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역별 뉴스를 확인하세요.

많이 본 뉴스

광고닫기

기사공유

  • 페이스북
  • 트위터
  • 카카오톡
  • 카카오스토리
  • 네이버
  • 공유

[테마가 있는 여행속으로]이영묵 스페인 여행기 (상)

미 대륙 식민지의 모든 재화가 몰렸던 세비아
한 때 번영의 흔적 곳곳에, 알카사궁은 유네스코 등재
세계 최대 고딕 스타일 대성당에는 콜럼버스의 유해가

나는 오페라 중에서 비제의 카르멘이 최고라고 생각한다. 당시의 오페라는 대부분 비극으로 끝나는 것이 정석처럼 여겨졌다. 카르멘 역시 스토리는 비극으로 끝나지만, 처음부터 끝까지 분위기가 도저히 비극인 것 같지 않다. 집시 카르멘의 춤과 노래는 압권이다. 이 카르멘의 무대가 세비아(Sevilla)이다. 돈이 넘쳐 나는 번창하는 도시, 독점적인 담배 제조, 몰려든 집시들, 투우, 산적…. 스페인이 식민지에서 걷어 들이는 모든 재화는 과달카비르(Guadalquivir) 강가에 있는 세비아로 모였다. 콜럼버스가 신 대륙으로 산타마리아호를 타고 바로 이곳에서 떠난 이후, 미 대륙 식민지에서 가져오는 모든 재화는 역시 이곳에서 하역을 하였다. 당시의 번영이 짐작이 간다.

첫 번째로 방문한 곳이 아라곤 국가의 항구(Puerta de Aragon)라고 이름 붙혀진 커다란 건물이었다. 스페인에서 세비아의 영광이 마드리드로 옮겨지려 하자, 다시 번영을 찾고자 1929년 만국박람회를 열었다. 각 지역마다 그 지역의 특성을 알리는 노천 전시 장치(booth)를 해 놓았는데, 예를 들면 바르셀로나는 아메리칸 인디언이 곡물을 바치는 벽화로 세계를 상대로 무역을 했다고 알렸고, 카디스는 첫 의회를 진행하는 그림으로 최초로 의회를 시작한 곳임을 홍보했다. 1929년 일차 박람회로 재미를 못 봐서, 1992년 콜럼버스 미 대륙 발견 500주년 행사로 칠레, 아르헨티나 같은 미 대륙의 나라에게 독립된 파빌리온(Pavilion)을 짓게 하면서 다시 한 번 시도 했지만 역시 결과는 그저 그랬다.

박람회장에서 나와서 콜럼버스 동상과 메이플라워 배가 조각되어 있는 콜럼버스 공원을 거쳐서 대성당( Holy Catherdral of Seville)으로 향했다. 이 성당은 처음 1184년 이슬람 모스크와 미나렛(Minaret)으로 시작 되었으나 그 후 성당으로 고치고 확장하였다. 총 면적이 제곱미터로, 고딕 스타일로 된 성당 중에서 세계에서 제일 크다. 300킬로그램의 금이 들어갔다. 우연이라고 할까 100 년 공사로 1502년 완공 되었는데, 그 해가 콜럼버스가 사망한 해이다. 콜럼버스 유해의 일부가 지구상에서 돌고 돌아 지금 이 성당 안에 안치되어 있다. 역사에서 밝히는 바로는 그가 발라돌리드에서 사망한 뒤 세비아로, 세비아에서 그의 유언에 따라 유해는 도미니카 공화국으로 보내졌다. 그 후 쿠바로 왔다갔다 하다가 도미니카의 주교가 뼈의 일부를 세비아로 보냈다는 것이다. 그의 유해가 잠든 관과 관을 떠받치는 조각상을 보았다. 엄청난 규모의 대성당이라 볼 것이 너무 많아 꽤나 시간을 보낸 후 바리오 산타 크르즈( Barrio Santa cruz) 라고 불리는 유태인 지역으로 갔다.

가는 길에 흥미로운 곳을 지나갔다. 그냥 보기에 직사각형의 작은 공원으로 주변에 벤치가 보였다. 그러나 이곳은 한국으로 치면 마당극장 같은 공연장이었다. 중세기 담배 제조는 돈을 쓸어 모으는 정부의 독점사업이었다. 머릿속에서 한 장면이 지나갔다. 돈이 흥청망청한 이곳에 뛰어든 집시 무리 중 요염한 카르멘이 군인 호세를 꼬시려고 요염한 춤과 함께 그 유명한 곡 하바네라를 부르는 모습이다. 아마도 마당 극장 같은 이곳이 무대였으리라 상상된다.



드디어 좁은 길로 된 유태인 지역에 도착했다. 첫 눈에 커다란 건물이 보인다. 생의 마감을 평화스럽게 해주려고 운영했다는 호스피스 건물이다. 유태인들이 이곳 세비아에서 그 정도로 생의 여유가 있었다는 말이다. 사실 스페인에서는 유대인들이 독일, 프랑스, 이태리, 러시아 같은 곳에과 달리 학대나 멸시를 받지 않고 살았다. 이곳 유태인들은 종교적 이유로 기독교인이나 이슬람 교인들이 하지 않는 소위 돈 빌려주고 이자를 받는 사채업을 하였다.

그런데 지방정권은 이를 묵인하였다. 그들로부터 세금을 걷어들일 세원 포착의 도움을 받기 때문이었다. 또 무어인을 몰아낼 때 군자금을 꾸어서 전쟁을 수행할 수 있었기도 했다. 게다가 스페인이 전 세계 식민지에서 향료, 도자기, 비단 등 보화와 상품을 들여 올 때에 환전상으로 재미를 보았지만 서민들 주머니를 쥐어짠 것이 아니어서 그리 미움의 대상이 아니었다.

세비아 방문 첫날 너무 무리하게 강행군을 해서 좀 피곤한 듯 했다. 그래서 다음 날 좀 한가하게 시간을 보내겠다고 하면서 알카사 궁(Real Alcaza)를 찾았다. 무어인들이 세운 이슬람 사원으로 시작되었으나, 그 후 안달루샤의 왕궁으로, 그리고 스페인 통합의 카스티안(Castillian) 왕국의 궁으로 이어 왔다. 통행이 금지된 왕궁 한쪽 구역에 아직도 왕손들이 살고 있다고 한다. 유네스코에 등재된 유럽에서 잘 알려진 왕궁이다. 나는 잘 정돈된 된 정원에서 모처럼 휴식을 했다.

이어서 과달카비르 강 유람선을 탔다. 유럽의 새로운 역사는 이 강에서 미 대륙으로 그리고 아시아로 떠나는 것으로 시작되었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이제는 왕래하는 배도 별로 없었고, 내가 탄 배 안에도 별로 사람이 없었다. 그저 젊은 연인 몇이서 은밀히 사랑을 즐기는 듯 했고, 강에서 바라다 본 시가 또한 조용했다. 세비아는 확실히 과거를 먹고 사는 도시가 된 듯하다. (계속)


이영묵 / 소설가



Log in to Twitter or Facebook account to connect
with the Korea JoongAng Daily
help-image Social comment?
lock icon

To write comments, please log in to one of the accounts.

Standards Board Policy (0/250자)


많이 본 뉴스





실시간 뉴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