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야전군 수뇌부 임지 싹 바꿨다, 마오 능가 시진핑

마오 "권력은 총구서 나온다"
"군구 사령관 한 곳 오래 문제"
1973년에 8개 사령관 맞교대

"권력은 총구에서 나온다"는 지론대로 마오쩌둥(毛澤東)은 군 인사를 대단히 중시했다. 1973년 어느날 마오가 덩샤오핑(鄧小平)과 찻잔을 사이에 두고 함께 앉았다. 문화대혁명의 소용돌이 속에서 주자파(走資派.자본주의 신봉자)로 몰려 실각한 뒤 지방에서 3년 4개월간 노동자 생활을 하던 덩을 다시 불러 올려 부총리로 복귀시킨 지 얼마 되지 않은 때였다.

마오가 덩에게 물었다. "군구(軍區) 사령관들을 한 곳에 오래 놔 두다 보면 반드시 문제가 생긴다. 어떻게 해결하면 좋을까?" 덩은 한동안 말이 없더니 자신의 찻잔과 마오의 찻잔 위치를 서로 바꿔 놓는 것으로 대답을 대신했다. 마오는 만족스런 표정으로 이렇게 말했다. "자고로 영웅은 생각하는 게 비슷한 법이다."

그 뒤 마오는 인민해방군의 수뇌부 인사를 전격 단행했다. 당시 중국 대륙의 11대 군구 가운데 우루무치 등 변경 3군데를 제외한 8곳의 군구 사령관을 현 임지에서 멀리 떨어진 군구의 사령관과 서로 맞교대시킨 것이다. 가령, 동남부의 푸저우(福州)군구사령관과 서북부 란저우(蘭州)사령관을 맞바꾼 식이다. 그러면서 "10일 이내 새 임지로 도착하라. 새 임지로 데려갈 수 있는 사람은 비서 한 사람뿐이다"고 통지했다. '팔대 사령관 맞교대(對調八大司令)'란 용어로 지금도 중국 군에서 회자되는 유명한 일화다.

1976년 사망한 마오가 되살아나 시진핑(習近平) 주석의 용병술을 본다면 다시 한 번 "영웅은 생각이 같다"라고 되뇌일지 모른다. 마오의 군 인사 스타일을 그대로 본뜬 '헤쳐 모여!' 인사를 시 주석이 부활시켜 군 장악력을 높이는 데 적극 활용하고 있기 때문이다. 시 주석은 최근 13개 집단군(군단급)의 지휘관인 군장(軍長)과 정치위원 전원의 임지를 이동 발령했다. 집단군이 군구보다 한 단계 낮은 단위임을 고려하면 시 주석이 마오보다 한술 더 떴다고 볼 수 있다. 홍콩 군사평론가 량궈량(梁國梁)은 "집단군 군장과 정치위원 26명 가운데 기존 자리를 그대로 유지한 사람은 아무도 없다"고 말했다. 앞서 시 주석은 지난 4월 18개이던 집단군을 13개로 줄이는 편제 개편을 단행했었다.

시 주석의 '마오 스타일' 인사는 이번이 처음이 아니다. 지난해 2월 중국 대륙이 7대 군구로 나뉘어져 있던 것을 5대 전구(戰區) 체제로 재편하면서 단행한 인사에서도 5대 전구의 사령관 및 정치위원 전원을 기존 임지와 뚝 떨어진 새 임지로 보냈다.

시 주석은 이처럼 야전군 수뇌부의 임지를 한꺼번에 바꾸는 인사를 통해 군에 대한 장악력을 더욱 공고히 하고 있다. 이와 함께 군 간부들과 해당 지역 실력자들 간의 유착 요인을 제거해 중앙의 통제력을 높이기 위한 목적도 있는 것으로 풀이된다. 전통적으로 중국 지방에 주둔한 군 간부들은 각자의 임지를 바탕으로 한 파벌을 형성해왔다. 이런 지역 기반의 파벌은 부패의 온상이나 마찬가지였다.

부패 혐의로 낙마한 뒤 당국의 조사를 받다 2015년 숨진 쉬차이허우(徐才厚) 전 중앙군사위원회 부주석은 선양(審陽)군구에 오래 근무한 경력을 바탕으로 중국 군부내에 강력한 동북(東北) 파벌을 형성했다. 역시 부패로 낙마한 궈보슝(郭伯雄)은 란저우 군구를 기반으로 서북(西北) 지방에 파벌을 만들었다.

지방의 군구나 집단군이 지방 실력자와 깊은 관계를 맺는 현상도 있었다. 2012년 실각한 보시라이(薄熙來)와 제14집단군의 관계가 대표적이다. 쿤밍(昆明)을 주둔지로 하는 14집단군은 혁명 1세대인 보의 부친 보이보(薄一波) 전 부총리가 창설한 것이나 다름 없는 부대였다. 보시라이는 실각 2개월 전 쿤밍의 14 집단군을 시찰했는데, 이는 자신의 핵심 측근 왕리쥔(王立軍)이 미국 총영사관에 진입해 망명을 시도한 사건으로 정치적 위기에 빠진 것을 만회하려는 최후의 저항이자 시위성 방문으로 여겨졌었다. 시 주석은 4월 집단군 개편을 단행하면서 14 집단군을 없애 버렸다. 궈 전 부주석의 기반인 47 집단군 역시 폐지됐다.

시 주석은 '헤쳐 모여' 인사와는 별도로, 군 간부의 지역 영향력을 축소하기 위한 개혁에도 착수했다. 각 지방에서 터줏대감 노릇을 하던 이른바 '융장(戎裝)상무위원' 의 숫자를 대폭 축소시킨 것이다. '융장'이란 군장(軍裝)의 중국식 표현이다. 융장상무위원이란 현직 군인이 해당 임지에서 성(省).직할시 상무위원을 겸직하는 것을 말한다. 이를 통해 융장 상무위원들은 지역 당.정 업무에도 깊숙이 관여했고 지방 당 서기와 유착관계를 맺기도 했다. 하지만 시 주석은 이 같은 관행에 제동을 걸었다. 현재 전국 31개 직할시.성 가운데 20곳에서 '융장 상무위원'을 내보내고 후임으로는 비(非)군인으로 채우는 정.군(政軍)분리가 실현됐다.

이와 같은 일련의 개혁과 반(反)부패 드라이브를 통해 시 주석의 군부 장악은 날로 확고해졌다. 시 주석의 전임자인 후진타오(胡錦濤) 전 주석은 임기 10년이 끝날 때까지 군부를 완전히 장악하지 못했다는 평가가 정설이다. 반면 시 주석은 집권 초기부터 군부를 휘어잡았다. 이는 시 주석이 군과 권력의 상관관계나 군 내부의 속성을 꿰뚫고 있기 때문에 가능했다.

여기엔 몇 가지 요인이 있다. 우선 자신의 부친인 시중쉰(習仲勳) 전 부총리가 인민해방군에서 잔뼈가 굵은 혁명가 출신이란 점이다. 또 시 주석이 첫 공직 생활을 중앙군사위원회에서 시작했고, 이후 군사위를 떠나 20년 이상 지방에서 당.정 간부로 경력을 쌓는 동안에도 군 직책을 겸임하며 늘 한쪽 발은 군 업무에 걸치고 있었다는 점도 중요한 요인이다.

첫 지방 임지인 허베이성 정딩(正定)현 서기 시절에도 현 무장부 정치위원을 겸임한 것을 비롯, 푸젠(福建).저장(浙江).상하이를 거치는 동안 그의 이력서엔 늘 군 겸직이 따라 붙었다. 이는 다른 공산당 지도자의 이력에선 찾아보기 힘든 것이다. 이를 통해 지방에서부터 인연을 맺은 군 간부는 '태자당', 즉 혁명가 2세 출신 군인과 함께 시 주석이 군 내부에 인맥을 구축하는 바탕이 됐다.

군사전문가 니러슝(倪樂雄)은 "시 주석은 정치권력이 총구에서 나온다고 믿은 중국 혁명 1세대의 자녀로서 군권의 중요성을 인식하고 있다"고 말했다.

예영준 베이징 특파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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