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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욕먹으며 농장서 일했지만 후회하지 않아"

육성으로 듣는 미주 한인 초기 이민사:외로운 여정(65)
사탕수수 농장에서 고난의 삶, 김성진과 김메리

하와이농장 일당 54센트지만
먹을게 없는 한국보다 나아
18년 일했지만 저축 못해
캘리포니아로 이주 선택해


한국인들은 가난과 빈곤, 봉건사회와 일제 식민지의 억압에서 벗어나 자유를 찾아 하와이, 멕시코 유카탄, 미국 본토로 꿈을 찾아 떠났다. 교육을 제대로 받지 못했고 궁핍한 삶을 살던 초기의 사진신부들, 그들은 어떠한 삶을 살았을까? 하와이와 멕시코 유카탄에서 그들은 어떻게 고난과 고통을 이겨냈을까? 쉽게 포기하지 않는다는 한국인의 정신은 사진신부들이 아이들을 키우고 수많은 역경을 이겨내며 생존할 수 있는 힘이 되었다.

김성진

1976년과 1977년 소니아 선우는 어릴 때 이웃에서 살았던 김성진(96세)을 오클랜드에 있는 그녀의 노인 아파트에서 만났다. 소니아 선우는 "김성진이 여전히 건강하고 아직도 유머를 간직하고 있다는 사실에 놀랐다"라고 말했다.

1905년 당시 22세였던 김성진은 가난과 빈곤을 떠나 엄마와 남동생 영대, 엄마의 '남편'과 함께 하와이로 이주했다. 한국에서는 생계가 어렵고 아무 것도 먹을 것이 없었다. 도착한 후 여러 가족들이 하와이의 사탕수수 농장으로 뿔뿔이 흩어졌다.

김성진과 가족은 호놀룰루 이화농장으로 보내져 하루 10시간 동안 사탕수수를 자르는 노동에 겨우 54센트를 받았다. 18년 동안 일하면서 간신히 돈을 저축해 캘리포니아로 이주했다. 성진은 캘리포니아 델라노 포도 농장에서 포도 따는 일을 했는데 어느날 갑자기 막노동의 일을 견디지 못한 남편이 한국으로 떠나버렸다. 그는 끝내 돌아오지 않았다. 김성진의 삶은 고생과 고난의 연속이었다.

"신은 우리가 얼마나 고생했는지 알 것이다."

김성진에게 한 가지 후회되는 일은 아들 존을 제대로 먹이지 못하고 돌보지 못한 채 키웠는데 그가 전쟁터에서 전사한 것이다.

▶가족 모두 사탕수수 농장에서 일했나

다른 가족들은 사탕수수를 심는 일, 어떤 사람은 잡초를 제거하는 일을 했는데 루나라고 불리는 감독관이 우리를 각각 다른 작업장으로 보냈다. 감독관은 주로 유럽계였는데 프랑스인이 우리의 감독관이었다. 아주 무식하고 욕쟁이였던 그 프랑스 감독관을 절대 잊을 수가 없다. 영어는 못해도 욕은 다 알아 들었다. 그 프랑스인 감독관은 항상 우리에게 더 빨리 일하도록 강요했고 우리를 게으르다며 재촉했다.

▶그때 미국에 온 것을 후회하지 않았나

후회하지 않았다. 그래도 한국에서의 생활보다는 나았다. 한 달 동안 열심히 일하면 밥, 간장, 다른 식료품을 구입해서 먹을 수가 있었다. 그때 우리가 10시간 동안 하루 종일 열심히 일해서 받은 하루 임금이 겨우 54센트였다. 저임금의 노동 착취였지만 아무 것도 먹을 것이 없었던 한국에서의 생활보다 나았다. 한국에서는 수수를 심고, 잡초를 제거하고 수확해도 소작농인 우리에게 주어지는 것은 거의 없었다. 소량의 수수밖에는 먹을 것이 아무것도 없었다.

▶사탕수수 농장에서 18년 동안 일하면서 저축은 할 수 있었나

10시간 일하고 54센트 받아서 저축은 불가능했다. 그래서 캘리포니아로 이주했다. 일자리를 찾아 캘리포니아의 이곳 저곳을 다니면서 일했다. 포도 농장에서 일했는데 정말 죽도록 일했다. 봄에는 잡초를 제거하고 겨울에는 가지치기를 했는데 과일이 열리지 않을 것 같은 가지를 제거하는 것이다. 올해 열릴 가지는 놔두고 내년에 포도가 열리도록 짧게 자르는 것이다.

▶그 당시 집에서의 생활이 궁금하다

그때는 집에서의 생활이 없었다. 일을 마치고 임금을 받으면 시내에 가서 장을 보고 집에 돌아와 저녁을 준비해 먹고 그 다음 날 아침을 먹었다. 그것이 하루 일과의 전부였다.

▶아이들 옷은 어떻게 준비했나

아이들은 신발 밑창이 다 헐 때까지 신었다. 우리 아이들은 다 헐은 신발을 신고 학교와 교회를 다녔는데 고생을 정말 많이 했다. 나는 헬렌, 케이시, 앨리스, 존을 낳았다. 나는 존에게 제대로 된 옷이나 음식을 주지 못했고 잘 돌보지 못했다. 존은 전쟁에 참여했다가 25세 때 전사했다. 아이들은 낳으면 죽곤 했다.

▶심하게 일해서 아이들의 건강 상태가 좋지 않았던 건 아닐까

아마도 그런 것 같다. 나는 몸이 아파도 항상 일했다. 아이들이 죽는데 내가 할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그때는 그랬다.

▶한국을 방문한 적이 있나

돈이 있어야 한국을 갈 수 있다. 나는 미국 시민권자도 아니다. 나의 고향 북한은 이제 공산주의 국가가 되었고 그곳에 나의 친인척이 아무도 없다. 고향에 가고 싶은 마음은 전혀 없다. 지금 내 나이 아흔 여섯으로 여행하기도 힘들다.

김(이박)메리

새크라멘토에 거주하고 있는 김메리. 1904년 그녀는 엄마인 세라의 품에 안겨 하와이 사탕수수 농장으로 이주했다. 그녀는 아버지 없이 여덟 살 때부터 엄마와 함께 일하며 삶을 꾸렸다.

성장한 메리는 한국에서 치과 의사였던 남편과 결혼했으나 그녀의 남편은 동양인 차별법 때문에 치과 의사로 일할 수 없었다. 캘리포니아 센트럴 밸리에 살 때 메리는 하루 200 상자의 포도를 수확하고 말렸는데 교육을 받은 남편은 항상 병에 시달렸다. 그래서 메리가 심한 출혈로 요양소에서 치료를 받는 동안 다섯 명의 자녀들은 3년 동안 고아원에서 자랄 수밖에 없었다.

메리의 허약한 남편은 결국 한국으로 돌아가서 재혼해 새 가정을 꾸렸고 미국에 있는 다섯 명의 자녀들은 버려졌다. 메리 또한 다른 남자를 만나서 재혼했고 한국 총각들이 지낼 수 있는 하숙집을 은퇴할 때까지 운영했다.

"오키나와에서 아들 조지가 전쟁이 끝나기 3개월 전 지뢰를 밟아 전사했다는 소식을 들었을 때 하늘이 무너지는 줄 알았다. 딸들 덕분에 가장 힘들고 후회스러운 기억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

메리는 90세에 세상을 떠났는데 그녀가 남긴 마지막 말은 "미국을 축복하라"였다.

이경원 저·장태한 역
'외로운 여정'에서 전재
김영옥 재미동포연구소 제공
정리= 장병희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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