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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루터의 손끝이 향한 곳에서 개혁은 시작됐다

종교개혁 500년, 개혁의 현장을 가다 (2)

작고 아담한 마을에서 일어난 일
95개조 논제 유럽 전체 뒤흔들어
면죄부 통해 바라본 시대적 현실
번민했던 루터, 결국 펜 들어 반박
독일 곳곳 루터 동상들의 공통점
한 손엔 반드시 성경책 들려있어


중세 독일은 '교황청의 젖소'로 불렸다. 탐욕이 종교의 옷을 입고 횡행했다. 가톨릭 교회는 그렇게 짜낸 돈으로 치장됐고 점점 더 화려해졌다. 진리 대신 탐심으로 배를 불렸다. 종교가 모든 영역을 지배하던 중세. 어둠과 파국의 시대였다. 그때 마르틴 루터(1483~1546)가 시대를 반박하는 95개 논제를 내걸었다. 시대의 사조가 전환되는 순간이었다.

독일 비텐베르크=장열 기자

8월28일, 비텐베르크에 도착했다.

이곳은 종교개혁의 진원지다. 마르틴 루터가 비텐베르크 성교회 문에 95개조 반박문을 붙인 곳이다.

마을은 작고 아담했다. 길 하나에 마르틴 루터와 아내(카타리나 폰보라)가 함께 살았던 집, 교회, 대학 등이 동일 선상에 모두 몰려있다. 루터는 이곳에서 무려 35년을 보냈다. 여기서 신학(비텐베르크대학)을 가르쳤고 성경을 설교했다.

그 길을 따라 걸었다. 루터도 매일 이 길을 걸었으리라.

마을 광장에 이르니 루터의 동상이 우뚝 서있다. 한 손엔 성경이 들려 있었다. 그건 독일 곳곳에 세워진 모든 루터 동상의 공통점이다. 그만큼 루터에겐 성경이 기준이었다. 그래서였을까. 그에 손에 들린 성경은 현실과 상충했다. 루터는 고뇌했다. 홀로 수많은 질문도 던졌다. 그때마다 "이게 아닌데…"라며 번민했다.

나는 루터가 살았던 집(현재는 루터 박물관)으로 향했다. 당시 사용됐던 면죄부 함이 눈에 들어왔다. 윗면엔 금화를 넣을 수 있게 깊은 홈이 패어 있다. 그 시대의 현실이 적나라하게 읽히는 듯했다.

당시 면죄부 판매에 앞장섰던 가톨릭 수도사 테첼은 저 상자를 앞에 두고 만인에게 외쳤을 테다. 금화가 떨어지는 소리가 크면 클수록 죽은 영혼이 천국으로 갈 수 있다고.

사람들은 죄를 돈으로 해결할 수 있다고 믿었다. 오늘의 시각으로 그때를 어리석게 봐선 안 된다. 무려 1000년 가까이 종교가 인식을 지배했던 중세다. 그릇된 교리가 오랜 세월과 맞물려 모든 사상에 고착된 시절이다.

사람들은 종교의 오도를 눈치챌 수 없었다. 오직 라틴어로 쓰인 성경만 존재했다. 성경과의 거리가 너무나 멀었다. 문맹이 팽배한 시대 속에서 성경은 특권층의 전유물이었다. 죄와 회심의 문제를 돈과 결부시킨 황당한 교리가 아무 의심 없이 그대로 수용됐던 이유다.

인간에겐 죄성이 내재한다. 무의식 속에는 죽음 이후의 두려움이 존재한다. 중세 때도 그랬다. 신의 심판을 피하려면 뭔가 방법을 찾아야 했다. 당시 교회는 이 점을 교묘히 이용했다.

본래 구원은 어디에서 비롯되는가. 중세는 인본(人本)적 인식으로 신본(神本)의 세계관을 지탱했다. 아니 그럴듯하게 포장했다. 당시 사제들은 죄 사함을 위해 행위와 행실을 강조했다. 거기엔 회심과 은혜의 본질이 생략돼 있었다.

선한 행실은 신의 은혜에 대한 감격의 반응이다. 그러나 그 자체를 통해서는 구원에 이를 수 없다. 루터도 이 지점에서 고뇌했다.

과연 인간은 하나님을 온전하게 만족시킬 수 있는 존재인가. 구원까지 도달의 기준은 무엇이며 얼마나 노력해야 흠 없는 의로움에 이를 수 있을까.

당시 면죄부 함은 구원에 이르려는 인간의 몸부림을 가장 선명히 표현하는 수단으로 쓰였다. 사람들은 원죄의 굴레 안에서 두려움을 느낄수록, 내세를 원할수록 면죄부에 영혼을 떠맡겼다. 그릇된 믿음이 축적되자 교회가 높아졌고, 교황의 배는 불러 만 갔다.

루터는 이 모든 광경을 목도했다. 신본으로 가장한 인본의 뿌리를 들춰내야 했다. 현실을 두고 내면에서 끊임없이 제기된 의문은 결국 '95개조 논제'라는 대자보로 폭발됐다.

나는 비텐베르크 성교회로 향했다. 루터는 1517년 10월31일 이 교회 정문에 대자보를 붙였다. 처음엔 토론을 통해 문제를 공론화시켜보려던 의도였다.

그러나 사람들은 이날을 종교개혁의 기점으로 본다. 당시 95개조 논제는 구텐베르크 인쇄술과 맞물려 전 유럽으로 삽시간에 퍼져나갔다. 종교개혁은 그렇게 발화됐다.

루터는 어떤 심정으로 대자보를 붙였을까. 종교가 모든 것을 지배하던 때, 체제에 대한 반발은 어쩌면 사회에서의 제명, 이탈, 배제를 각오한 행동이었으리라. 단지 용기만으로 가능한 객기는 아니었을 테다.

나는 바로 옆 비텐베르크 대학으로 걸음을 옮겼다. 루터는 주로 여기서 시편과 로마서를 강의했다. 강의 준비로 묵상을 하던 그에게 성경 한 구절(로마서 1장17절)이 불현듯 가슴을 찔렀다.

그건 죄인이 의롭게 되는 것은 그리스도에 대한 믿음으로 가능하다는 깨우침이었다. 구원은 전적으로 타락한 인간의 공로가 아닌 오직 그리스도의 은혜에서 비롯됨을 비로소 인식했다. 그 유명한 사건이 이곳 '탑 방에서의 경험'이다.

믿음의 의미는 본래 묵직하고 심오하다. 구원의 확신만을 내세워 죄에서의 자유를 빙자한 방종을 합리화 시킬 수도 없다. 은혜가 인간을 성화(聖化)로 걷게 해서다. 오늘날 교회가 소유한 구원의 의미를 돌아봤다. 그 가치가 왜곡되거나 은연중에 값싸게 치부되진 않는가.

95개조 논제는 단순한 현실 비판이 아니다. 비윤리적 행태에 대한 분개도 아니다. 표피에 대한 자극으로 심층의 문제를 휘저은 시대를 향한 포효였다.

루터의 펜 끝은 궁극적으로 신학의 변질을 겨눴다. 성경에 대한 잘못된 해석과 왜곡이 영혼의 눈을 가리고 사회와 시대를 오도해서다.

루터의 신앙은 그의 화가 친구 루카스 크라나흐가 그린 작품에서 잘 드러난다. 그림을 보려고 루터가 사역했던 비텐베르크 시교회를 찾아갔다.

나는 교회당 제단에 걸린 그림 속에서 한 장면을 유심히 살폈다. 그림 속 루터는 동적이었다. 설교대에 서서 한 손을 성경에 올려놓고 다른 한 손으로 중앙을 가리켰다. 그의 손끝이 향한 건 십자가에 달린 예수다.

루터는 거기에 방점을 찍었다. 그리스도가 십자가에서 죽은 이유에서 행동의 확신을 얻었다. 시대 판별의 기준으로 삼았다. 95개조 논제 작성의 바탕이 되었을 테다.

루터가 가리키는 대상 앞에서 나는 숙연해졌다. 그리고 자문했다. 오늘날 기독교에 그 십자가는 과연 울림이 있는가.


장열 기자 jang.yeol@koreadaily.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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