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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의형제 이승만·박용만 독립 방법론 달라 정적 돼

육성으로 듣는 미주 한인 초기 이민사:외로운 여정(66)
미주 한인 역사개관(상)

'외로운 여정'이라는 코리안 아메리칸 구술사와 함께, 미주 한인 역사를 간략 하게나마 정리해볼 필요가 있을 것이다.

미주 지역으로의 한인들의 이민은 19세기 말부터 시작됐으나 한인 숫자는 매우 적었다. 당시엔 인종차별적 이민법이 존재해, 한인들의 미주 이민이 제한 되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1965년 이민법이 개정된 이후부터 미주 지역의 한인 인구는 급증했다. 이에 따른 미주 한인 사회의 역사, 사회, 문화, 경제, 정치에 대해 간단히 살펴보고자 한다. 미주 한인들의 역사는 크게 네 시기로 분류할 수 있다: 1) 제1시기(1885~1903), 2) 제2시기(1903~1924), 3) 제3시기(1950~1964), 4) 제4시기(1965~현재) 로 분류한다면 각 시기마다 미주 지역으로 이주해 온 한인들은 독특한 특성 을 지니고 있으며 이주 이유도 독특하다.

제1시기(1885~1902)

한국인의 미주 이민에 대하여 현재 광범위하게 받아들여지고 있는 통설은 1903년 하와이 사탕수수 농장으로 간 농업 이민으로 시작됐다는 것이다. 그러나 역사적 사실에 입각해 말하자면, 시곗바늘을 조금 더 앞으로 돌려야 한다. 한국인의 미주 이민은 구한말 개혁가, 개혁가 지망생(유학생), 비즈니스맨(개성상인) 집단을 빼놓을 수 없기 때문이다. 즉, 갑신정변(1884)으로 조선을 개혁하려다가 실패한 당시 엘리트 정치 세력의 망명으로 시작된 것으로 봐야 할 것이다. 서재필, 서광범이 대표적 인물이며, 이들에 이어 미국을 찾은 유학생들이 있었다. 서규병(1893), 안창호(1902), 김규식, 하난사 같은 인물들로, 그들은 서구 문물을 통해 조선 개화(조국 근대화)를 꿈꾸며 미국 유학을 결행했다. 또, 이들보다 다소 시기는 늦지만 이승만, 박용만, 노백린 같은 인물들도 같은 범주에 속한다. 그 외에도 인삼 거래를 주업으로 하던 개성상인을 중심으로 최소 165명이나 되는 인삼 상인들이 1899~1902년 사이에 미국에서 비즈니스를 일궜다. 이에 역사학자 방선주는 1902년까지 미국에 입국한 한인의 숫자가 최소 200명으로 추산되며 다른 지역을 통해 입국한 사람들까지 합치면 그 이상이 될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제2시기(1903~1924) (1)

미주 지역으로의 공식 이민은 1903년 1월 13일 하와이에 도착한 102명의 한인으로 시작되었다. 1903년부터 1905년에 걸쳐 약 7226명의 한인들이 하와이로 이주했는데, 여기에는 내외적인 요인들이 있다. 먼저 내적 요인을 살펴보면, 양반계급의 착취, 홍수와 가뭄 등의 자연재해, 그리고 정치적 불안정 등이다. 특히 초기 이민은 일본의 한국 식민지화 정책에 많은 영향을 받았는데 일본의 식민지정책으로 한국 경제는 극심하게 나빠졌고, 1905년 을사조약으로 한국은 외교권을 강탈당했으며 1910년 국권 피탈로 일본의 식민지로 전락하면서 대대적인 정치적 탄압을 받았던 것이다.

외적 요인으로는 하와이 사탕수수 농장 협회의 값싼 노동력 확보를 들 수 있다. 하와이 사탕수수 농장 협회에서 모집원을 한국으로 보내 선교사들의 도움을 받아 한인 노동자들을 하와이로 이주시켰다. 1860년부터 1940년까지 총 33개국에서 40만 명의 노동자들을 모집했던 하와이 사탕수수 농장 협회는 노동자들끼리 서로 경쟁하고 분열하는 '노동자 분열 정책'을 통해 노동자들의 임금을 동결하고 통제하는 수단으로 삼았는데, 일본계 노동자들의 노동력 장악을 막기 위해 한인을 비롯한 중국인, 포르투갈인, 필리핀인 등 타민족의 노동자들을 모집하여 하와이로 데려왔던 것이다.

초기 한인 이민자들은 대부분 20대의 도시 출신 남성들이었는데, 특히 약 40%는 기독교로 개종한 사람들이었다. 한편 하와이로 이주한 한인 인구 중 약 10%는 여성들이었는데, 펜팔을 통해 서로 사진을 교환하고 결혼함으로써 하와이로 온, 이른바 '사진신부'들이었다. 그런데 당시 사진신부와 신랑의 나이는 무려 평균 10~15세 차이가 났다. 그 이유는 하와이로 이주해 온 한인 남 성들은 평균 10년 이상 일해야 결혼 경비를 마련할 수 있었기 때문이었다. 게다가 당시 미주지역에선 한인과 백인 간의 결혼을 금지하는 금혼법이 시행됐 기 때문에 한인 남성들은 미국에서 신부를 찾을 수가 없었던 것이다.

그렇게 사진신부로 미주로 건너온 약 1000여 명의 한인 여성들은 요리사, 청소부, 세탁원 등으로 일하면서 타국에서의 결혼 생활을 시작했다. 그러나 나이 많은 남편을 둔 한인 사진신부들은 일찍 미망인이 되어 가정을 홀로 돌보는 경우가 많았다. 그들은 어머니로서 자녀들을 돌보고 한 가정을 책임지며 살아간 초기 한인 사회의 기둥이었다.

초기 미주 한인 사회의 또 다른 특징은 교회와 독립운동으로 지칭할 수 있다. 한인 교회는 단순히 신앙과 구원의 장소가 아니라, 모국의 독립에 대하여 의견을 나누고 전략을 세우는 장소이기도 했다. 교회는 여러 농장에 흩어져 일하고 있던 한인들이 정기적으로 모일 수 있는 집회 장소를 제공했으며, 한인 사회의 중심지로서 한국의 미래에 대한 교육 세미나 등도 개최되었을 뿐만 아니라, 한국의 독립 활동을 지원하는 중요한 기관이었다.

미주 한인 사회 독립운동의 중심엔 무력 항쟁을 주창한 박용만, 외교정책 을 중요시한 이승만, 그리고 교육과 애국 지도력을 강조한 안창호가 있었다. 그러나 불행하게도 한인 사회는 세 명의 지도자를 중심으로 각기 다른 노선을 걷는다. 무력 항쟁을 주장한 박용만은 네브래스카 주의 헤이스팅스시에 군단을 조직하고 군사훈련을 시켰으며 하와이로 이주해 젊은 청년들을 군사훈련에 참가시켰다.

이런 가운데 미주 한인들이 독립 전쟁을 위해 공군력을 키우는 것이 매우 중요하다는 점을 자각하여 비행사 양성의 필요성을 강조하고 실천에 옮겼다는 역사적 사실은 매우 중요하다. 김종림을 비롯한 미주 한인들의 주도로, 상해임시정부의 군무총장(현재 국방장관)이었던 노백린 장군과 함께 캘리포니아 주 윌로스에 비행학교를 설립했던 것이다. 임시정부의 동의를 얻어 독립 전쟁에 나설 전투 조종사를 양성하기 위한 항일 투쟁의 일환이었다. 이에 쌀농사로 백만장자가 된 김종림의 재정 후원으로 최소 세 대의 비행기를 구입하고 샌프란시스코에서 230km 북쪽에 위치한 윌로스(Willows)에 비행학교를 세웠 는데, 당시 한인들은 'KAC'(대한민국비행대를 의미), 한인비행학교, 비행가양성소, 사관양성소, 노백린군단 등으로 불렀다. 오늘날 한국 공군도 '한국 공군의 기원'으로 자부하는 곳으로, 우리 모두가 충분히 자부심을 느낄만하다. 그 무렵 특정 국가가 공군력의 중요성을 깨닫고 군용 비행학교를 설치해 조종사들을 양성하고 비행대를 거느린 국가는 미국, 영국, 프랑스, 러시아, 일본 등 열강에 국한됐다는 점에서 미주 한인들이 매우 선진된 군사정책을 주도했던 점을 주목할 필요가 있다.

그러나 이승만 박사는 이같은 무력 항쟁은 비현실적이라고 비판하면서 강대국에 대한 로비와 외교 활동의 중요성을 강조했다. 결국 한인사회는 양분 되었고 심각한 대립으로 많은 문제가 발생했다. 그뿐 아니라 안창호 선생이 조직한 '국민회'와 이승만 박사가 조직한 '동지회' 간의 갈등도 깊었다. 한인 지도자들은 대한민국의 독립에는 모두 헌신적으로 참여했으나 방법론에 대한 이견으로 한인 사회가 분열됐던 것이다. 그런 가운데서도 김종림은 이념과 사상을 초월하여 분열된 한인 사회의 통합과 독립운동에 적극 참여했다. 그는 비행학교 설립뿐만 아니라 안창호 선생이 조직한 흥사단의 적극적인 회원이었으며 동시에 이승만 박사가 조직한 동지회의 회원이기도 했다.

이처럼 초기 미주 한인 이민자들은 조국 독립을 위해 헌신했는데, 그 외 몇 가지 사건을 더 소개한다.

1919년 3월 1일 평화 시위는 전 세계에 흩어진 한국인들에게 적극적인 독립운동을 전개하는 계기를 마련해주었다. 거리로 나온 시민들은 자주독립을 외치며 일제에 항거했고, 이 소식을 전해 들은 미주 한인들은 크게 고무되어 보다 적극적인 독립운동을 전개하게 된다. 미주 한인들은 1919년 3월부터 1920년 12월까지 무려 20만 달러라는 거액을 모금해 독립운동을 지원했다. 그뿐만이 아니다. 미주 한인들은 실천적인 항일 투쟁도 불사했다.

초기 한인 사회의 독립운동의 본보기는 바로 1908년 발생한 스티븐슨 암살 사건이다. 스티븐슨의 공식 직함은 한국 정부 자문위원으로 일본 정부가 임명한 직함이었다. 그의 주요 임무는 일본의 한반도 식민정책을 미국 정부 관리들에게 설명하고 이해시키는 것이었는데, 워싱턴 DC로 향하던 그는 샌프란시스코에 도착한 후 일본의 식민지 정책을 정당화시키는 성명서를 발표 했다. 만약 한국이 일본의 통치를 받지 않더라도 결국 러시아의 식민지가 됐을 것이며, 한국 정부 관리들은 부패했기 때문에 한국인들은 일본 정부의 식민지 정책을 환영한다는 등의 허위 성명서를 발표한 것이었다. 이에 샌프란시스코의 한인들은 분개하며 스티븐슨에게 사과하고, 번복하라고 요구했다. 그러나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그러자 한인들은 스티븐슨을 일본의 앞잡이이며 한민족의 배반자로 규정하고 암살 계획을 세웠다. 전명운 열사가 암살을 시도했으나 실패로 끝났다. 그러나 장인환 열사에 의해 스티븐슨은 결국 암살되고 말았다. 이처럼 초기 한인 사회는 미국 생활에 적응하기 위한 노력과 함께 소수민족으로서 인종차별을 극복하기 위해 처절한 노력을 하면서도 한편으로는 조국의 독립운동에 전력을 다했던 것이다.

<67화로 계속>

장태한(UC 리버사이드 교수.김영옥 재미동포연구소 소장)

정리= 장병희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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