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머니 장례엔 관 없어 문짝 뜯어 매장"
육성으로 듣는 미주 한인 초기 이민사:외로운 여정(59)
유카탄의 한국인 노예들, 그리고 선우 로사(중)
아버지는 공부하라고 충고
동생과 의탁했던 수양어머니
말 안듣다고 우물로 밀어넣어
어머니가 1905년 9월 22일에 여동생을 낳았을 때 아무것도 먹지 못했다. 우리는 어머니를 위해 호박죽을 끓였다. 그 후 남동생이 또 태어났다.
그 당시 건강 진료 같은 것은 없었다. 아버지는 한국에서 군인이었기 때문에 간단한 진료 정도는 볼 수 있었는데, 침도 놓을 줄 알았다. 이러한 간단한 의학 지식으로 아버지는 어머니의 출산을 돕고 돌봤다.
아버지는 어디선가 기저귀 같은 물품들을 얻어 왔다. 다른 사람들에겐 그런 물품이 없었지만 우리 집엔 린넨과 시트, 옷감 등이 있었다. 하지만 물품들이 오래 가진 못했다. 후에 주인이 해마다 많은 물품들을 제공해주었다.
스페인 사람들은 한국인들을 원주민들처럼 대했다. 나중에 그들은 우리가 이미 개화된 사람임을 알게 됐다. 아버지는 항상 스패니시를 배우려고 노력했다. 스패니시를 쓰고 나서 그 아래 한국어로 쓴 종이를 감독관에게 보여주면서 스패니시를 배우고 싶은 자신의 마음을 표현했다. 아버지는 항상 감독관에게 스패니시 단어들을 물었고, 그 단어들을 한국어로 번역하여 열심히 익혔다.
아버지는 형식적인 자리에서 차려입을 수 있는 한국식 정장 한 벌과 모자를 항상 가지고 있었다. 쉬는 날인 매주 일요일에 옷을 잘 차려입은 아버지가 목장을 돌아다녔다. 다른 사람들에게 한국 옷을 보여주고 싶었던 것이다. 그에 반해 어머니는 나가는 것을 즐기지 않았다.
캠프에는 30여 명의 한국인들이 살았다. 열 명이 넘는 총각들과 가족 넷이었다. 우리는 그 총각들과 친하지 않아 잘 알지 못했다.
박선일은 설교를 했다. 부모님은 매주 일요일마다 교회의 예배에 참석해 성경책을 읽고 찬송가를 불렀기 때문에, 나에게 설교는 꽤 익숙했다.
한국의 관습은 좀 웃기다. 아버지와 다른 아저씨들이 좋은 친구 사이면, 그들은 자신의 아들, 딸들을 서로 맺어주고 정략결혼을 시켰다. 이런 결혼은 너무 바보 같다. 예를 들어 아버지가 딸을 친구의 아들과 정략결혼 시켰는데 첫째 아들이 결혼 전에 죽으면 둘째 아들이 바로 형의 정략결혼을 물려받는다.
친구의 두 번째 아들이 갓 태어나 아버지의 딸보다 나이가 훨씬 어릴지라도, 이미 한 결혼 약속을 절대 깨지 않고 그대로 유지했다. 이러한 한국인 자녀들의 정략결혼은 큰 도시에서 가까운 메리다에서 주로 행해졌다. 우리 언니도 이런 방식으로 결혼했다.
▶언니는 행복한 결혼 생활을 누렸나
그렇지 않았다. 언니 부부는 행복하지 않았다. 언니는 열네 살이었지만 마치 성인 아가씨 같았고 매우 성숙했다. 언니는 18세의 소녀일 때 17세의 소년과 결혼을 했다. 비록 언니는 행복하진 않았지만, 자신이 처한 처지에서 할 수 있는 일은 없었다. 언니의 남편, 그러니까 형부는 황열병으로 세상을 떠났다.
▶학교는 다녔나?
다니지 않았다. 목장 근처에 학교는 하나도 없었다. 오직 도시 근처에만 학교가 있었다. 처음 나는 원주민 아이들과 놀면서 자연스럽게 원주민(마야) 언어를 배웠다. 그러나 아버지는 내게 이렇게 말하곤 했다, "원주민 언어를 배우지 말고, 차라리 스페인 언어를 배우거라!" 난 매일 오후에 나가 스패니시 소녀와 놀았고, 자연스럽게 스패니시를 배웠다.
오래 전 한국에서 소녀들은 학교에 가지 않았었다. 그 당시 학교에는 오직 소년들만 있었다. 아버지는 우리에게 한국어 자음과 모음을 가르쳤다. 내가 살던 곳은 너무 더웠던 탓에 나는 게을렀다. 나중에 아버지가 내게 한국어 단어들을 읽을 수 있는지 물었다. "아니요"라고 대답하니 아버지는 "알겠다. 굳이 한국어를 배울 필요가 없다. 그러나 어느 날, 네가 나이가 들어 한국어를 익히지 않은 걸 뼈저리게 후회할 날이 올 거다. 한국어를 배우지 않는다면 부모님과도 원활한 소통이 힘들지. 네가 한국어를 쓸 줄 모른다면 나중에 부모가 죽었는지 살았는지도 알 수 없게 될 거야"라고 충고하셨다. 이러한 아버지의 충고는 내가 한국어를 열심히 배우는 계기로 작용했다.
어머니는 스페인 박사 부인의 이름을 따서 내게 이름을 지어주었다. 당시 오빠는 많이 아팠고, 메리다에 있는 병원으로 갔다. 어머니는 병원 의사의 부인을 무척 좋아했고 결국 내 이름을 그 부인의 이름을 따 로사라고 지었다. 우리 부모님은 똑똑한 사람들이었다.
목장에서 4년간의 계약이 끝난 후에, 한국인들은 메리다로 갔다. 그때 아버지는 35살, 어머니는 30살이었다. 하지만 부모님의 삶이 더 나아지지는 않았다. 나중에 부모님은 공장에 취직을 했는데 유카에서 섬유조직을 빼내는 기계를 다루는 일을 했다. 이 일을 해서 하루에 50센트를 벌 수 있었고, 나중에 75센트, 그리고 1달러로 하루 임금이 올랐다. 어머니와 언니는 남자 셔츠를 손으로 직접 만들어 공급했다. 어머니는 바느질을 아주 잘해서 꽤 근사한 원주민 셔츠를 만들어냈다. 어머니와 언니는 열심히 일을 해서 셔츠 하나당 25센트를 받았다. 우리는 목장을 돌아다니면서 여러 일을 했지만, 여전히 생활고에 시달렸다.
가장 슬픈 일은 유행병이 퍼졌을 때였다. 가족들이 병으로 죽는 것을 보는 일은 견딜 수 없었다. 그때 모기에 물려 걸리는 황열병이 유행했다. 이 병은 퀴닌으로 고쳤다. 그러나 이 병으로 많은 사람들이 죽었다.
어머니는 1910년에 캄페체(Campeche)에서 돌아가셨다. 우리가 그 곳으로 이사 갔을 때 이미 유행병이 돌아 많은 사람들이 죽은 상태였다. 어머니는 동생을 출산하고 그 날 오후에 바로 돌아가셨다.
그러나 우리에게는 관을 만들 나무가 없었다. 그래서 우리는 어머니를 묻기 위해 문으로 관을 만들었다. 우리는 어머니의 관 속에 어머니가 한국에서 부터 가져온 웨딩드레스를 어머니의 시신 위에 올려놨다. 잠시 후 원주민 남자들이 웨건 종류의 차를 몰고 와 어머니가 누워 있는 관을 실어갔다. 아버지는 우리를 집에 남아 있게 하고, 그들과 함께 어머니의 시신을 묻었다.
여동생 마리아와 나, 남동생 필립은 황열병에 걸려 메리다로 떠났다. 우리는 한 달 동안 병원에 입원해 있었다. 우리에겐 친척들의 방문도 허락 되지 않았다. 오직 일주일에 한 번의 면회만 허용될 뿐이었다. 참으로 낯선 느낌의 병원이었다.
어머니가 돌아가신 후, 나는 세상을 잃은 것만 같았다. 아무것도 나를 행복하게 만들지 못했다. 나는 어린 여동생과 남동생을 돌볼 책임감에 부담을 느꼈고, 어머니의 부재가 너무 슬프고 힘들었다. 아버지는 2주에 한 번씩 우리를 보러 오셨다. 그 당시 나는 잠시 실어증에 걸려 갓난아이처럼 소리치고 울기만 했다. 그러자 아버지가 내게 말했다.
"네가 자꾸 이렇게 울고 아무 말도 하지 않는다면 다시는 너를 보러 오지 않을 거야."
그래서 나는 울지 않으려고 무척 노력했으나 눈물을 멈출 수가 없었다.
한달 후, 우리는 병원에서 나와 한동안 가족과 지냈다. 아버지는 목장으로 일을 하러 가야만 했다. 그런데 주변에 아이가 없는 한 가족이 있었고 그 가족이 우리를 입양하고 싶어했다. 그러나 그것은 합법적인 입양은 아니었고 단지 수양부모와 같은 방식이었다. 그 가족은 꽤 괜찮은 식료품 가게를 운영하며 후추, 곡물, 커피 등을 팔았다. 나는 그 가족을 위해 물 긷는 일을 했다. 그러나 수양어머니는 우리에게 친절한 사람이 아니었다. 우리가 잘못을 하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항상 무섭게 대했다.
방문객이 있었던 어느 날, 나는 밖에서 옷들을 빨고 있었다. 수양 어머니가 물었다. "성냥 어딨어?" 나는 "모르겠어요. 부엌 근처 어디쯤 있을 것 같아요" 라고 대답했다. 그런데 방문객이 가고 나서, 수양어머니는 나를 때리기 시작했 다. 빨래를 그때까지 다 끝내지 못했고, 성냥을 찾아주지도 않았기 때문이었다. 그녀는 뒤뜰에 있는 우물로 나를 밀어 넣었다. 수양어머니의 여동생이 마침 이 광경을 목격하고 나중에 나를 꺼내주었다. 수양어머니는 정말로 나를 죽이려고 했던 것같다.
아버지는 거리가 꽤 멀리 떨어진 목장에서 일을 했기 때문에, 우리를 자주 보러 오지는 못하셨다. 아버지가 우리를 만나러 왔을 때 나는 수양 어머니에게서 당했던 일을 말하지 않았다. 아버지를 보고 그냥 울기만 했다.
이경원 저·장태한 역
'외로운 여정'에서 전재
김영옥 재미동포연구소 제공
정리= 장병희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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