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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삶의 향기] 상상계, 상징계, 실재계

정 여 울 / 작가

남들이 아무리 말려도 왠지 나는 잘해낼 수 있을 것 같을 때가 있다. 눈에 띄는 결정적인 증거를 댈 수는 없지만, 내 마음 깊은 곳에서 '이건 내가 진정으로 원하는 것이고, 오랫동안 준비해온 거잖아'라고 속삭이는 무엇이 있다. 내 생애 첫 번째 책을 낼 때가 그랬고, 모두가 '이제 문학은 전망이 별로다'라며 뜯어말릴 때 국문학을 전공으로 택할 때도 그랬고, '작가로 살고 싶다'는 결심을 했을 때도 그랬다. '그것이 바로 나'이기 때문에, 자신을 부정하고는 하루도 제대로 살 수 없기 때문이었다.

'너는 잘해낼 수 없을 거야, 그래 가지고 뭐가 되겠니'라는 의심의 목소리가 나를 괴롭혔다. 저 봉우리를 넘기만 하면 자유가 보일 텐데, 넘기 전에는 어떤 전망도 보이지 않는다. 하지만 그 고통을 견디는 데는 신비로운 쾌감도 있다. 논문을 쓰기 위해 고시생처럼 매일 도서관에 출근하던 시절 결승점이 어딘지도 모른 채 눈가리개를 하고 무작정 달리는 기분이었지만, 그때처럼 공부가 즐거웠던 적이 없었다. '어떻게 하면 인간관계에서 상처를 덜 받을 수 있을까'라는 절박한 물음으로 정신분석을 공부할 때도 그랬다. 자크 라캉의 책을 읽을 때마다 너무 어려워 포기하고 싶은 마음이 굴뚝 같았지만, 그를 이해하는 것은 인간세상을 이해하는 데 커다란 도움이 되었다. '객관적으로 보면 안 될 것 같은데, 주관적으로는 어떻게든 반드시 그걸 해낼 수 있을 것 같다'는 이 느낌을 설명하는 단어가 바로 라캉의 '실재계'임을 알게 되었다. '도저히 안 될 것 같다'는 공포의 문턱을 넘어서는 순간, 지금까지와는 전혀 다른 자유의 세계가 펼쳐진다. 바로 라캉이 말하는 실재계의 기적이다.

라캉의 '상상계'가 동화 속 해피엔딩을 열망하는 유아적인 환상이라면, '상징계'는 현실의 속박을 받아들이고 성숙한 자세로 삶의 고통을 극복해내는 어른들의 세계다. 안데르센의 '인어공주'가 지닌 비극적 결말을 삭제해버린 채 용감무쌍한 인어공주 에리얼의 행복한 결혼 이야기로 원작을 왜곡해버린 디즈니판 '인어공주'는 상상계적 이야기다. 해피엔딩으로 현실의 복잡성을 은폐하는 이야기, 적과 아의 구분이 명쾌하고 영웅이 악당을 무찔러버리는 데서 쾌감을 느끼는 이야기들은 상상계적 차원에 머무른다.

상징계는 현실의 고통을 감수하는 어른들의 세계, 사랑의 콩깍지가 벗겨지고 난 뒤에도 환상이 깨진 자리에서 더욱 성숙한 사랑을 시작하는 것이다. 인어공주가 인간이 되기 위해 감수하는 고통, 땅에 발을 디딜 때마다 발바닥이 타들어가는 듯한 고통을 견디는 것이 바로 상징계다. 실재계는 인간의 무의식 속으로 더 깊이 들어가야만 도달할 수 있는 세계다.



안데르센 원작 '인어공주'에서 왕자가 다른 여인과 결혼해버려 '인간이 될 수 있다'는 희망을 잃어버린 인어공주가 왕자를 죽이면 자신은 살 수 있음에도 불구하고 왕자를 살려내고 자신은 '물거품'이 되는 길을 택하는 것. 그것이 바로 실재계의 감동이다. 물거품이 되어버린 인어공주는 더 이상 이 세상, 상징계에 속할 수 없지만, 인류의 집단무의식 속에서 생이 끝나도 계속되는 진정한 사랑의 상징으로서 영원히 살아 있다.

나도 때로는 상상계의 동화적 환상 속에 머물고 싶다. 모든 꿈들이 디즈니 애니메이션처럼 해피엔딩으로 마무리되면 얼마나 좋을까. 하지만 '현실은 그게 아니잖아'라고 따끔하게 지적하는 상징계의 회초리가 있기에, 우리는 온갖 스트레스를 견디고, 뼈아픈 감정노동도 버텨낸다.

달콤한 동화적 환상에 만족하는 상상계를 넘어, 현실의 냉혹함을 이겨내는 철든 어른들의 상징계를 넘어 마침내 인생을 통째로 올인하는 최고의 모험을 견뎌낸 사람들에게 주어지는 실재계의 감동이 있다.

나에게 과연 그런 무시무시한 잠재력이 있을 것이라고는 상상도 하지 못했던 내 안의 낯선 자아가 튀어나오는 순간, 매너리즘에 사로잡힌 현실의 자아를 뛰어넘어 내 안의 가장 빛나는 힘이 무지개처럼 용솟음치는 순간. 그때 우리는 '너는 해낼 수 없을 거야'라고 속삭이던 자기 안의 괴물과 마침내 싸워 이길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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