숨 내놓고 시대를 향해 외쳐
종교개혁 루터 혼자 이룬 게 아닌
여러 친구와 조력자들 함께 나서
루터 이전에 수많은 개혁가들도
각 시대에 따라 신앙 양심 지켜


마르틴 루터는 종교개혁을 대변하는 인물로 꼽혀왔다. 개혁의 시발점을 루터로 보기 때문이다. 그러나 종교개혁은 불시에 우연히 발생한 게 아니다. 미완의 연속 선상에서 수많은 이들의 열망과 의지를 통한 발화였다. 종교개혁 이전에는 피에르 발도(프랑스), 존 위클리프(영국), 얀 후스(체코), 지롤라모 사보나롤라(이탈리아) 등이 개혁을 갈망하며 그릇에 물을 부었다. 그 물이 비로소 루터 때 넘쳤을 뿐이다. 분위기가 무르익자 시대는 루터를 종교개혁이라는 거대한 무대로 불러냈다. 루터는 한 인간으로서 너무나 작은 존재였지만 동시대에 함께했던 동역자가 있었기에 그 무대에 함께 설 수 있었다.

독일 아이제나흐=장열 기자


8월30일 아이제나흐 지역 바르트부르크 성.

나를 태운 버스는 20여 분 정도 산으로 올라갔다. 차가 다니는 도로만 빼면 우거진 숲이 전부인 곳이다.

저 멀리 절벽 꼭대기에 오래된 성채 하나가 보였다. 더는 버스가 갈 수 없는 지점에 도달했다. 직접 10여 분을 걸어 가파른 경사의 계단을 올랐다.

이곳은 루터가 1년간 신분을 감추고 숨어 살았던 성이다.

그는 왜 은둔해야 했을까. 95개조 논제로 촉발된 종교개혁(1517년)으로 인해 루터는 1521년 4월 종교 재판인 보름스 제국회의에 서야 했다. 루터는 거기서도 끝까지 뜻을 굽히지 않았다. 그는 결국 황제로부터 파문과 함께 제국 추방령을 받는다.

루터에게 주어진 신변 보장의 기간은 단 3주. 그 후에는 누구든지 루터를 죽여도 무방했다. 이때 루터를 몰래 납치해 바르트부르크 성으로 피신시킨 인물이 프리드리히 선제후(황제 선거의 자격을 가진 제후 중 한 명)다.

그는 루터의 후원자였다. 아마 프리드리히 선제후가 기지를 발휘하지 않았다면 오늘날 종교개혁의 유산은 축소됐을지도 모른다.

그만큼 긴박했던 순간에 세간의 이목을 피해야 했던 곳이라 그럴까. 교통이 발달한 지금도 성으로 가는 길은 숨이 가빠올 정도로 험했다.

성내 통로는 성인 두세 명이 지나가기도 비좁다. 루터는 이곳에서 외부와 철저히 단절됐었다.

그는 이 성을 '밧모섬'에 비유했다. 유배됐던 사도 요한의 처지에 자신을 투영했던 셈이다. 그만큼 고통의 생활이었다.

비좁은 통로를 지나 한 작은 방에 들어섰다. 루터가 라틴어 신약성경을 독일어로 번역했던 곳이다. 작은 창문, 책상과 의자가 전부인 이곳에서 루터는 치열하게 성경 번역에 매달렸다. 고독 속에서 엄습하는 어둠을 고작 등불 하나로 막은 채 밤낮없이 번역에 몰두했다.

루터는 성경 번역시 일반 사람들이 쓰는 단어와 문체를 선택했다. 오늘날 표준 독일어의 기반이 루터의 성경 번역에서 다져졌다는 평가도 있다. 루터는 그렇게 10개월 만에 독일어 신약성경(일명 9월 성경)을 번역했다.

루터는 이때 절친한 친구의 도움을 받았다. 당시 루터의 동역자이자 신학자였던 필립 멜란히톤이 개정 작업에 동참했었다.

이 성경은 당시 급진적으로 발전했던 인쇄술의 바람을 타고 대량으로 온 독일에 보급됐다.

나는 루터가 앉았던 책상을 한참 동안 바라봤다. 그는 무엇 때문에 은둔의 시간을 온통 성경 번역에 쏟았을까.

당시 일반인이 성경을 구입한다는 건 불가했다. 필사본 성경 가격이 500굴덴 정도. 당시 일반 노동자의 한 달 급료가 2굴덴이었다.

그는 성경을 다시 대중에게 돌려주고자 했다. 모두가 성경을 쉽게 읽고 이해할 수 있기를 원했다. 그 발상은 곧 종교의 그릇된 통제와 특권층의 카르텔을 허물고 시대의 사조를 전환한 대변혁의 계기가 됐다.

멜란히톤이 신학적 조력자였다면, 루터의 또 다른 친구 루카스 크라나흐는 예술을 통해 종교개혁의 사상을 전달했다.

바르트부르크성 곳곳엔 루터와 관련된 그림이 많이 전시돼있었다. 그 중 대중에게 널리 알려진 루터의 초상화는 크라나흐의 작품이다. 화가였던 크라나흐는 루터의 평소 모습과 삶을 즐겨 그렸다.

루터의 글에는 대개 크라나흐의 그림이 따라온다. 이 성에서 루터가 번역한 '9월 성경'에도 크라나흐가 그린 21개의 목판화가 삽입돼 있다.

골방에서 라틴어 성경을 독일어로 번역

9월1일 보름스 대성당 앞. 나는 루터가 바르트부르크 성으로 피신 오기 전 보름스 제국회의에서 종교 재판을 받았던 곳을 찾아갔다. 당시 루터가 심문을 받았던 곳은 보름스 대성당 광장 오른편이다. 지금은 푸른 잔디가 깔린 공원으로 변해 있었다.

과거에 정죄와 파문 결정이 내려진 살벌한 곳이라고 느껴지기엔 흘러간 시간이 역사를 묻어버린 듯 했다.

대신 ‘루터의 신발’이라 불리는 조형물 하나만이 그가 섰던 자리의 의미를 대변하고 있었다.

1521년 4월16~18일 루터는 이곳에서 사흘간 공개 심문을 받았다. 신성로마제국 황제 카를 5세와 종교 지도자들이 루터가 쓴 책들을 잔뜩 쌓아둔 채 그를 노려보고 있었다. 당시 루터의 나이는 38세.

심문을 맡은 요한 에크 대주교는 딱 두 가지를 물었다.

“이 모든 책들을 당신이 썼는가, 그리고 책에 쓰인 주장을 철회하겠는가".

그 물음은 단순히 교리 차이에 대한 힐난이 아니었다. 실제 목숨을 빼앗고자 말속에 칼을 숨긴 심문이었다. 갈림길에 섰던 루터에게는 생과 사의 선택이었으리라.

그때 루터는 하루 동안의 시간을 달라고 요청했다. 두려움이 엄습해서 그랬을까. 아니다. 논리적이고 진실한 답변을 준비하기 위해서였다. 다음날 루터의 대답은 오늘날 울림을 전한다.

“내 양심은 하나님 말씀에 사로잡혀 있다. 양심에 어긋난 행동은 옳지 않을 뿐 아니라 안전하지도 않다. 아무것도 취소하지 않겠다. 하나님, 나를 도우소서”.

중세는 거대한 종교 사회였다. 성경의 오용, 교리의 모순, 비윤리적 행태에 대한 비판과 체제를 향한 대항은 곧 시대에서의 완전한 퇴출과 격리였다. 아니 목숨도 내놓아야 했던 저항이었다. 루터의 답변엔 그만큼 비장함이 담겨 있었던 셈이다.

루터가 섰던 자리를 보면서 오늘날 현실을 돌아봤다. 이 시대에 존재하는 개인과 교회, 그리고 사회에는 과연 그 양심이 살아 있는가.

나는 그렇게 자문하며 공원 옆을 걸어서 10여 분 거리에 있는 종교개혁 기념비로 향했다.

묵직하게 모습을 드러낸 종교개혁 기념비 앞에서 나는 숙연해졌다. 기념비 중앙엔 마르틴 루터가 서있고, 그 주변으론 후스, 발데스, 사보나롤라, 위클리프, 발데스, 멜란히톤, 로이힐린 등 여러 종교개혁가의 동상이 함께 세워져 있었다.

나는 그 앞에서 물었다. 과연 신앙적 양심이란 무엇인가. 그 양심은 루터 홀로 지켜낸 것이 아닌, 역사를 따라 각 시대의 인물들이 고수했던 신념이자 가치였다. 루터 역시 그 유산을 부정할 수 없었을 테다. 오늘날 신앙인들은 그 길을 바르게 걷고 있는가.


장열 기자 jang.yeol@koreadaily.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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