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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인국민회가 한인사회의 정부기관 역할해

육성으로 듣는 미주 한인 초기 이민사:외로운 여정(67)
미주 한인 역사개관(하)

앤젤 섬 입국 6명 한인들
대한인국민회 노력으로
일본 국적 거부해 첫 인정
제2시기(1903~1924) (2)


(66화에서 계속) 초기 한인사회, 한인 역사에서 특히 캘리포니아 주의 리버사이드는 매우 중요한 곳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연구자들에게 소외를 받아왔는데, 최근, 이선주를 비롯한 기타 논문에서 "리버사이드는 특히 도산 안창호 선생과 매우 밀접한 관계가 있다"는 사실을 구체적으로 밝히고 있다.

도산 안창호는 1904년 리버사이드에 한인 집단 거주 지역을 형성하여 한인들에게 직업을 알선해주고 영어도 가르치며 예배도 함께 보는 '미 본토 최초의 한인 타운'을 만드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는 것이다. 또한 리버사이드에 거주하면서 한인 공립협회를 발기했고 본국과 연계하는 민족운동 단체로 발족한 대한신민회도 리버사이드에서 발기되었다. 이에 2001년 8월 12일, 리버사이드시에 도산 안창호 동상 제막식이 성대히 거행되기도 했다. 미주 한인사회가 동상 건립을 위해 기금을 모금하고(위원장 홍명기) 리버사이드시가 시청 앞 광장을 제공했는데, 리버사이드시 시청 앞에는 마틴 루터 킹 목사, 안창호, 마하트마 간디 동상이 서 있다.

또 1913년 6월 25일에는 리버사이드의 헤밋밸리(Hemet Valley)라는 농촌에서 한인 노동자들이 백인 폭도들에 의해 강제 추방당하는 사건이 발생했다. 농장에 일하러 왔던 한인들을 백인들이 일본인으로 오해하고 강제 추방시켰다. 이에 일본 영사관이 미주 한인들은 일본 식민 시민이므로 한인들을 위해 항의하겠다고 나서자, 미주 한인들은 자신들은 일본인이 아니라며 일본 영사관의 보호를 단호하게 거절했다. 당시 이대위 대한인국민회 회장은 미국 국무 장관 윌리엄 브라얀에게 전보를 보내 "헤밋밸리 사건에 일본 영사관이 개입하는 것은 불법이며 이 문제에 대해 한인사회와 직접 대화로 해결해줄 것을 요청"을 했다. 한마디로 미주 한인들은 일본 정부의 통제하에 있기를 거부한다는 편지였다.



이에 1913년 7월 2일, 브라얀 국무장관은 AP통신을 통해 "미국에 거주하는 한국인들은 일본 정부의 통제를 받지 않으며, 따라서 미국 정부는 미주 한인에 대한 문제에 대해 대한인국민회와 직접 대화로 풀 것"이라고 공식적으로 밝혔다. 미국 정부는 미주 한인에 대한 일본 정부의 간섭과 통제를 인정하지 않음으로써 대한인국민회는 미국 정부가 공인한 미주 한인사회의 대표 기관 역할을 담당하게 된 것이다.

또 1913년 7월 9일에는 여섯 명의 젊은 한인 청년들이 일본 국적을 거부한 사건이 있었다. 그들은 상해에서 몽골리아 선박을 타고 샌프란시스코에 도착했는데 여권도 소지하지 않았고 학생이라는 신분증도 없었다. 그러나 그들은 자신들이 일본 국적이 아님을 주장하면서 미국 입국을 요구했다. 당시 미국은 동양인 이민을 억제할 목적으로 앤젤 섬에 이민 검사소를 설치하고 모든 동양인 입국자들에 대한 철저한 조사를 실시했었다. 뉴욕의 자유의 여신상이 있는 엘리스 섬은 미국이 지향하는 자유와 평등의 상징이지만, 실상 앤젤 섬은 자유와 평등을 역행하는 검문과 억압, 이민 억제를 상징한다.

20세기 초, 약 1000여 명의 한인들이 앤젤 섬의 검문을 통과해서 미국에 입국할 수 있었는데, 여권과 학생증을 소지하지 않은 여섯 명의 젊은 한인들은 당시 동양인 이민 억제를 실시한 미국 이민법의 시범 케이스가 되었다. 대한인국민회의 노력으로 한인들의 미국 입국이 허락되었고 미주 한인들은 일본 정부의 직접적인 통제에서 벗어나 독립운동에 전념할 수 있게 되었던 것이다.

또 미국 사회뿐 아니라 세계 평화에 기여한 한인 2세들도 많이 있다. 그중 가장 중요한 인물을 꼽자면 김영옥 대령이다. 2차 세계대전과 한국전쟁에서의 전설적인 영웅, 그리고 약자들을 대변하는 데에 평생을 바친 인도주의자인 김영옥은 한국, 프랑스, 이탈리아 정부로부터 최고무공훈장을 받은 유일한 인물 이다. 아이러니컬하게도 한국계인 김영옥은 2차 세계대전에서 일본계 미국인으로 구성된 미 육군 100대대/442연대에 배치되어 1943~45년까지 유럽 전선에서 맹활약을 펼쳤는데, 특히 로마 해방과 피사 탈환의 결정적 역할을 담당했다. 그 후, 탁월한 리더십으로 일본계 미국인 병사들마저 그를 믿고 존경하게 되었을 뿐만 아니라 한국전쟁에도 자원해 커다란 무공을 세웠고, 한편으로는 전쟁고아들을 돌보았다. 김영옥의 인도주의적 삶은 1972년 은퇴 후 더욱 본격적으로 시작되었는데, 그는 정치에 입문하라는 유혹도 뿌리친채 봉사 활동에만 전념했다.

그의 봉사 활동은 청소년 교육, 노약자 및 여성 보호, 가족 의료에 관한 사업, 문화, 민족, 예술 분야까지 다양하며 한인 동포 사회 는 물론 미국 사회에도 많은 영향을 끼쳤다. 오프레드, 안수전, 박존 등 많은 한인 청년들이 2차 세계대전에 참전하여 훈장을 포상받았는데 그들은 대부분 조국의 독립을 쟁취하기 위해서 미군에 입대했다.

또 다른 한인 2세들 가운데, 1948년과 1952년 올림픽 다이빙에서 금메달을 획득하여 2연패에 성공한 이새미 박사를 빼놓을 수 없을 것이다. 또 LA의 일본 빌리지를 설계하고 운영했던 건축가 현 데이비드, 안창호 선생의 장남 안필립은 아시안계 영화배우로는 최초로 할리우드 불러바드에 별을 달았으며, 송알프레드는 아시안계 최초의 주요 정치가(캘리포니아 주 상원의원)로 활약했다.

제3시기(1950~1964)

한국전쟁(1950~1953)은 한국인들에게 엄청난 영향을 끼쳤다. 1950년에 발발한 한국전쟁은 인명피해만 해도 남한측 사망자 약 45만 명, 미군 사망자 3만3000명(행방불명자 약 7000명 포함)에 달할 정도였으며, 수많은 이산가족을 양산했다. 이들 중 대다수가 아직도 서로의 생사를 알지 못한 채 뿔뿔이 흩어져 살고 있는데, 한국전쟁은 한국인들뿐만 아니라 미주 한인 사회에도 직접적인 영향을 끼쳤다. 한국전쟁 발발 직후 미국의 이민법이 개정돼, 그동안 중단됐던 한인 이민이 다시 시작될 수 있었던 것이다. 그에 따라 한국전쟁 직후, 한인 이민 인구는 40%나 늘어나게 됐다. 1950년 한국전쟁이 발발했을 당시 미주 한인 인구는 약 1만 7000명으로 추산되는데, 한국전쟁 직후인 1950~1964년 사이에 약 6000명의 한인 여성들이 미군과의 결혼을 통해 미국으로 이주했던 것이다. 또 1965년 이민법 개정 이후에는 한인 이주민들의 초청으로 미국으로 이민을 오게 된 사람들이 늘어났는데, 한 연구에 의하면 초청 이민의 거의 과반수가 미군과 결혼하여 온 여성들의 친지 가족들로 추산하고 있다. 또한 1951년 제 정된 피란민법으로 약 5000명의 고아들과 난민들이 미국으로 이주해 올 수 있었다. 전쟁고아와 미군과 결혼한 한인 여성들이 당시 미국 이민의 2/3를 차지 했으며, 약 6000명의 한인 학생들이 미국 대학으로 유학을 왔다.

제4시기(1965~현재)

1965년 미국 이민법 개정 이후, 미주 한인 사회도 급성장을 했다. 먼저 미주 한인 인구의 급증을 들 수 있는데, 1970년 연방정부 통계에 의하면 미주 한인의 인구는 불과 7만 명이 채 안 됐다. 1970년 6만 9130명에서 2000년 17만 6872명(혼혈 포함하면 122만 8000명)으로 늘어났던 것이다. 그 가운데 특히 1965년 이후의 한인 이민자들은 '신도시 이민자'로 잘 알려져있다. '신도시 이민자'란 이들 대부분이 중산층이며, 도시 근로자로, 전문직 출신이기 때문에 생긴 용어로, 1960년대와 1970년대 한국 경제가 급변하면서 전문직에 종사하는 한국인들이 한국에서 직업을 찾기 힘들게 되자 미주 지역으로의 이주가 급증한 것이었다. 이에 따라 1970년대와 1980년대초 한인 이민자들은 고학력의 고급 인력이 중심이었다.

이처럼 현재 재미 한인 사회를 구성하고 있는 한인들은 대한민국을 고국으로 공유하고 있음에도 일반적으로 알려진 것처럼 동질사회가 아니며 언어, 태생지, 세대, 자아의식, 계층별로 나뉘어져 있다. 언어 사용 차원에서 보면 크게 세 부류로 구분된다. 한국어권의 이민자 1세대는 80.7%가 한국어 를 주로 사용하고, 1.5세는 이중언어를 구사한다. 그리고 한국어와 한국 문화를 배우는 2세들이 증가하고 있긴 하지만, 대부분의 2세들은 영어를 구사한 다(80.3%). 또, 직업 분포를 살펴보아도 차이가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직업이 있는 16세 이상 한인들 중 43.6%는 매니저 또는 전문직에 종사하고 있으 며, 14.6%는 서비스 업종에 종사하고 세일즈와 오피스 종사자가 28.9%이다. 따라서 재미 한인 사회는 세대, 자아의식, 언어, 또 계층 간의 격차가 상당히 크다는 것을 직시할 필요가 있다. 한편, 재미 한인 여성들 중 50.8%가 직장을 가지고 있으며 오랜 시간 일하는 것으로 나타났다. 직업을 갖고 있는 재미 한인 여성들의 80%는 정규 직장에서 일하고 있으며, 평균 노동시간은 주 51시간이다.

1965년 이민법 개정 이전의 한인 사회, 마이너리티 중의 마이너리티, 보이지 않는 소수민족, 나라가 없는 민족으로서 외롭고, 소외되고, 차별을 당하면서도 독립운동에 전념하며 역경을 이겨낸 자랑스러운 미주 한인의 스토리였다. 그들의 발자취를 더듬어보며 우리가 잊고 있던 우리의 역사를 우리 손으로 세우는 소중한 기회가 됐기를 바란다.

장태한(UC 리버사이드 교수.김영옥 재미동포연구소 소장)


정리= 장병희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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