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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인의 보약' 설렁탕으로 뉴욕 문화 살찌우다

창간 특집 '성공 스토리' (3) 뉴욕 한인 문화예술인들의 후원자 최형기 감미옥 대표

'물 좀 주소' '행복의 나라로' 등 1970년대 한국인들의 가슴에 깊은 울림을 남긴 '한국 포크록의 대부' 한대수는 뉴욕에 살고 있습니다. 팟캐스트 '한대수의 마이뉴욕'을 통해 자신의 뉴욕 생활과 연예인 게스트들의 이야기를 엮어 나가는 그가 이번에는 특이하게도 뉴저지 포트리의 설렁탕 전문점 감미옥 최형기 대표를 게스트로 초대했다네요. 왜 한식당 사장님이 한대수의 팟캐스트에 등장하게 됐을까요? 10월 15일 일요일 포트리 감미옥에서 공개 녹화하는 '한대수의 마이뉴욕 -최형기 감미옥 대표 편'을 살짝 공개합니다. 이번 지상 팟캐스트의 사회는 '뉴욕중앙일보'입니다.



"지난 2월 말 갑작스런 사고로 포트리 감미옥 가게가 완전히 박살났어요. 한인 할머니의 운전 실수로 그리 됐는데 경찰이 와서 조사하고 난리가 아니었어. 길 건너편에 앉아서 그 장면을 보고 있자니 그런 생각이 들더라고요. 한 3년 전부터 저걸 부숴야 새로 뭔가를 하지, 하고 있었는데 쉽지 않았거든요. 매일 오는 손님들을 생각하면 문 닫는다는 게 정말 쉽지 않죠. 그런데 사고가 모든 걸 정리해 버린 거예요. 그래, 전부 뒤집자, 설계도를 그리고 인테리어 구상이 다 되어 있었던 건 아니었지만. 7개월 만에 재오픈 기념으로 마련한 이벤트가 '한대수의 마이뉴욕' 팟캐스트입니다. 감미옥의 오랜 고객 여러분과 직접 소통하는 기회가 되길 바랍니다."

1990년 맨해튼에서 감미옥을 오픈한 이후 서울의 대표 음식 설렁탕을 세계인(뉴요커)의 음식으로 승화시킨 최형기(63) 대표. 한식 셰프 출신의 설렁탕집 사장이 포크록의 레전드 한대수와 호형호제하는 이유가 먼저 궁금했다. 먼저 최형기 대표의 변.

"이번에 제가 한대수의 마이뉴욕에 출연하게 된 건 포트리 감미옥의 오프닝 기념 행사이기도 하지만 그동안 이어온 오랜 인연 덕분에 대수 형이 저를 도와 주시려는 뜻도 있습니다. 이런 기회를 통해 제 가게가 좀 더 널리 알려지고 더 많은 손님들이 와서 좋은 분위기에서 식사를 즐기시면 좋지 않겠습니까."

-최 대표는 한대수씨와 어떻게 인연을 맺게 되었는지.

(최형기 대표, 이하 최) "맨해튼에 감미옥을 열기 전 1985년부터 플러싱에서 버드나무집이라는 토속음식점을 시작했었어요. 그때 한대수씨를 비롯한 '예술인 삼총사'를 처음 만나게 되었는데, 굉장했죠."

(한대수, 이하 한) "1958년에 할아버지(한영교 전 연세대 신학대학원장)를 따라 뉴욕에 와서 초등학교를 다녔고, 한국으로 갔다가 아버지(한창석)와 같이 살고 싶어 고등학생 때 다시 뉴욕으로 왔었죠. 대학 중퇴하고 한국 가서 노래 하다가 다시 돌아온 후에 알게 됐죠."

-그때 이야기는 한번도 공개한 적이 없던데.

(최) "제가 LA 거쳐서 뉴욕까지 와서 패션 주얼리 행상을 하다가 번 돈으로 플러싱에서 한식당을 하게 됐는데… '토속음식점'이라는 컨셉으로 맷돌 갖다 놓고 녹두 갈아 빈대떡도 부치고 순댓국 끓이고. 아마 순댓국은 처음이었을 걸요, 뉴욕에. 그 당시만 해도 한국 사람들 고향 가고 싶어도 갈 수 없는 처지라 고향 생각 간절할 때였으니까. 그런데 대수 형 알고 보면 굉장히 서민적이더라구요. 부산 사람이라 순댓국, 감자탕 이런 걸 좋아해요."

(한) "제가 어릴 때 와서 살던 뉴욕 시절에는 맨해튼에 한국 음식점이 유엔본부 근처에 아리랑하우스라고 하나 있었어요. 그런데 그게 외국인과 외교관들을 위한 음식점이라 비싸기도 하고 가기가 쉽지 않았어요. 저희 할아버지가 굉장히 큰 집에 사셨는데, 그때 할머니가 유학생들을 위해서 설날 파티를 하면 캐비지 김치에 불고기, 이런 걸 먹으면서 정말 좋아했거든요. 제가 한국 갔다가 다시 뉴욕 왔을 때 마침 버드나무집 소식을 듣고, 진짜 코리안 음식이라는 순댓국을 한다잖아요, 그래서 친구들과 '한번 가 보자' 이렇게 된 거죠. 적어도 일주일에 한두 번은 갔던 것 같아요. 순댓국 먹으면 땀 쫘악 흘리고, 얼마나 맛있어요. 제대로 된 한국 음식에 푹 빠졌죠."

-당시 '버드나무집 삼총사'라고 했는데 어떤 분들인지.

(최) "1994년에 작고하신 전위예술가 정찬승씨, 대한민국의 백남준과 함께 전위예술의 새 장을 연 분이죠. 그리고 그림 하셨던 변종곤 화백, 한대수, 이렇게 세 분. 정찬승씨는 가죽 재킷에 장화 신고 옷에는 자기가 만든 소품 잔뜩 붙여서 나타나고, 변종곤 그 양반도 단발머리 패션, 한대수씨는 이렇게 장발. 이런 분들이 가게에 한꺼번에 몰려 와서. 난 처음 본 사람들이잖아요, 얼마나 궁금하겠어요. 그렇게 만남이 시작됐죠. 1990년 맨해튼에 감미옥을 열면서부터는 더 자주 만나게 됐죠."

(한) "아, 그때 분위기 정말 좋았어요. 막걸리도 팔았지."

(최) "그때 막걸리를 만드는 분하고 마침 연결되어서 그리 되었죠. 그리고 당시 신문에 만화광고를 냈는데, 일주일마다 버드나무집에서 벌어지는 일들을 유명 만화가에게 의뢰해서 광고로 만든 거예요. 자유의 여신상에다가 양산박에 나오는 노지심이 '주모, 한 잔 더~' 하는 컷까지, 엄청나게 히트를 쳤죠. 정말 가게 문을 걸어 놓고 장사를 할 정도로 그렇게 분위기가 좋았어요."

-플러싱 버드나무집은 '먹고살기 위해' 한 일이라고 했는데 맨해튼 감미옥 오픈 이후 어떤 변화가 있었는지. 설렁탕은 임금이 백성을 위해 만든 음식이라고 알려져 있는데, 그래서 문화예술인들에게 '퍼 주는' 사장이 된 건가.

(한) "그 당시 한국 음식점은 아리랑 색동저고리 한두 개 붙여 놓고 한복 입은 여자 탤런트 달력 걸어놓고, 그런 정도가 인테리어의 전부였어요. 최 사장은 한식당을 하면서 여러 분야의 문화예술가들과 친해졌고 또 세련된 감각을 이해하는 사람이야. 32가에 감미옥 처음 오픈할 때는 소호에 있는 아티스트들 불러와서 가게 디자인을 소호 분위기로 바꾸고 그랬어요. 지금 한국 음식점들이 인테리어에 신경 쓰게 된 게 최 사장 덕분이라고 해도 될 정도예요."

(최) "그때 감미옥은 밥 한 그릇 먹으려면 줄을 서서 기다려야 하는 집이었어요. 이재용 삼성 부회장(당시 하버드대 경영대학원 유학 중)도 그때는 반바지 차림에 티 안 나게 이어폰을 귀에 꽂고 줄 서서 기다리는데 대수 형은 '형기야~~' 하면서 문을 벌컥 열고 손을 흔들면서 들어오는 거야. 사람들이 '저 친구 뭐야' 하는 표정으로 보면 '아~ 반갑습니다' 하면서 정신 없게…. 그런 열정으로 우리 감미옥에 기운을 불어 넣어 주셨지. 그런데 그때 우리 가게에 '스페이스 감미옥'이라고 전시 공간이 있었어. 뉴욕에서 공부한 화가 지망생들이 한국에 돌아가려면 경력이 있어야 하잖아. 그래서 우리가 전시회 오프닝 파티도 해 주고 큐레이터도 쓰고 하면서 만든 건데 변종곤 화백 같은 분이 전시회에 와서 격려해 주고 멘토링을 해 주니까 후학들에게 큰 힘이 됐지. 그래서 감미옥이 점점 더 아티스트들이 들어오기 쉬운 공간이 된 거죠."

-문화예술계 사람들에 관심이 깊은 이유가 있을 것 같은데.

(최) "고등학교 때 밴드 만들어 활동하긴 했지만 존재감이 크진 않았어요. 여러 가수들 앨범 만들 때 참여도 해보고 했지만 빛을 보진 못했고. 그러다 대학을 나오고 공군에 입대하게 됐는데, 그때 나훈아가 군악대장과 함께 공군예술단을 만들려고 했어요. 제가 가수 오디션을 봐서 최종 합격했는데 일이 꼬이는 바람에 군예단 이야기는 없던 걸로 되고 그냥 군악대에서 복무하다 제대했죠."

-최 대표 노래 솜씨는 들어줄 만합니까.

(한) "저는 많이 들었는데요, 가수 수준입니다. 이번 팟캐스트에서 노래 부를 기회가 있으니 기대하십시오. 사실상 내가 보기에는 감미옥이 크게 성공을 해버렸기에, 성공 못 했으면 가수가 되었을 거야. 돈 아니면 음악!"

-한 선생님은 '물 좀 주소' '행복의 나라로' 같은 노래로 히트를 쳤는데.

(한) "최 사장에게는 돈을 줬고 나한테는 음악을 준 거죠. 그런데 저는 음악은 있는데 화폐가 없어. 우리 둘이가 친구가 되니까 고맙죠. 그리고 이 두 노래는 다 사연이 있어요. '행복의 나라로'는 고등학생 때 뉴욕 와서 아버지랑 같이 살 때 만든 거고, '물 좀 주소'는 대학(뉴햄프셔 수의대) 중퇴하고 한국 가 있을 때 만든 거예요. 둘 다 집에서 쫓겨나고 만든 공통점이 있네. 나는 뭔가 좋은 환경에서 살다가 한번 뜨려고 하면 꺾이는 거 같아. '물 좀 주소'는 성균관대 뒤 달동네에서, '행복의 나라로'는 로어이스트사이드 빈민굴에서 탄생했죠."

-최 대표는 처음 사업할 때부터 문화예술인 후원자인 셈인데.

(최) "한대수씨와 인연 중에 중요한 모멘텀이 있었는데, 90년대 중반에 '사는 것도 제기랄 죽는 것도 제기랄'이라는 자서전을 낸 적 있거든요. 저한테 그 책을 줬는데 LA 출장 다녀오는 길에 비행기에서 읽고 바로 전화를 걸었어요. '대수 형, 앨범 하나 만듭시다' 하고. 그래서 나온 게 대수 형의 스무 장 남짓한 앨범 중 유일한 영어 앨범 '이성의 시대 반역의 시대'입니다. 제가 투자자 겸 제작자로 만든 감미레코드에서 휘트니 휴스턴의 '보디가드' 영화로 그래미상을 받은 존 롤로 프로듀서가 만들었어요. 그 이후 한국에 재즈를 전파하는데 전환점이 됐죠."

(한) "그 앨범 덕분에 저는 일본에서 초청 공연까지 하게 됐어요. 당시 맨해튼 다운타운에 최신 시설을 갖춘 녹음 스튜디오도 있었죠. 최 사장은 음악가들을 도와준 사람이라고 할 수 있어요. 돈 벌어서 페라리 타는 게 아니고 음악가들을 도와준 거죠. 재즈가 한국에 씨를 뿌린 게 1980년 말쯤인데 그 시초가 최형기씨거든요. 제 아내 옥사나가 몽골계인데 몽골 음악을 한국에 처음으로 소개하게 도와준 것도 최 사장이고요."

-포트리 감미옥 가게 안에 이일 화백의 작품이 걸려 있다고.

(한) "지금은 유명 화가이지만 날 볼 때마다 하는 이야기가 있어요. 자기가 1970년대 브루클린 그린포인트에 사는 무명일 때 최형기씨가 자기 작품을 사 줬다는 거야. 그 돈을 누런 봉투에 넣어서 집까지 가는데, 전철 안에서 누가 볼까봐 품에 꼭 안고 갔다는 이야기를 몇 번씩이나 하는 거야. 최 사장은 일찍부터 사업가로서 한국 정부보다 더 많은 도움을 줬어요. 거기다가 유명 화가들 작품을 가게 안에 거니까 외국인 손님들도 한국인들에 대한 인식이 달라지는 거야. 어, 코리안들은 음식점에도 작품을 거네, 이러는 거지. 한국 사람들을 아주 수준 높게 보게 되는 거예요."

-그동안 설렁탕을 하면서 한식 세계화에도 관심이 많았는데.

(최) "솔직히 한식 세계화는 여기서 해야 돼요, 한국에서 이야기할 게 아니라. 뉴욕이 곧 '세계'이거든요. 제가 생각하기로는 매니지먼트가 영어로 가야 된다, 우리 음식을 변형해서 모던화하고 퓨전화하고 하는 건 어떤 것이든 되는 거지만 우리 직원이 전부 영어로 해야 로컬화되는 것 아니냐, 이런 거죠. 외국인 손님이 왔을 때 자기가 이 집 단골인가, 의문이 들 정도로 이질감을 느낀다면 문제인 거죠. 또 한국 사람이 가장 자신 있게 할 수 있는 건 한식 아닌가요. 한국에서 유학 와서 서양 요리 배워서 호텔에 취직할 생각하는 것이 아니라 한식당에 오도록 하는 것도 중요하고요. 우리 감미옥 셰프는 CIA 요리학교 한인학생회장 출신입니다. 후배들도 방학 중에 인턴으로 오기도 하고요. 한식 세계화는 결국 '사람' 문제인 셈이죠."

-포트리 감미옥은 이런 여러 장점을 다 보여주는 기회가 될 것 같다.

(최) "32가에 처음 감미옥을 열었을 때 재즈를 틀어 놓곤 했는데, 손님들 중에는 항의하는 분들도 있었어요. 설렁탕집에 웬 재즈냐고. 이곳 포트리 감미옥은 모던하게 리모델링해서 재즈를 틀어놔도 전혀 이상하지 않은 느낌이 들어요. 이제 설렁탕을 강조하기 보다는 여유있게 저녁을 즐길 수 있는 공간, 와인을 한 잔 기울이면서 느긋하게 시간을 보낼 수 있는 그런 공간으로 만들고 싶습니다."

-30여 년 한식당을 운영하다 보면 개인적으로도 새로운 감회가 있을 것 같은데.

(최) "하하, 저는 내년이 안식년입니다. 와이프한데 허락 받아 제가 관심 있는 음식과 음악에 대해 탐구하고 개인적으로 힐링하는 시간을 가질려고 해요. 먼저 부탄에 가서 한 달 동안 걸어볼 생각입니다. 지금은 아무 생각도 나지 않지만 걷다 보면 생각이 나겠지요. 중국과 일본에도 좀 오래 머물 생각입니다만, 뭘 하게 될지는 모르겠어요."

-문재인은 네팔의 히말라야 산기슭을 걷고 나서 대통령이 됐다. 최 대표는 부탄에서 걷고 난 후에 음악과 밥 중에서 뭘 선택할 것 같은가.

(최) "안식년을 통해 생각을 정리할 계획인데, 한식 컨설팅 같은 것도 괜찮을 것 같고, 밴드 하나 만들어서 커뮤니티에 봉사하는 것도 고려 중입니다. 아직은 뭐라 할지…."


김일곤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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