큰 돈 번다고 철썩같이 믿고 쿠바로 이주
육성으로 듣는 미주 한인 초기 이민사:외로운 여정(63)
열정적인 쿠바 혁명가 김마사(상)
하나는 한복, 다른 하나는 교복
오전에 한국학교에 갔기에
2세들 누구나 한국어 유창
유대인들은 2000 년이 넘도록 종교적 박해를 당하고 세계대전 중엔 대량 학살을 겪었다. 또한 그들은 세계 도처에서 추방을 당해 빈민가로 몰리면서 사회의 천덕꾸러기로 세상을 헤매고 있다. 그러나 미국에 있는 대부분의 유대인들은 그들이 열망했던 정상인의 삶을 성취해냈다.
지금 쿠바 땅에서 '아리랑'은 잊혀지지 않은 노래로 전해진다. '아리랑'은 20세기 시작과 함께 고국을 떠나 시베리아, 만주, 중국, 미국, 멕시코, 쿠바, 일본, 중앙아시아, 유럽, 남미, 아프리카, 호주 등지로 이주한 한인들에게서 들을 수 있다.
지난 10년 동안 대략 50만 명의 북한 주민들이 중국, 러시아 등 주변 국가들로 탈출했다. 그들은 마치 후기 스탈린 수용소를 방불케 하는 김정일 치하의 혹독한 북한 생활에서 벗어나기 위해 위험한 탈출을 감행한 것이다. 대부분의 여성 망명자들은 생존을 위해 성노예로 전락했다. 게다가 세상은 이들의 안위에 어떠한 관심도 쏟지 않았다. 이렇게 비참한 사람들의 한은 우리를 눈물짓게 만든다.
뉴욕에 거주하는 한국계 영화감독 김대실은 쿠바를 방문해 통역관 최애영과 함께 그곳에서 노예로 살았던 한인들의 후손인 김마사를 비롯해 한국계 3세들을 만나 지금까지 밝혀지지 않았던 그들의 이야기를 듣고, 쿠바 한인들의 한을 밝혀냈다.
*당신과 가족들, 그리고 가족의 배경을 말해달라.
마사= 나는 쿠바에서 태어나고 교육받은 쿠바인이다. 그리고 쿠바에서 저명한 작가인 라울 루이즈와 결혼했다. 그러나 내 근본은 한국에 있다고 믿는다. 나의 한국 이름은 임은희이다.
우리 아버지는 한국 커뮤니티 리더 중 한 분이었다. 아버지의 이름은 임천택이고, 스패니시 이름은 엘네스토 림이었다. 아버지는 한국의 정체성과 문화를 보호하기 위해 활동했다. 아버지의 활동은 내게 큰 영향을 미쳤고, 덕분에 나는 스스로 한국과 매우 밀접하게 연결되어 있다고 느낀다. 그래서 내 자신을 한국인 뿌리를 가지고 있는 쿠바인으로 인식하는 것이다.
어머니의 이름은 김가히, 스패니시어 이름은 구델리아 김이었다. 어머니가 여덟 살 때 외조부모님과 어머니의 가족들은 멕시코로 이주했다. 어머니는 열네살에 아버지와 결혼을 했고, 바로 첫 아이를 가졌다. 어머니는 총 아홉명의 아이를 낳았고, 바느질과 세탁일을 하면서 항상 아버지를 도왔다.
나는 외할머니를 만나본 적이 없었다. 어머니는 외할머니가 멕시코에서 임종했다면서 외할머니에 대한 이야기를 들려주곤 했다. 외할머니는 교육을 받지 못했고 몹시 가난한 집안 출신이었다고 한다. 그러나 자식 교육에 있어 굉장히 엄격했고, 높은 도덕적인 규범을 지키며 살았다. 외조부모님과 어머니의 가족들은 시골 지역에서 매우 가난하게 살았다. 어느 날 아이들이 멜론 밭에 가서 하나를 서리해 집으로 가져오니, 외할머니는 매섭게 혼을 냈다. 그래서 아이들은 서리한 멜론을 도로 주인에게 돌려주었다. 그날 어머니의 집에선 어떤 사람도 밥을 먹지 못했다. 멜론 서리에 대한 벌이었다.
(이호영 토머스는 쿠바에서 태어났다. 현재 73세이고 그의 아버지는 1921년에 멕시코를 떠나 쿠바로 왔다. 토머스가 들려주는 자신의 가족 이야기를 들어보자.)
토머스= 우리 아버지는 돈을 많이 벌어 한국으로 돌아갈 수 있다는 말을 철석 같이 믿고 쿠바로 이주했다고 한다. 하지만 아버지가 할 수 있는 일이란 고작 애니깽을 베는 일밖에 없었다. 아버지는 아들 넷과 딸 셋 총 일곱 명의 자녀를 두었는데, 나는 그중 세 번째 자녀다. 보통 이곳에서 만날 수 있는 대부분의 한국인들은 일을 찾아 여러 마을로 퍼져 살고 있다. 우리 가족은 작은 나무 집에 살았다. 우리 어머니는 멕시코에서 태어났고, 아버지와 그곳에서 만났다. 어머니와 아버지는 아주 고된 시간을 보냈다. 애니깽 베는 작업이 끝났지만 부모님의 수중엔 한 푼도 없었다. 그래서 아버지는 임금을 좀 더 받을 수 있는 다른 일을 구해야만 했다. 또 가난 때문에 세상을 떠난 가족의 장례식을 위해 돈을 빌려야만 했다.
(김루시아는 쿠바에서 태어났고, 그의 부모는 멕시코 출생인 한국인들이다. 훗날 루시아는 쿠바 군대에 입대했다. 루시아의 이야기를 들어보자.)
김루시아=우리가 어렸을 때 조부모님은 어떻게 우리가 멕시코에 오게 되었는지를 이야기해주었다. 어머니는 종종 할머니와 외할머니가 부잣집 출신이었다는 것을 말하곤 했다. 할아버지는 기갑부대의 군인이어서 말도 몰았다고 한 다. 할아버지와 할머니는 멕시코에서 더 부자로 살 수 있을 것이라는 믿음으로 이곳에 왔다. 그러나 그들은 멕시코에 도착하마자 노동에 시달려야 했다.
*자랄 때 기억에 대해 좀 더 들려달라.
마사= 나는 우리 집에서 여섯 째 아이였다. 나에겐 두 벌의 드레스가 있었는 데, 하나는 한국 설날에 입었고, 다른 하나는 교복이었다. 학교 갈 때 신는 신발도 따로 있었다. 가난했지만 우리는 행복했다. 다른 사람들이 얼마나 풍족하게 사는지 몰랐었기 때문이었던 것 같다. 우리는 사랑을 많이 받고 자랐고 형제자매끼리 우애도 좋았다.
(김프리미티보는 1930년에 태어난 마사의 큰오빠이다. 프리미티보는 네 명의 딸을 홀로 키웠다. 그의 딸들은 잘 성장해 정부에서 일하거나 의사, 건축가로 일한다. 프리미티보의 이야기를 들어보자.)
프리미티보=나는 한국 학교를 다녔었는데 그곳에서는 환갑과 같은 특별한 날을 기념하기도 했다. 우리는 한국의 전통 음식과 언어 등을 지키려고 노력했다. 나는 6학년에 학교를 그만두었다. 그러나 훗날 다시 입학해 고등학교 과정까지 마쳤다. 나는 지금 퇴직을 했다. 대학 교육을 받지는 못했지만, 나는 열심히 일하는 사람이었다. 또 어느 누구에게나 좋은 인상을 줬다. 열심히 일했기에 백 개가 넘는 소수집단 기업들을 관리하는 직책 중 주정부에서 가장 높은 자리까지 올라갔다.
토머스= 우리 모두 한국어를 할 줄 안다. 아침에는 한국 학교에 가고 오후엔 쿠바 학교를 다녔기 때문이다. 1955~56년까지 두 군데 학교를 오가며 공부했다. 만약 그곳을 떠나지 않았다면, 우리 집들은 불에 타 없어졌을 것이다. 그래서 많은 사람들이 아바나, 산티아고, 그리고 다른 지역들로 흩어졌다.
우리가 마을을 떠난 후에, 몇몇은 다른 곳에서 일을 찾았다. 나는 아바나에 있는 식당에서 설거지를 했다. 어머니와 여동생들은 세탁을 해서 돈을 벌었다. 그렇게 번 돈으로 생계를 꾸려나갔다. 어머니는 돈을 모아서 큰형이 작은 가게를 살 때 주었다. 형은 가게를 2년 동안 잘 운영하고 나서 내게 물려주었다. 작은 집에 살았지만 우리의 삶이 점점 나아짐을 느꼈다. 1956년에 나는 로지와 결혼했고, 1남 2녀의 자녀를 두었다. 세 명의 아이들은 모두 대학을 졸업했고, 엔지니어가 됐다. 아이들은 모두 쿠바인과 결혼해 다섯 명의 손자, 손녀가 생겼다.
*자라오는 동안 특별히 한국적이라고 느꼈던 것이 있었나?
마사= 어머니는 우리에게 바느질과 요리하는 법을 가르쳐주셨다. 집에서 우리는 항상 한국 음식을 먹었다. 쿠바에 있는 한국인들은 멕시코의 영향을 받았다. 한국인들은 매운 음식을 좋아하는데, 멕시코인들은 그보다 훨씬 더 매운 음식을 먹었다. 그래서 한국계 쿠바 음식은 몹시 맵다. 집에서 우리는 기본적으로 고추장, 김치를 곁들여 먹었다. 장과 김치는 독에 보관했다. 우리는 생일날이나 삼일절 등 특별한 날이면 한국 전통 음식을 해 먹었다. 한국인 커뮤니티에서 삼일절은 매우 중요한 날이라 반드시 기념했다.
이경원 저·장태한 역
'외로운 여정'에서 전재
김영옥 재미동포연구소 제공
정리= 장병희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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