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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동차 대륙횡단, 여러분도 도전해 보세요"

창간 특집 '성공 스토리' (1) 한식 전도사의 대변신 김유봉 장로

34년간 맨해튼 32가서 '뉴욕곰탕' 운영
부부 동반으로 산타페 타고 49일 여행
"남에게 유익 주고 배려하면 성공한 삶"


뉴욕중앙일보가 창간 42주년을 맞아 뉴욕·뉴저지 일원 한인 1세들과 한인 기업의 성공 스토리를 연재합니다. 머나먼 이국 땅에 뿌리를 내리고 성공을 일궈낸 이들의 이야기를 통해 한민족의 저력과 정체성을 재확인하는 기회로 삼았으면 합니다.

"김 장로님, 그 연세에 대륙횡단을 했다고?" "현대차 모델이 되신 건가?"

지난 9월 2일 중앙일보를 펼쳐 든 독자들은 수상한(?) 광고를 만났다. 맨해튼 32스트리트 한복판에서 뉴욕곰탕을 운영했던 김유봉·김송현 사장 부부가 느닷없이 현대차 광고 모델(?)로 데뷔했기 때문. 2013년 11월 업소 문을 닫고 은퇴한 후 소식이 뜸하던 그가 갑자기 한인들의 화제 중심에 떠오른 것이다.
뜨거운 김이 무럭무럭 솟아나는 맛있는 곰탕 한 그릇으로 한인들의 향수를 달래주고 새해 설날이면 무료 떡국 잔치를 열어 타국 땅에서의 고단한 삶을 위로해 주던 뉴욕곰탕집 김유봉 사장. 자체 생산한 곰탕 캔을 한국 유수의 백화점에 수출한 기업가, 뉴욕 한식당의 목소리를 대변하는 32가 코리아타운번영회 회장, 미동부 한식세계화추진위원회 이사 등 다양한 이력을 지닌 그가 일흔의 나이에 느닷없이 대륙횡단을 마치고 돌아왔다고 동포 사회에 알리고 나선 이유가 궁금했다.




대륙횡단 자동차 여행
맨해튼 32스트리트 한인 타운 한복판에 자리 잡고 명성을 날리다가 지난 2013년 문을 닫은 뉴욕곰탕. 김유봉 사장이 현업에서 물러나 은퇴하기까지 34년간 구수한 곰탕 한 그릇으로 한인들에게 엄마의 손맛을 전해온 생업의 터전이었다.
또 뉴저지 한소망교회에서 봉사하는 김유봉 장로는 사업과 인생을 지탱해 온 근간은 신앙의 힘이었다고 말한다. 교회의 성전 건축 헌금에 사재를 아끼지 않은 신앙인으로도 널리 알려져 있다. 신앙의 힘으로 기반을 일구고 사업을 키우고 이런저런 단체의 직무를 맡으며 세상에 이름을 알리며 만족해 하는 사람들은 어디에나 있는 법. 그러나 은퇴 후 소박하게 신앙 생활에 몰두하던 칠순의 그가 부부 동반으로 무작정 대륙횡단 자동차 여행을 떠난 것은 너무나 의외의 일이 아닐 수 없었다.

-중앙일보에 실린 산타페 광고는 어떻게 나온 건가.

“이번 여름에 집사람과 함께 49일 동안 미 대륙과 캐나다 일부 지역을 직접 운전하며 1만3500마일에 달하는 여행을 마쳤어요. 현대 산타페를 몰고 다녔는데 이번 여행길을 안전하고 만족스럽게 마치게 해준 데 대한 보답으로 하는 감사 인사라고 할 수 있겠죠. 내가 직접 광고를 디자인하고 문구도 직접 썼어요.”

-‘확신의 마음으로 감사하여…’라는 문구는 무슨 뜻인지.
“한국 사람으로서 한국 차에 대한 불신 같은 게 있었는데 이번 여행에서 산타페를 직접 운전해 보고 대단히 만족스러웠다. 1980년대에 현대 엑셀이 처음 미국 시장에 출시됐을 때 곧장 한 대 구입했었는데, 겉모습은 한국 차가 분명한데 일부 부품이 일제인 걸 알고 나서 크게 실망한 경험이 있거든요. 제네시스도 잘 만든 차라는 걸 알지만 운전해 보진 않아 그리 미덥지 못하던 차에 이번에 산타페를 직접 타 보고 뛰어난 성능에 더 기뻤던 것 같습니다.”

-고령에 먼 길 떠나기가 쉽지 않았을 텐데.
“내가 수술을 해서 허리가 별로 좋지 않은 편이에요. 평소에도 장시간 운전은 잘 안 하죠. 이번에 여러 은혜 가운데 집사람과 함께 무사히 여행을 마치게 되어 기쁘답니다.”

-대륙횡단 여행을 떠나게 된 계기는.
“사실 이런 일은 그냥 하고 싶다고 할 수 있는 게 아니지 않나요. 여러 여건이 성숙되어야 할 수 있는데, 하나님이 나를 선택해서 지금까지 이끌어 주신 것처럼 이번 여행길도 인도하신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애초 여행을 떠나기로 결심한 이유는 매년 할애비 집에 와서 재미있게 지내던 손녀딸들이 이번 여름에 한국 여행을 갔기 때문이라 할 수 있는데, 애들이 여기 없으니 갑자기 올여름에는 할 일이 없어져 허전해진 거지.”

-부인이 말리지 않았나.
“여행을 부부 동반으로 다녀 오니까 부부애도 살아나고 좋은 일이 많아요. 부부 둘밖에 없는 상황이라 서로 돕고 위해 주고 하니까…. 그동안 사업 하느라 사회활동 하느라 가정에 소홀했던 것도 보상하는 기분이고. 서로 도와가면서 여행해야 하니까 아주 좋아요. 친구들에게도 한번 도전해 보라고 말하고 다니죠.”

-그런데 어떻게 해서 산타페를 타고 떠난 건지 궁금하다. 더 좋은 차도 탈 수 있는 재력이 되는데.
“올여름에 여행을 떠날 계획으로 일제 차를 한 대 구입했었죠. 그런데 집사람이 몰고 다니다가 접촉 사고를 냈는데, 이걸 수리하려면 6월 15일 출발하려던 날짜에 맞출 수 없는 상황이 된 겁니다. 아, 여행 가지 말라는 뜻인가 보다 하고 마음을 다 내려놨어. 그런데 우리 교회 장로님이 바디샵을 하는데, 여기 맡겨서 빨리 수리해 달라고 했더니 도저히 시간을 맞출 수 없다면서 차를 한 대 렌트해 주겠다고 하더라고.”

현대 산타페에 반하다
내심 BMW나 벤츠 같은 고급 승용차를 기대하며 렌터카를 보러 간 그에게 바디샵 사장은 현대 산타페를 권했다. 그래도 실망한 마음을 내색할 수 없어 이리저리 차를 조사하던 그는 의자를 젖히고 뒤로 누워서 차가 얼마나 편안한지 체크해 봤다고.
“아, 그런데 이게 내 키에 딱 맞는 거야. 차 안에서 누워도 널찍하더라고. 나중에 급할 땐 차 안에서 자도 되겠다 싶어서 그냥 산타페로 하기로 하고 6월 26일 그대로 출발했죠.”

-현대차에서 무슨 연락 같은 건 없었나.
“현대차 광고 에이전시에서 편지를 보내 왔어요. 누가 얘기해 줘서 내 광고를 봤는데 깜짝 놀랐다고. 내가 직접 디자인했다고 했더니 ‘두 손 다 들었습니다’ 그러더라고. 원래 식당 장사 오래 하다 보니까 광고를 재미있게 해서 손님들 시선을 끌려고 노력했는데, 몇 개는 제법 화제거리가 되기도 했거든. 80년대에는 국제 항공우편 봉투 디자인을 이용해서 한국에 있는 어머니가 뉴욕에 사는 아들에게 곰탕을 권하는 광고를 낸 적 있어요. ‘외국에서 고생하고 있는 아들에게. 아들아, 곰탕은 한국 고유의 전통음식으로 영양가가 높고 맛도 아주 좋단다. 뉴욕곰탕에 가서 맛있게 먹고 건강하게 지내라.’ 이런 식으로.”

반짝이는 아이디어로 식당 운영을 하던 그의 특기가 이번 현대차 광고에서도 빛을 발한 셈이었다.

미국으로 가자!
1947년생, 아직 철이 채 들기 전 6·25를 겪었고 보릿고개에 배를 곪던 시절을 겪었을 김 장로. 그는 어떻게 정든 고향을 떠나게 되었을까.

-미국에 오게 된 동기는.
“경기도 여주가 내 고향인데 우리 사촌들이 잘 살았어요. 사촌형이 대학을 나와 여행업을 하셨고, 돌아가신 매형은 1935년생으로 5·16 멤버였는데 75년에 일본 유학을 다녀오시더니 ‘유봉아, 일본 한번 가 볼래’ 하시는 거라. 그래서 군대에서 제대하고 직장 생활을 막 시작했던 28살 때 일본 오사카에 가게 됐지. 그때 우리나라는 서울 지하철 1호선이 막 개통했는데 오사카 거리는 전철이고 네온사인이고 정신 없이 번쩍거리고 붐비더라고. 거기서 교포 여성 만나 결혼하고 정착하려고 했는데, 직업도 없고 돈도 없는 처지라 번번이 퇴짜를 맞았죠. 비자 기한이 6개월이어서 다시 한국에 돌아왔는데 이제 한국서 못살겠다는 생각뿐이더라고.”

‘외국 바람’이 든 그는 그때부터 미국에 갈 꿈을 꾸기 시작했다. 시골 농사 짓는 집안, 7남매의 장남인 그는 당시 관습대로라면 아버지 따라 농사 짓는 게 당연했지만 일제 시대 때 교편 생활을 했던 어머니는 그의 그런 꿈을 이해해 주셨다고.

-미국 비자는 어떻게 받았나.
“어머니한테 일본어는 배워서 좀 할 줄 알았지만 영어는 할 줄 모르니까… 소니 녹음기 하나 사서 영어 선생한테 영사 인터뷰 하는 내용 녹음해 달라고 해서 연습했지. 대사관에 가서 인터뷰 하는데 처음에는 잘 됐어. 그런데 네 번째 질문이 모르는 게 나왔는데 연습을 안 한 거야. 나중에 알고 보니 ‘애비뉴가 뭐냐’고 물어본 건데... 네브라스카 오마하에 가서 호텔에 머물 겁니다, 이렇게 동문서답을 했던 거지. 영사가 서류를 휙 던지면서 나가라고 하더라고.”

첫 번째 비자 인터뷰가 실패하고 전전긍긍하던 그는 기가 막힌 아이디어를 떠올렸다. 신문에서 읽었던 사연이었다. 파독 한인 광부가 미국 대사에게 편지를 써서 LA에 무사히 입국한 일, 미국 소년이 냉전 시절임에도 모스크바 당국에 편지를 써서 초청 받아 소련을 방문한 일. 두 가지 사건의 공통점을 바로 ‘편지’였던 것.

두 번째 비자 인터뷰 때 그는 정성 들여 쓴 편지를 번역한 후 비자 신청서와 함께 내밀었다. 당시 한국은 경제개발 5개년 계획이 진행되고 있어 여기에 맞추어 미국에서 배울 기회를 달라고 썼다고. 일본을 다녀온 출입국 증명서까지 미리 준비해 간 덕분에 영사도 비자 스탬프를 흔쾌히 찍어 주었다. 마침내 미국으로 가는 길이 열린 것이다.

뉴욕곰탕의 탄생
여행업 하는 형님이 예전에 비자 발급을 도와준 친지가 버지니아에 살고 있어서 일단 그곳으로 향했다. 알링턴에 머무르는 동안 한국에서 온 총각이라고 소문이 나서 중매가 여럿 들어왔지만 신분도 없고 영주권도 없는데다 직업도 없는 처지라 모두 거절당하고 결국 뉴욕으로 올라오게 된 처지. 1976년 2월 꽁꽁 얼어붙은 겨울날, 그는 그레이하운드 고속버스를 타고 뉴욕으로 향했다. 겨우 일자리를 얻은 게 5월, 영주권 스폰서를 해준다는 식당에서 주급 90불을 받으며 접시를 닦는 일이었다.

“그때 맨해튼에는 한식당이라곤 아리랑, 호심, 삼복 세 곳뿐이었어. 내가 일한 호심 식당 주방장이 노덕수씨라고, 플러싱 세계박람회 때 한국관 주방장을 하셨던 분이셨어. 실력이 대단하신 분인데, 그분 밑에서 일을 하는데 실수도 하고 티격태격 대들기도 하면서 일을 배웠지.”

그러는 동안 성실히 일하며 능력을 인정받아 부주방장으로 승진했다. 매사에 최선을 다하는 그를 눈여겨 본 이의 소개로 부인 방송현씨를 만나 그해 결혼에도 골인, 신분 문제도 해결돼 안심하고 생업에 종사할 수 있게 됐다. 이어 1979년에는 27스트리트의 단칸 가게 하나를 1만불에 인수해서 테이블 3개짜리 초미니 곰탕집을 열고 부인과 함께 4년여 밤낮 없이 일했다.

“내가 뉴욕에 처음 왔을 때는 한인 교포들이 4000명 정도였어요. 한식당 세 곳 하고 46가에 조그만 수퍼마켓 하나가 전부였으니 지금과는 천양지차. 그때는 조그만 가게 안에 곰탕 가마를 걸어 놓고 화씨 90도가 넘는 열기와 싸우며 죽고 살기로 일했죠.”

1982년에는 인파가 더 붐비는 32스트리트로 자리를 옮겨 이전 기념으로 ‘뉴욕’을 상호에 덧붙여 ‘뉴욕곰탕’ 문을 열었다. 뜨거운 김이 모락모록 솟아나는 뽀얀 곰탕 국물에 하얀 쌀밥 한 그릇이면 세상 부러울 게 없던 시절. 가난한 유학생도, 지상사 주재원도 모두 그의 단골이었다. 하루 24시간 영업을 하는 곰탕집은 늘 사람들로 북적였다.

32스트리트로 옮긴 이후에는 곰탕의 인기가 하늘로 치솟아 1997년 USDA 허가를 받아 브루클린에 곰탕 캔 공장을 세우고 한국 유명 백화점에 수출까지 했다. 그야말로 곰탕 하나로 우뚝 일어선 셈이다.

성공한 인생이란
“제가 그동안 살아온 걸 되돌아보면 내가 살아온 길이 성경 속에 다 있는 것 같아요. 1976년에 결혼하면서 집사람을 따라 교회를 나가게 됐는데, 사업이 잘 되면 믿음이 오히려 떨어지는 것 같더라고요. 지금 아들 하나, 딸 둘에 손주가 7명 있는데 우리 연배에 이렇게 자손 많은 사람 드물죠. 나름 성공한 인생을 살았다고 여기고 감사하게 생각하고 있습니다.”

이 대목에서 그는 ‘성공’의 의미를 되짚으며 ‘지금 이 자리에서 최선을 다하며, 남에게 유익을 주고, 하나님이 원하는 일을 하는 것’이 성공이라고 강조했다.

“사람들은 누구나 성공하고 싶어하죠. 일반적으로 성공이라 하면 부귀영화, 출세, 돈 많이 벌고, 이런 걸 생각하는데 내 생각에는 자기 인생을 자기 페이스대로 잘 살아가는 게 성공이다 싶어요. 제가 식당을 할 때 두부를 대주는 중국 사람이 있었는데 두부 한 통에 5불이니까 5불, 10불 때문에 매일 아침 우리 식당에 오는 셈이죠. 한 10년 가까이 배달해 주던 이 사람이 어느 날 은퇴한다고 하는 겁니다. 오, 그러냐고, 그때는 대수롭지 않게 대꾸하고 말았는데 내가 이 나이가 되고 보니까 그 사람이 성공한 사람 같더라고요. 성공은 높고 크고 화려한 것이 아니더란 말입니다.”


김일곤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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