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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일 합방소식 알려지자 젊은이들 혁명군 입대

육성으로 듣는 미주 한인 초기 이민사:외로운 여정(62)
유카탄 노예 생활과 조국 독립 염원 박호세(하)

광무군 중심 200여 한인
훈련위해 '승무학교' 설립
도산선생 "LA 이주" 조언
고문으로 사망 알려져 '포기'


멕시코에 계약 노동자로 온 한인들의 계약이 만기되어 그들은 자유의 몸이 되었다. 그러나 대부분의 한인들은 여전히 새벽부터 저녁까지 고된 노동을 계속하면서 꾸준히 저축했다. 돈을 모아 조국으로 돌아간다는 꿈을 포기하지 않고 열심히 일한 것이었다. LA의 대한인국민회에서 파견된 방의정과 황사용의 도움으로 멕시코 한인들은 대한인국민회 메리다 지회를 창립했다. 한국 정부에서 파견된 윤치호도 멕시코에 도착했다. 각 농장에 한국이 일제의 식민지가 되었다는 소식을 전하니 한인들 모두 치욕의 날이라고 분노했다. 휴일인 일요일에는 여러 농장에서 일하고 있는 남자들이 모두 메리다에 모였다. 대부분은 이러한 모임에 참석한 경험이 없는 사람들이었지만, 대한인국민회 메리다 지회를 창립하기 위해 모인 것이었다. 신광익이 회장에 선출되었고 이명홍이 총무, 그리고 이종후가 재정을 담당하게 되었다.

첫해의 일년 예산은 900달러로 책정되었고, 대부분은 회비에서 충당했는데 그중 절반은 대한인국민회의 독립운동 자금으로 송금되었다. 1910~1911년 당시 원주민 노동자들의 하루 일당이 1달러였지만, 한인들은 성실함과 숙련도를 인정받아 1~2달러를 받았다.

메리다에 안창호가 보낸 황사용이 도착한 후, 그는 한인들이 살고 있는 농장에 찾아가 한인 가정을 방문하고 설교를 시작했다. 많은 한인 노동자들이 황사용의 설교에 감동을 받아, 곧 교회가 설립되었고 황사용은 일요일 오전과 저녁 예배, 그리고 수요일과 공휴일에는 저녁 예배를 시작했다.

이 예배엔 많은 사람들이 참석했다. 원주민과 다른 민족의 사람들에게도 한인들의 예배 소식이 알려졌다. 약 한 시간 진행되는 예배에서는 기도, 찬송가, 설교, 헌금 순 서로 진행되었다. 일부 농장에서는 농장주가 제공한 오두막에서 예배가 이루어지기도 했다. 한인 교회는 유카탄 정부에 정식으로 등록되지는 않았으나 주정부는 전혀 간섭을 하지 않았고 예배를 금지하거나 방해하지도 않았다.

1923년 쯤 다른 교단의 선교사들이 멕시코에 찾아왔고, 그중 안식교는 특이하게 토요일에 예배를 드렸다.

젊은 남녀가 일단 결혼하기로 결정하면 그들이 서로 친인척 관계가 아니라는 것을 증명해야 했다. 특히 이승만 대통령이 같은 성씨끼리 결혼하지 말라는 명령을 내렸다. 서로 친인척 관계가 아니라는 것이 증명되면 젊은 남녀는 서로 얼굴도 한 번도 본 적이 없는 상태일지라도 양가 부모가 결혼식 날짜를 잡았다. 대부분의 젊은 남녀들은 부모님들의 이러한 관습을 수용했지만 일부는 이를 거부하며 자살하는 경우도 있다. 당시는 결혼 후 이혼이나 별거를 꿈도 꿀 수 없었기 때문이었다.

일본이 강제로 한국을 식민지로 삼았다는 소식이 전해진 후, 20~25세의 한인 젊은 총각들은 멕시코 혁명군에 자원입대했다. 200여 명의 광무군인을 중심으로 군사훈련 및 무장운동을 위해 메리다에 승무학교가 설립되었고, 설립자 이근영이 리더가 되어 활동을 개시했다. 그러나 그후 그들이 어떻게 되 었는지는 잘 알려지지 않고 있지만 일부는 과테말라로 떠난 것으로 전해진다. 그 당시 유카탄의 한인 노동자들은 모두 가난한 삶을 살고 있었지만, 조국의 독립을 위해 헌신했다.

처음 계약 노동 기간이 끝나고 3년 후, 한인 노동자들은 자유인의 신분을 한껏 즐겼다. 그러나 약 50여 명의 한인들은 사탕수수 농장에서 일하는 새로운 계약 노동을 시작했다.

고된 노동에 도망을 치다가 잡히면 심한 고문을 당했고, 교수형에 처해진 사람도 한 명 있었다. 그곳에서는 한인, 중국인, 일본인, 멕시칸, 백인, 그리고 다른 민족들이 각각 따로 일종의 집성촌을 형성하면서, 일도 따로 했다. 백인들은 좀 더 좋은 환경에서 거주하면서 일하는 것을 멀리서나마 볼 수 있었다. 우리 가족은 한곳에 머물지 않고 이곳저곳을 돌아다니며 일했다. 어머니는 내가 여덟 살 때 돌아가셨고, 아버지는 다시 유카탄 농장으로 돌아와 애니깽 자르는 일을 했다. 우리가 다시 메리다에 도착했을 때 많은 한인들이 여전히 계약 노동자로 그곳에서 일하는 것에 새삼 놀랐다. 아버지가 다시 초촐라 농장으로 일하러 떠난 후, 나는 다른 한인 아이들과 어울려 시간을 보냈는데, 우리는 음악을 듣고 음식을 나눠 먹기도 했다.

아이들에게 공부를 가르치기 위한 학교가 설립되었는데, 우리 아버지도 그 곳에서 아이들을 가르쳤다. 내가 다니던 학교는 유카탄에서 가장 좋은 학교로 알려져 있었다. 우리 학교에는 여덟살 이상 아이들이 25~30명 정도 있었고, 글을 읽지 못하는 성인들도 다녔다. 그러나 학교 일은 굉장히 어렵게 돌아 갔다. 교사의 수는 턱없이 부족했으며, 하루 종일 일에 지친 한인 노동자들이 하루 2시간씩 앉아 글을 배운다는 것은 결코 쉽지 않았다. 성인 학생들은 자주 바뀌었다.

1919년 3.1운동 소식이 우리에게도 전해졌다. 우리의 애국심은 최고조에 달했다. 독립운동을 위한 단체도 설립되었다. 흩어졌던 한인 노동자들이 다시 유카탄으로 돌아와 일했다. 특히 젊은 청년들은 스패니시를 유창하게 구사하게 되면서 일을 수월히 구할 수 있었다. 다시 한국 학교가 설립되었고, 한인의 교세가 점점 확장되면서 근처에 한인 식당들도 하나둘씩 생겨났다. 그래서 농장에서 도시로의 한인 인구 이동이 활발해졌다.

LA한인 사회의 지도자인 안창호가 유카탄을 방문한다는 소식이 전해지자 유카탄의 모든 한인들은 그 소식을 반기며 안창호의 방문을 열렬히 기다렸다. 안창호의 도착 시각이 불분명했지만, 약 500명의 한인들이 안창호가 탄 기차를 마중하기 위해 역에 몰려들었다. 기차에서 내린 안창호는 군중들에게 일일이 감사를 표시했다.

그는 유카탄 한인들에게 일제의 식민지가 된 후 한국인들이 일제 탄압에 극심한 고통을 당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려주었다. 일제 치하에서 많은 한국인들이 굴욕을 견디지 못해 자살했으며, 일본군이 총칼로 무고한 시민들을 죽이고, 한국인들의 집에 불을 지르는 것은 예사라고 했다. 또 한국인들은 일제에게 음식을 배급받는 생활을 하고, 심한 종교 탄압까지 겪고 있다고 했다.

안창호는 천천히 그러나 단호하게 3.1만세운동에 대해 설명했다. 1919년 3월1일에 33인이 서명하고, 전국적으로 만세운동이 전개 되었으며, 이때 일제의 총칼로 수많은 사상자가 발생했다고 했다. 안창호는 우리가 할 수 있는 모든 일을 도모하고 희생을 불사하며 일제 탄압에 저항하자고 우리에게 강력히 호소했다. 안창호가 연설하는 동안 청중으로 꽉 찬 연설장 안은 얼마나 조용했던지, 날아다니는 파리 소리가 들릴 정도였다. 청중들은 안창호의 연설을 열심히 경청하면서 말없이 눈물을 흘리기도 했다.

그때 회장이 일어나서 누가 기도를 해달라고 부탁했다. 연설이 끝나자 청중들은 한 줄로 서서 안창호와 일일이 악수했다. 그 후 한인 지도자들이 안창호와 저녁 식사를 함께 했는데 총무를 담당하던 우리 아버지도 그 자리에 참석했다. 안창호와 일행은 내가 당시 일하고 있던 식당으로 왔는데, 식당 주인이 그들을 반갑게 환영하면서 식사 준비를 했고, 특히 안창호에게는 극진한 존경심을 표했다. 우리는 다시 안창호의 숙소가 마련된 한인회로 돌아왔다. 아버지는 안창호의 유카탄 방문 기간 동안 안내의 임무를 맡아 함께 지냈다.

어느 날 새벽 3~4시쯤 우리는 안창호가 방에서 무릎 꿇고 기도하는 모습을 보고 놀랐다. 나중에 안창호는 장갑과 칼을 가져다 달라고 했고, 밖으로 나가 농장으로 가서 한인 노동자들과 함께 애니깽을 잘랐다. 몇몇이 만류했으나 소용없었다. 안창호는 한인들이 일하고 있는 농장 여러 곳을 방문하여 그들을 위로하고 함께 일했다. 안창호는 한인들이 열악한 환경에서 반노예 생활을 하고 있다는 것을 직접 목격하면서, 그들에게 서로 협심하여 돈을 모아 LA로 모두 이주할 것을 제안했다. LA는 토지가 비옥하고 빈 땅이 많으므로 땅을 구입해서 함께 농사를 지을 수 있다고 설명했다.

안창호의 이러한 제안은 단순히 제안이 아닌 당연히 지켜야 할 명령으로 받아들여졌다. 따라서 한인 노동자들은 준비에 들어갔다. 멕시코의 각 한인회는 모든 한인들로부터 일정액을 수금하여 저축하기 시작했다. 그러나 이러한 계획은 조직의 리더십 부재와 공금 횡령으로 제대로 수행되지 않았다. 더구나 안창호가 떠나고, 그가 한국 감옥에서 고문으로 사망했다는 소식이 전해지면서 수포로 돌아갔다. 만약 안창호가 끝까지 생존하여 우리의 지도자로 계속 남아있었다면, 우리의 삶은 분명히 달라졌을 것이다.

안창호가 유카탄에 1년 정도 머무는 동안에, 상해에는 임시정부가 수립되었다. 이승만이 대통령으로 추대되었고 중국 정부도 이를 지원하며 전 세계에 퍼져있는 한인들로부터 적극적인 지지를 받았다. 멕시코에서도 모든 한인들이 연회비를 거둬 임시정부에 보내면서 조국의 독립에 적극적으로 참여했다. 일요일에는 한인들이 모여서 여러 사안에 대한 의견을 서로 나누었다. 특히 그 시간을 통해 일제의 만행을 강하게 규탄했다.

이경원 저·장태한 역
'외로운 여정'에서 전재
김영옥 재미동포연구소 제공
정리= 장병희 기자

◆책구입: hotdeal.koreadaily.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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