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특별 기고] 인종 갈등에 기름 부은 트럼프
스테판 해거드/UC샌디에이고 석좌교수
미국 정치에서 인종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외국인들은 이해하기 힘들다. 노예제도는 남북전쟁의 근본 원인이었다. 이 전쟁이 끝난 다음에도 '인종 분리 정책'은 지속됐다. 1960년대 민권운동과 사람들의 태도 변화에 힘입어 남과 북은 마지못해 통합과 관용의 길로 접어들었다. 그러다 인종 문제는 1970년대 이후 다시 표면 위로 떠올랐다. 정부의 복지정책과 차별시정조치(affirmative action)에 대해 백인들 불만이 쌓여갔다. 저숙련 백인의 생계는 세계화로 인해 코너에 내몰렸다. 모든 계층에서 의외로 많은 수의 백인들이 자신을 편견과 차별의 희생자라고 여기게 됐다. 하지만 '인종 카드'를 쓰는 것은 정치권에서 금기시됐다. 트럼프의 등장 전까지는 말이다.
지난 대선에서 트럼프는 처음부터 인종 문제를 끄집어냈다. 트럼프의 '미국 우선주의(America First)' 구호를 처음 사용한 세력은 과거 미국의 제2차 세계대전 참전에 반대한 고립주의자들이었다. 그들은 반유대주의·인종주의, 심지어 파시즘을 표방했다. 트럼프는 버락 오바마가 아예 미 국적이 아니라는 주장을 내세워 매체의 관심을 끌기 시작했다. 지지자를 결집한 가장 중요한 원동력은 장벽을 세워 트럼프가 '범죄자들, 강간범들'이라 칭한 이민자가 미국 땅에 발붙이지 못하게 하겠다는 공약이었다.
민주주의가 쇠퇴하고 붕괴할 때에는 사회 세력들이 복합적으로 상호작용하게 마련이다. 하지만 극단주의를 '인증'하는 것은 기회주의적으로 표의 득실 계산을 하는 정치 지도자들이다. 트럼프가 포퓰리스트적인 선거 집회를 열 때 인터넷과 소셜네트워크서비스(SNS)에서는 지하 극우 그룹들이 세력을 넓혀 갔다.
그들은 남부연합에 향수를 품은 남부 사람들, 쿠클럭스클랜(KKK) 같은 오랜 인종주의 그룹, 나치스나 파시즘 심벌에 매력을 느끼는 백인우월주의자들이었다.
트럼프는 이들 그룹을 양지로 끌어냈다. 샬러츠빌에서 행진하기로 한 그들의 결정은 일종의 '커밍아웃' 파티였다. 그들은 미국의 강력한 언론자유 전통을 악용했다. 그들 집회의 목표는 처음부터 도발하는 것이었다. 미국의 정신나간 총기류법 때문에 지하 그룹들은 경찰을 능가하는 양의 총기로 무장하고 집회에 등장했다.
폭력사태가 벌어졌을 때 정치 지도자들은 이들 극우그룹이 그 어떤 의미 있는 정치적 역할을 하지 않을 것이라고 국민을 안심시켰다. 폭력에는 법으로 대응할 것이며, 이들 수치스러운 그룹은 경멸의 대상이라고 비판했다. 공화당·민주당 할 것 없이 대부분의 정치인들은 극우의 발호를 억제하는 편에 섰다.
하지만 트럼프는 모호한 태도를 취했다. 15일 기자회견에서 트럼프는 또다시 양 진영을 비난했다. 샬러츠빌의 극우주의자들에게서 결코 정당한 도덕적 가치를 발견할 수 없었는데도 말이다. 미 대통령은 인종주의 폭력배들을 규탄할 것인가 아니면 그들에 영합할 것인가. 지극히 간단한 문제다.
이번 사태가 장기적으로 미국 사회에 어떤 영향을 끼칠지는 두고봐야 한다. 민주당 사람들은 아직도 대선 패배를 받아들이지 못하는 심리상태다. 그들은 분열한 채 방향감각을 상실했다. 끝없이 씩씩대며 트럼프에게 분노할 뿐이다. 제 기능을 못하는 공화당이 전면에 나설 가능성은 희박하다.
잘못을 바로잡는 데 주도적 역할을 하는 주체는 민간부문인 듯하다. 대기업들은 대통령과 공개적으로 엮이면 골치아플 수 있다는 걸 뒤늦게 깨닫고 트럼프와 거리를 두기 시작했다. 미 전역의 지방정부·교회·시민단체들은 정치적 색깔을 떠나 상식 지키기에 발벗고 나섰다.
나는 낙관론자다. 미국의 다양성과 복원력을 믿는다. 하지만 정치학자로서 낙관만 하기 어렵다. 역사는 민주주의가 늘 제대로 지속되지만은 않다는 사실을 일깨워준다. 충동적인 데다 도덕적·정책적 방향성을 결여한 트럼프는 조금씩 미국을 추락의 길로 끌어내리고 있다. 샬러츠빌은 표류하는 미국을 드러내는 상징적 단면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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