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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물 오디세이] 로열비즈니스 뱅크 랄슨 리 전무…맨발의 풋볼 키커, 성공신화를 쓰다

고교 때 풋볼 키커 시작
83년 한인 첫 NFL 진출
87년 LA서 주택융자 시작
주류은행서 억대매출 주목

3년 전 현 은행에 스카우트
주택융자부 신설, 고속 성장
의료선교·봉사활동도 열심
"받은 도움 돌려주고 파"


처음 만나는 사람을 단박에 무장해제 시킬 수 있다는 건 참 대단한 재주다. 로열비즈니스 뱅크 랄슨 리(58·한국명 이현택) 전무(EVP)도 그러하다. 이런 신기한 재주를 가진 이들의 공통점은 그들 스스로 처음 본 상대에 경계를 두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도 그랬다. 오랜 시간 금융인으로 살아온 이들 특유의 딱딱함보다는 맘씨 좋은 옆집 아저씨의 소탈함이 앞섰다. 물론 경청과 질문사이, 찰나의 예리한 눈빛과 전문지식을 알기 쉽게 풀어놓는 본새를 보고 있노라면 더 묻고 따질 필요 없이 그의 성공의 이면을 짐작케 했지만 말이다. 가는 여름에 아직도 미련이 남은 양 불볕더위가 작열하던 한낮, LA다운타운 사무실에서 그를 만나봤다.

#NFL 키커를 꿈꾸다

서울 출생인 그는 열두 살 때인 1971년 북가주 몬터레이로 가족이민 왔다. 한인은 물론 아시안도 거의 없던 작은 마을에서 시작된 소년의 미국생활은 순탄치 않았다. 암묵적 혹은 명백한 인종차별에 맞서 싸우다보니 학교에선 매일 싸움박질의 연속이었다. 결국 1년 뒤 학교 측의 전학권고를 받고 하와이로 이주해 학교를 옮겼다. 다행히 전학 후 학교생활은 안정을 되찾았고 8학년부터는 교내 육상클럽에서, 12학년 때는 교내 풋볼팀에서 키커로 활약하며 스포츠에 두각을 나타냈다.

"고교 졸업 후 미군에 입대하려 했어요. 그런데 우연히 NFL 코치 출신인 대학팀 감독이 제 경기 영상을 보고 전액장학금을 제시하며 입학을 권유했죠."

그래서 1978년 그는 샌디에이고 소재 US인터내셔널 대학교 수학과에 진학해 대학 풋볼팀 키커로 활약했다. 그러다 2학년 때 팀이 해체되는 바람에 그는 하와이주립대 풋볼팀으로 스카우트됐다. 그곳에서 그는 좋은 기량을 선보이며 '맨발의 키커'로 스포트라이트를 받기 시작했고 대학 졸업 후인 1983년 NFL 필라델피아 이글스에 입단할 수 있었다.

"당시 NFL 첫 한인 선수였을 겁니다. 물론 입단했다고 모두 정식 선수가 되는 건 아닙니다. 함께 입단한 100여명 중 프리시즌을 거쳐 살아남는 선수는 절반도 안 되니까요."

예상대로 NFL 벽은 높았고 입단 후 프리시즌에서 단 한 경기 출장 후 방출됐다. 이후 그는 신흥 풋볼리그인 USFL 덴버 골드를 거쳐 NFL 덴버 브롱코에도 입단했지만 번번이 방출당하기 일쑤였다. 그렇게 방출되면 취직해 생계를 이어갔고 열심히 다음 기회를 노렸다. 그렇게 3년이란 시간이 속절없이 흘러갔다. 그쯤 되면 포기할 법도 싶었다.

"제가 지고는 못 사는 성격이에요.(웃음) 시작했으니 끝을 보고 싶었죠. NFL 전체 키커 수가 32명인데 설마 그 안에 못 들겠냐는 배짱이 있었던 것 같아요."

#주택융자로 일군 성공

1987년 결혼과 동시에 그는 당시 막 발족한 실내 풋볼리그(AFL)의 피츠버그 글래디에이터스에 입단해 1년간 활약했는데 그해 준우승을 차지하는 쾌거를 맛보기도 했다. 그렇게 성공적으로 시즌을 끝내고 휴가차 LA에 온 그는 인생의 터닝포인트를 맞게 된다.

"당시 모기지 회사를 운영하던 지인께서 영어를 잘 하는 직원이 필요한데 쉬는 동안 함께 일해 보자 제안을 했죠. 당시 첫애가 막 태어났던 때라 가장으로서 책임감도 컸기에 일단 한번 해보자 싶었죠."

그때까지 운동만 하며 살아온 그에게 융자업무는 만만치 않았다.

"처음엔 한국말도 제대로 못했으니 너무 힘들었죠. 그런 저를 신윤진 부사장을 비롯해 참 많은 분들이 도와주셨습니다. 그분들이 없었다면 지금의 전 없었을 겁니다. 정말 감사하죠."

운동으로 다져진 승부근성과 타고난 분석력 덕분에 그는 빠르게 업무에 적응했고 얼마 안가 수입도 크게 늘었다. 결국 반년 뒤 그는 풋볼팀 복귀를 포기하고 본격적으로 주택융자업에 뛰어들었다. 그리고 4년 뒤인 1991년 그는 신 부사장이 설립한 모기지 융자업체에서 함께 일하다 1995년 워싱턴뮤추얼 은행 주택융자부로 스카우트 돼 홀세일 매니저로 근무했다. 당시 주택 호경기를 타고 2000년대 초반, 그는 연간 10억달러에 가까운 매출을 기록하며 은행 사보에 화제의 인물로 소개되기도 했다.

"고객 중 한인 모기지업체들이 많았는데 그러다보니 당시 남가주 한인 주택구입자의 25%가 저를 통해 융자를 했더라고요. 당시 주택구입자면 융자계약서에서 제 이름을 찾을 수도 있을 겁니다.(웃음)"

#나누며 사는 삶

이후 그는 BoA를 거쳐 2010년부터 태평양은행에서 근무하다 2014년 중국계 은행인 로열비즈니스 뱅크로 스카우트 됐다. 이직 당시엔 주택융자부가 없었는데 그가 직원 4명을 데리고 팀을 꾸려 시작한 것이 3년 만에 28명으로 늘 만큼 고속성장을 거듭했다.

"한인, 중국인 등 이민자들에게 꼭 맞는 융자상품을 개발해 선보인 덕분에 좋은 성과를 낼 수 있었던 것 같아요."

덕분에 매출액도 매년 가파른 성장세를 보였고 그 여세를 몰아 은행은 지난 7월 나스닥에 상장됐다. 당연히 그의 커미션만도 상당할 것 같았다.

"아니에요. 지금은 월급제로 일합니다. 물론 커미션을 받으면 돈이야 많이 벌겠지만 커미션에 욕심내다 보면 직원들 키워줄 수도 없고 팀도 제대로 운영할 수 없겠다 싶어 처음부터 샐러리로 받겠다했죠."

이처럼 앞만 보고 달려왔지만 그렇다고 그가 외골수 워커홀릭은 아니다. 그의 청춘을 뜨겁게 달궜던 풋볼에 대한 사랑과 관심은 여전해 거주지인 하시엔다하이츠 한인들 10여명과 풋볼클럽을 조직해 매주 월요일이면 함께 모여 TV로 풋볼 경기를 관람하고 관전평도 나눈다. 그리고 모교인 하와이대 풋볼팀이 LA인근으로 원정경기를 오면 클럽 회원들과 경기장을 찾고 후배들을 위한 후원행사에도 적극 참여하고 있다.

이뿐만 아니다. 봉사활동도 열심이다. 연세대치대동문회 소속 치과전문의 4명, 봉사자 8명 등과 함께 3년 전부터 멕시코 빈민촌을 찾아 의료선교를 해오고 있다. 그런가하면 LA카운티셰리프 한미경찰위원회에 소속돼 25년째 봉사활동도 이어오고 있다.

"여러 사람들의 도움으로 오늘에 이르렀으니 받은 걸 되돌려 주려 노력하는 것뿐입니다. 무엇보다 제가 즐겁고 행복해서 하는 일이기도 하고요."

문득 행복이 뭐 별건가 싶었다. 어제와 다름없는 오늘, 오늘과 크게 다르지 않을 내일을 남들처럼 복닥거리며 살다 그 사이사이 도움이 필요한 이들의 손을 외면치 않고 잡아주는 것, 그리하여 서로의 따뜻한 온기를 느끼며 살아가는 것이야말로 꽤 근사한 행복이 아니겠는가.


이주현 객원기자 [email protecte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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