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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에 오기 위해 나이 속이고 결혼했다"

육성으로 듣는 미주 한인 초기 이민사:외로운 여정(60)
유카탄의 한국인 노예들, 그리고 선우 로사(하)

여동생 같이 오기 위해서
딸로 입양하자 당국 허가
남편 목장으로 일하러가서
1년간 동생과 고아원 살아


만약 수양 어머니가 나를 죽이려 했다면 충분히 가능했을 것이다. 사실 난 죽든 말든 상관이 없었다. 슬픔에 가득 찬 인생일 뿐이었다. 차라리 나는 살고 싶지 않았다. 그러나 살고자 했던 건 여동생 마리아 때문이었다. 그게 다였다. 대한인국민회에서 멕시코를 방문하는 한국인 대표로 황사용을 보냈다. 황사용은 1년간 목장들을 순회하고 미국으로 다시 돌아갔다. 내가 열세 살이었을 때 황사용을 만났다. 나는 그에게 "나도 미국으로 갈 수 있었음 좋겠어요"라고 말했다.

당시 우리는 미국을 천국처럼 생각했었다. 그러나 나는 결코 미국에 갈 수 없을 것 같았다. 3년 후 황사용은 우리 아버지에게 편지를 보냈다. 나와 결혼을 원하는 총각이 있다는 것은 알려주기 위해서였다. 그 사람이 바로 윤씨다. 아버지는 항상 자식들이 미국으로 건너가기를 원했기 때문에, 나는 16세에 윤씨와 결혼했다. 언니는 이미 메리다에서 결혼을 한 상태였고, 남동생 필립이 언니와 함께 지내고 있었다. 아버지는 내가 윤 씨와 결혼하면 미국에 갈 수 있다고 말했다.

윤씨가 찾아왔다. 당장 결혼을 위해서가 아니라 나를 보기 위해서였다. 그 때 나는 열여섯살의 작은 소녀였다. 다른 사람이 나를 열두 살로 볼 정도로 나는 키가 작았다. 그리고 이곳 날씨가 너무 더워 나의 피부색은 완전히 검게 그을렸다. 이런 나를 보고 윤씨는 결혼할 마음이 사라졌다.

그는 이미 28세인 성인 남자였고, 나는 단지 16세 소녀였다. 아버지가 윤씨에게 애원했다.

"제발 우리 딸을 데려가 아내로 삼아줘요. 좋은 아이입니다."

그제서야 윤씨는 "따뜻한 가정에서 자란 소녀가 맞는 것 같네요"라고 말했다. 윤씨가 우리를 찾아왔을 때, 나는 사실 아무런 느낌이 없었다. 아버지가 윤씨를 부엌으로 데려와서 내게 요리를 내오라고 시켰다. 어머니에게 배운 요리를 만들어 같이 먹었다. 나는 윤씨가 어떻게 생겼는지 보고 싶어서 살짝 훔쳐봤는데, 잘생겼고 하얀 피부를 가진 남자였다. 까맣게 그을리기 전 내 얼굴을 본 사람이 아무도 없을지라도, 우리 가족은 원래 검은 피부를 가진 사람들이 아니었다. 윤씨의 입술은 두툼했다. 나는 그때 너무 어려서 남자들과 어떻게 시간을 보내야 하는지 알 수 있는 나이가 아니었다. 아버지는 결국 내게 말했다. "너는 윤씨와 결혼을 하고 미국에 가야만 한다. 알겠지?" 그러나 윤씨는 아버지의 친구를 통해 나를 미국에 데려가고 싶지 않다는 말을 전했다. 그러나 아버지와 친구들은 계속해서 윤씨에게 나를 데려가라고 종용했다.

나는 미국이 천국과 같을 것이라고 생각했지만 한편으로는 어린 여동생을 돌봐야 한다는 생각이 맴돌았다. 그렇기에 아버지 곁을 떠나는 것을 원하지 않았고, 그 때문에 나는 울고 또 울었다.

텍사스 엘파소에서의 이민국 관계자들이 우리를 방문했다. 결혼하지 않은 남자가 어린 여자를 미국에 데려가는 것이 불법이라는 것이다. 그때 윤씨가 그들에게 말했다.

"이 여자는 내 약혼자이고, 우리는 미국에 가서 결혼할 겁니다."

그러자 그들이 말했다. "약혼은 소용없어. 결혼 증명서를 먼저 보여줘야 해." 나는 실제로 열여섯 살이었지만, 윤씨는 내가 열아홉 살이라고 그들에게 소개했다. 모든 일들이 갑작스럽게 벌어졌다. "좋아, 우리는 국경에서 결혼을 하게 될 거야." 그리고 우리는 멕시코 국경선에 가서 결혼했다.

결혼으로 인해 나는 15센트 가게에서 벗어나 성공할 수 있는 기회를 얻었다. 어릴 때에는 어떤 종류이건 상관없이 반지 받는 게 좋았던 것 같다. 결혼식 날 아침에 윤 씨가 반지를 건네며 말했다.

"반지를 껴봐." 그리고 우리는 어떤 말도 주고 받지 않았다. 사실 나는 부끄러웠고, 그가 두렵기도 했다. 나는 윤씨에게 어떤 말도 할 수 없었다. 그래서 마리아에게 스페인어로 얘기하면, 그녀가 윤 씨에게 한국말로 통역을 해 말을 전했다. 나는 받은 반지를 도로 빼서 윤씨의 주머니에 슬그머니 넣었다.

우리는 워싱턴DC에서 날아올 결혼 증명서를 기다려야만 했다. 거의 한 달을 기다렸다. 나는 여동생도 미국에 함께 데려갈 것을 요청했지만, 미 당국은 허용하지 않았다. 그래서 윤씨가 여동생을 우리의 딸로 입양해 호적에 올렸다. 우리는 한 달을 더 기다리고 나서야 LA에 갈 수 있었다.

지금까지도 거리의 가로등 불을 볼 때면 슬퍼진다. 미국에 처음 왔던 그 당시가 떠오르기 때문이다. "여기가 한국인들이 많이 사는 LA야." 나는 윤씨의 말을 듣고 창밖을 바라봤다. 그때가 밤 9시였다. 창밖의 불빛들은 나에게 꽤 낯설게 느껴졌고, 나는 눈물이 왈칵 쏟아졌다. 63년이 지났지만 나는 여전히 처음 그 불빛들이 떠오른다.

우리는 샌프란시스코로 이주했다. 부시 거리에 한국 동포가 살고 있었다. 한국 동포 마영준씨는 미국인 가정에서 일했고, 마영준씨의 부인은 하숙집을 운영했다. 하숙집 2층이 교회였는데, 그곳에서 우리는 매주 만났다. 3층에는 하숙방들이 있었다. 많은 수는 아니었지만 목장에서 일하는 한국인들이 도시로 건너와 그곳에서 지냈다. 우리는 교회에 들렸고, 그 교회의 목사가 이 대위였다.

윤씨는 목장으로 일을 하러 갔고, 그가 일을 나간 동안 우리를 안전하게 보호하기 위해 일본인 소녀들을 위탁하는 고아원으로 데려갔다. 사실 윤씨가 나와 함께 있는 게 싫어서이기도 했다. 기차를 타고 오는 동안, 윤씨가 내게 말했다, "내 친구들에게 너를 보여주는 게 너무 창피해." 이유를 물으니 "너는 너무 못생겼잖니"라고 말하던 그의 말이 지금까지 잊혀지지가 않는다.

나는 너무 어리고 순진했다. 그리고 내가 못생긴 것도 알았다. 윤 씨는 나와 여동생을 1년 여간 고아원에서 지내게 했다. 고아원에 등록하면서 그는 나의 결혼전 성을 미스 조라고 적었다. 고아원은 결혼한 여자를 받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그는 김씨의 목장에서 일을 했고, 가끔 한 번씩 나를 보러 왔다. 그러나 내게 고아원 생활은 즐거웠다. 그곳에는 60명의 일본인 소녀들과 열 명의 한국인들이 살고 있었다.

1년 후 아버지는 한국으로 돌아갔다. 아버지는 내게 남동생 필립을 돌보고 학교에 보내라는 편지를 보냈다.

우리는 방이 세 개인 박영식씨의 집에 함께 지냈다. 윤씨와 박씨는 남동생이 더부살이를 하는 것에 언쟁을 벌였다. 한 달 집 렌트비가 10달러였는데, 박씨는 필립이 함께 산다면 렌트비를 삼등분할 것을 주장했다. 그러나 윤씨는 동의하지 않았고, "나는 6달러 지불할 테니 네가 4달러를 부담해"라고 말했다. 그 다음 날로 박씨는 모든 것을 가지고 이사 가버렸다.

양조은씨는 부인과 함께 살았는데 음식들을 파는 작은 가게를 운영했다. 그러나 박씨가 양씨의 물건들을 다 가지고 나갔다. 나는 위층의 침대에 누워 울기만 했다. 김상길씨가 쉬는 날에 우리를 찾아왔다. 한국 음식이 너무 먹고 싶다고 했다. 그런데 내가 계속 울고 있자 이유를 물었다. 내가 대답을 하지 않으니 그는 주위를 둘러보고 말했다. "박씨가 다 가져갔구나! 심지어 물병까지도."

이경원 저·장태한 역
'외로운 여정'에서 전재
김영옥 재미동포연구소 제공
정리= 장병희 기자

◆책구입: hotdeal.koreadaily.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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