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창호는 공산주의자' 모함 투서 최초 발견
장태한 UC리버사이드 대학 교수
북가주 정부기록보존소서 찾아내
투서 '흥사단도 볼셰비스트 조직
안창호 조속히 추방하라' 내용도
안창호 선생의 세 번째 미국 체류와 추방 과정을 확인하는 귀중한 사료로 평가된다.
9일 장태한 교수에 따르면 1924년 12월 15일 '콩 왕'과 '찰스 홍 이'라는 이름으로 서명한 투서가 노동부 산하 샌프란시스코 이민국에 접수된 것으로 확인됐다. 장 교수는 최초의 한인타운인 리버사이드 파차파 캠프에 집단 이주한 한인들의 입국 경로를 역추적하는 과정에서 북가주 샌브루노(San Bruno) 정부기록보존소에서 우연히 이 문서를 발견했다고 밝혔다. 샌타바버라 시 알링턴호텔 전용 편지지에 총 4장의 영문으로 작성된 이 투서에는 "볼셰비스트(사회주의자) 지도자가 (하와이) 호놀룰루를 거쳐 곧 도착할 예정이니 유심히 지켜봐야 할 것이다. 그 사람 이름은 창호 안(Bolshevist leader your office look out…his coming via Honolulu…The person name is Chang Ho Ahn)"이라고 기재돼 있다.
투서에는 이어 "그는 미국에 여러 해 살았으며 그의 가족은 LA에 거주하고 있다. 그후 중국으로 건너가 6년 체류하면서 볼셰비스트 정부 관계자들과 친분관계를 유지했는데 그가 지금 미국으로 오고 있다(connected with Bolshevist Government…he is coming to U.S now)"라고 이민국 관리에게 경고하는 내용이 쓰여있다. 말미에 "이민국에서 대한인국민회를 특별히 조사하고 그(안창호)를 중국으로 조속히 추방하길 희망한다(best way to sending back to China quite as possible)"라는 문구도 들어있다.
투서에 연명 서명한 '콩 왕(Kong Wong)'과 '찰스 홍 이(Charles Hong Lee)'라는 사람의 신원은 확인되지 않았다. 장 교수는 이민국 자료와 당시 관련 사료를 뒤졌지만 이들의 실체를 파악할 수 없었다고 말했다.
다만, 당시 대한인국민회와 대립 관계에 있던 대한인동지회의 이승만계 추종 세력이 투서를 보냈을 가능성이 있다고 장 교수는 추정했다. 이 투서는 도산 안창호 선생이 1924년 12월 16일 샌프란시스코에 도착하기 하루 전날 접수됐지만 이민국 담당자에게는 미처 전달되지 않아 도산 선생은 당시 미국으로 입국했다.
그러나 이듬해인 1925년 6월 3일 도산 안창호 선생은 시카고 노동부 산하 이민국에서 J.B 브래키 이민국 검사관으로부터 미국 입국 경위와 체류 행적에 대한 조사를 받았다.
장 교수는 당시 검사관과 안창호 선생의 직접 심문 기록을 전문 공개했다. 검사관은 심문에서 안창호 선생에게 '소련 정부 또는 러시아에 관심이 있는가' '강연 내용 중에 미국 정부가 과격하게 바뀌어야 한다고 주장했나' 등의 심문 문항을 제시하며 캐물었다.
이 점에 비춰 도산 선생을 공산주의자로 모함한 투서가 이민국에 접수된 이후 안창호 선생에 대한 심문 파일이 작성됐고 그에 따라 직접 심문이 이뤄진 것으로 추정된다.
1925년 7월 22일 샌프란시스코 엔젤섬 이민국 문서는 안창호 선생에게 8개월 체류 연장을 허가했음을 입증했다. 그러나 미 이민국은 안창호 선생의 체류 연장을 허락하면서도 볼셰비스트인지 여부에 대한 판단을 유보한 채 요주의 인물로 분류한 것으로 보인다고 장 교수는 주장했다.
1926년 2월 6일 엔젤섬 이민국 문서에는 "안창호가 오스트레일리아로 떠나는 배에 타는 것을 확인하라"고 적혀 있다.
또 1926년 2월 23일 이민국 문서에는 "중국인 도산 안창호가 S.S.소노마에 승선한 것을 사진과 함께 확인했다"고 돼 있다. 이민국이 사실상 도산의 강제 추방을 마지막 순간까지 확인했음을 방증하는 자료다.
안창호 선생은 결국 샌프란시스코를 떠나 하와이를 거쳐 호주로 추방됐다. 도산은 하와이에서 6시간 체류하며 감리교회에서 150명의 한인동포를 상대로 연설하고 바로 호주로 떠났다.
이후 안창호 선생은 중국으로 돌아간 뒤 1932년 가족이 있는 미국을 다시 방문할 예정이었으나 윤봉길 의사 훙커우 공원 폭탄 투척 거사 사건으로 일본 경찰에 체포됐고 이후 풀려났다가 1937년 수양동우회사건으로 다시 체포된 뒤 1937년 병보석으로 나왔으나 이듬해 3월 타계했다.
이번 투서를 포함한 사료 발견은 도산 안창호 선생이 미 이민국에 접수된 투서에 의해 공산주의자라는 모함을 받고 요주의 대상으로 조사를 받다가 강제 추방된 과정이 사실이었음을 입증하는 자료를 찾아낸 것이라고 장 교수는 의미를 부여했다.
그동안 안창호 선생의 세 번째 미국 체류 행적(1924~1926년)에 대해서는 방문기간 흥사단과 대한인국민회 동지들을 만나 독립운동 방략을 논의하고 미주 교민들을 규합한 정도로만 기록돼 왔으나 이번 사료 발견에 따라 미 이민국의 조사와 체류연장 서류 처리, 추방 조처 등의 구체적 행적이 드러난 것으로 평가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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