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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와이 대신 멕시코에 일가족이 노예로 팔려…"

육성으로 듣는 미주 한인 초기 이민사:외로운 여정(58)
유카탄의 한국인 노예들, 그리고 선우 로사(상)

사탕수수농장 인원 다 채우자
일본인들 한인을 노예로 팔아
첫번째 결혼 불행하게 끝났지만
두번째 선우 샘과는 성공한 재혼


역사가 선우 소니아는 미주 한인 구술사 프로젝트의 하나인 '한국의 만화경'을 집필한 작가이다. 소니아는 선우 로사를 할머니라고 부른다. 로사가 선우 샘과 두번째 결혼을 하면서, 소니아와 로사는 가족이 되었다.

선우 로사는 조선왕조가 멸망하던 시기에 중산층 가정에서 태어나 자랐지만, 1905년에 부모와 함께 멕시코 용설란 농장의 노예로 팔려 가는 배에 올랐다. 그로부터 거의 80년이 지난 후, 1990년 로사의 손자인 임크리스토퍼가 94세인 할머니를 찾아 잉글우드의 요양원을 방문했다. 크리스토퍼는 로사의 22명에 달하는 손자들 중 한 명이자, 독일에서 베테랑 쿵푸 강사로 활동하고 있다.

할머니를 만나고 돌아오는 길에 크리스토퍼는 코리아타임스 영문판의 뉴스 에디터로 일하는 선우 브랜다를 만나 할머니에 대한 이야기를 들려줬다. 로사는 작지만 놀라운 힘을 손자 크리스토퍼에게 불어넣어줬다.

"한국으로 가거라. 그곳이 너의 조국이고, 너의 가족이 살았던 곳이란다."

당시 크리스토퍼는 20년 이상 독일에서 살고 있던 터였다.

크리스토퍼는 할머니 로사로부터 한국에서 유카탄으로 떠난 이야기를 듣고 놀라움을 금치 못했다.

"할머니는 증조할아버지에 대해 자랑스럽게 말하곤 했 다. 증조할아버지는 일본군을 침략하기 위해 조직한 기갑부대에서 유일한 한국인이었다. 아마 증조할아버지는 멕시코에서 일하는 동안 점심시간에 짬을 내 다른 노동자들에게 말타기 기술과 무술 시범을 보여줬을 거라고 한다."

로사는 영어, 한국어, 스패니시, 마야 인디언 언어를 할 줄 알았다.

1975년에 선우 브랜다는 로사와 소니아를 동시에 만났다. 로사가 그 자리에 소니아를 데려왔기 때문이었다. 소니아는 사진신부 개척자 집안에서 태어났으며 샌프란시스코 토박이였다. 소니아의 남편과 역사가 선우 해럴드 박사 또한 인터뷰를 위해 LA에 있는 로사의 집을 찾았다.

로사는 여전히 아름다웠으며, 몸에 밴 고상한 매너를 보여줬다. 로사는 자신의 어린 시절과 미국에서의 첫번째 결혼에 대해 들려줬다.

소니아는 할머니 로사의 이야기를 이렇게 시작했다.

"로사가 초기 이민자로서 멕시코에서 겪은 어려움과, 첫번째 남편과의 불행했던 결혼 생활을 느낄 수 있을 것이다."

로사의 이야기는 멕시코 '노예 캠프'에서 초기 한국인 이민자들이 처했던 실상을 여실히 보여준다. 또한 그 당시 모든 한국인들이 분노했던 충격적인 이야기다. 로사의 개인적인 경험은 다른 사료에서 제기되는 궁금증을 말끔히 풀어준다.

로사는 네 명의 아들과 두 명의 딸, 그리고 수많은 자손들을 남기고 98세로 세상을 떠났다.

현재 78세인 로사의 딸 아니타는 캘리포니아 어바인에 살고 있으며, 최근에 이경원 기자와 자신의 어머니에 대해 인터뷰를 했다.

아니타는 로사를 정말로 멋지고, 한국 음식을 잘 만드는 어머니로 기억한다. 아니타는 임헨리와 결혼해 네 명의 아이들을 얻었고, 여덟 명의 손자들과 세 명의 증손자들을 봤다. 로사는 사진신부로서 아니타의 아버지와 결혼한 후, 자신의 어린 남동생 필립과 여동생 마리아를 캘리포니아로 데려왔다.

"어머니는 아버지와 이혼한 후 LA다운타운 근처에서 주류 판매점을 운영하던 선우 샘을 만나 재혼했다. 선우 샘은 매우 좋은 사람이었고 어머니에게 무척 잘했다. 두 분 사이에 아이는 없었다."



로사에게서 1903년부터 1905년까지의 역사를 들었다.

1903년 한국에서는 러일전쟁이 일어났다. 그 당시 일본인들이 강화도로 건너왔다. 그때 외가의 가족들이 미처 피신하지 못했기 때문에, 어머니는 여자 아이가 아닌 7세 소년으로 변장해 집안에 있었다고 한다.

우리 아버지는 15세에 군에 입대하여 병사가 되었다. 그러나 일본은 한국군을 해산시켰고, 군인이었던 사람들은 졸지에 아무 일도 할 수 없게 되었다.

한국군의 해산은 아버지가 하와이로 건너온 결정적인 계기가 되었다. 그 당시 우리는 하와이를 단지 '미국'이라 불렀다. 아버지는 자식들을 일본의 지배하에서 키우고 싶지 않았기 때문에 하와이로 이주하려 했다.

1905년에 1033명의 한국인들이 하와이행 선박에 올랐다. 그러나 하와이 사탕수수 농장주들은 한국인들에게 할당된 노동자 수가 다 채워지자, 더 이상 한국인들을 받지 않았다. 일본인들은 우리를 멕시코에 노예로 팔아 넘겼다.

우리는 그 사실을 알지 못했다. 부모님 또한 알지 못했다. 여전히 우리는 하와이로 갈 것으로 예상할 뿐이었다. 가는 동안 뱃멀미 때문에 계속 토하고 몸이 아팠지만 어머니는 하와이 가는 것을 학수고대했다. 그러나 40여 일이 걸려 도착한 곳은 하와이가 아닌 멕시코였다. 5월 초에 그곳에 도착했던 것으로 기억한다.

우리는 멕시코, 더 정확히 말하면 서쪽으로 한참 내려와 있는 도시 유카탄으로 갔다. 그곳엔 원주민들이나 마야인들 외엔 아무도 없었다. 멕시코에 도착한 한국인들은 스페인 농장주들에게 보내졌다. 주인들은 각 목장마다 30, 40여 명으로 나누어 한국인들을 데려갔다. 우리는 노예로서 그곳에서 4년의 세월을 보내야만 했다.

한국에서 우리는 결코 가난하지 않았다. 우리 할아버지는 강화도의 시장까지 지낸 분이었다. 하지만 멕시코에서 우리는 돈 한 푼 없었고, 스패니시를 할 줄도 모르는 극빈층에 속했다. 이런 상황에서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이란 목장에 머무는 것뿐이었다. 우리가 유카탄에서 머문 목장 이름은 수쿠였다. 통나무집 한 채에 한 가족이 살았기 때문에, 그렇게 혼잡스럽게 살았던 것 같진 않다.

우리 아버지는 유카를 베는 일을 했다. 유카는 길게 자라나는데 끈적한 것이 묻어 나왔다. 그 끈적거리는 것으로 인조견을 만든다. 노동자들은 마대 자루와 밧줄을 이용해서 일을 했다.

어머니는 계속 울기만 했다. 집 밖에 나가지도 않았고 일도 하지 않았다. 여자들은 돈을 벌고 싶어도 그렇게 하지 못했다.

때로는 사람들이 아프면 일을 나가지 못했다. 그러면 원주민 목장 주인이 말채찍으로 아픈 사람들을 때렸다. 그들은 우리를 완전 동물 취급했다. 우리가 그곳에서 도망치려 했다면, 우리는 심한 채찍질을 당했을 것이다. 이 일은 우리 아버지에게 실제로 벌어졌다. 아버지는 언니가 결혼할 남자를 직접 보기 위해 잠시 농장을 떠나야 했었는데, 그때 아버지는 심한 채찍질을 당했다. 아버지는 맞은 고통이 너무 심해서 아침까지 일어날 수 없을 정도였다. 감독관이 집에 찾아와서 아버지가 어디에 있는지 아느냐고 물었는데, 그때 우리는 거짓말로 아버지가 관광을 갔다고 말했더니, 아버지는 결국 나중에 감옥에 갇혔다. 우리는 감옥에 있는 아버지에게 음식을 가져다줄 수도 없었다.

다행히 우리에게는 한국에서 가져온 작은 차주전자가 있었다. 뜨거운 옥수수 가루로 죽을 만들어 주전자에 넣고 주전자 주둥이를 아버지의 입에 갖다 대어 죽을 먹게 했다. 우리 모두 어려운 시간을 보냈고, 나는 항상 슬펐다.

그 일로 아버지는 다시는 일을 하지 못하게 되었다. 아버지가 가시로 뒤덮인 유카를 재배하면서 많은 상처를 입었고 그 때문에 고통에 시달렸다. 가시 달린 유카를 잘라 묶는 일을 했기 때문이다. 그 힘든 일을 하고 겨우 페니 한 개를 받았다. 아버지는 하루 종일 일해야 3~4페니 정도를 벌 수 있었다.

나중에야 아버지의 몸 상태로는 그러한 일을 할 수 없음을 알게 됐다. 그래서 아버지는 한동안 벽을 만들기 위해 돌을 쌓는 일을 했다. 그러나 아버지는 항상 맞은 몸으로 집에 돌아왔다. 떨어진 돌에 맞은 아버지의 다리는 항상 피투성이였다.

한 가지 재미있던 사실은 원주민 목장 주인들이 우리가 밥을 먹어야 한다는 것을 알았다는 거다. 그래서 그들은 밥을 해서 약간의 채소와 함께 우리에게 주었다. 그러나 우리는 그것을 먹지 않았고, 이렇게 살 수 없다며 그들에게 호소했다. 그러자 그들은 각 가정당 몇 파운드의 쌀과 옥수수, 콩 등을 배급했다. 우리 집 앞에는 작은 마당이 있었는데, 아버지가 호박씨를 얻어 와 그곳에 심어 텃밭을 일구었다. 우리는 마당의 텃밭에서 콩, 옥수수, 호박 등을 키워 먹었다.

이경원 저·장태한 역
'외로운 여정'에서 전재
김영옥 재미동포연구소 제공
정리= 장병희 기자

◆책구입: hotdeal.koreadaily.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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