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카탄 오지에도 한글학교 세우고 2세들 지도
육성으로 듣는 미주 한인 초기 이민사:외로운 여정(56)
아시안 아메리칸 민권운동가 게일 황 (중)
한인 이민사 알기 위해서
구술받는 프로젝트 시작
유카탄 한인들의 삶 보면서
이민사에 대한 관심 깊어져
부모로부터 우리의 역사와 자아의식에 대한 대답을 들을 수 없어 브랜다와 나(게일 황)는 1969년에 코리안 아메리칸 구술사 프로젝트를 시작했다. 직접 초기 이민자들을 찾아가 그들로부터 그들의 경험을 듣고자 한 것이다. 첫 번째로 나의 할아버지인 황사선 목사를 인터뷰했다. 이 인터뷰를 통해 나는 처음으로 미주 한인 역사에 대해 알게 되었다. 또한 나의 외할머니인 신선희 여사도 인터뷰했는데 사진 앨범을 보면서 더 많은 의문이 생겼다. 윌로스 비행학교에서 파일럿이 되기 위해 배우고 있는 한인 사진, 네브래스카에서 군인 훈련을 받고 있는 사진, 대한인국민회보인 신한민보 사진 등을 앨범에서 찾았다.
신한민보를 읽으면서 대한인국민회 지회가 멕시코시티에도 있다는 것을 발견했다. 나는 흥분한 상태에서 대한인국민회 멕시코시티 지회의 주소를 적어놓고 소중히 보관했다. 몇 달 후 나는 멕시코로 갈 수 있었다. 이때 아들 크리스는 겨우 세 살이었고 나는 교사로 2년 동안 일했다. 미국에서 민권운동이 시작된 직후였다. 남편은 멕시코 푸에블로에 있는 아메리카스 대학에서 대학원을 다니며 3년 동안 체류하기로 되어있었다. 푸에블로에서 멕시코시티까지는 1시간 30분 정도 거리로 가까운 편이었다. 김수권씨가 대한인국민회 멕시코시티 회장이라는 사실도 알게 되었다. 멕시코시티에 도착 후 김수권 회장에게 전화를 했고 그는 우리 가족을 집으로 초대했다. 1973년 4월 20일, 무려 5시간 동안 인터뷰를 하면서 김 회장은 자신의 삶을 들려주었다.
나는 김수권 회장에게 자신을 한국인 혹은 멕시칸으로 생각하는지 물었다. 그의 대답은 "나는 정신적으로 한국 사람이고 한국을 사랑한다. 그러나 법적으로는 멕시칸이다"였다. 김 회장은 당시 83세였는데 정신은 매우 맑았고 나에게 유카탄에서 성장한 박호세 산체스라는 또 다른 한국인을 소개해줬다.
박씨 집에 도착해 나는 그에게 멕시코 한인 역사에 대해 질문하고 싶다고 했다. 그러나 그의 대답은 책을 쓰고 있기 때문에 질문에 대답할 수 없다고 했다. 그는 스패니시로 말했는데 내가 스패니시를 조금 말할 수 있었기 때문에 서로 대화할 수 있었다. 처음에 그는 나에 대해 의심이 매우 많았다. 그는 조그만 체구에 마른 편이고 고집이 센, 강한 성격의 소유자였다. 2시간 정도 지나자 그는 나에 대한 의심을 풀기 시작했고 서로를 이해하게 되었다. 인터뷰가 끝날 때쯤 그는 나를 '파이사나' 즉 동지라고 불렀다.
그는 유카탄반도에서 자랐다. 한국인들은 노예 취급을 당하며 매우 가난한 환경에서 고생했다. 많은 한국인들이 메리다에서 살고 있었는데 그들은 거의 거지였다. 그 이야기를 듣는 순간 나의 호기심을 자극시켰다.
"그곳을 방문할 수 있을까요?"
그는 유카탄까지 우리를 데려다 주었고 그곳을 방문하면서 지금까지 거의 알려지지 않은 역사를 새로 발굴한다는 것에 놀랍고 기뻤다. 나는 멕시코 한인들의 삶의 현장을 보면서 지금까지 내가 전혀 몰랐던 새로운 사실들을 알게 된 놀라운 경험을 하게 된 것이다.
박씨는 멕시코 한인 이민사에 대한 책을 쓰고 있었다. 특히 한인 2세와 3세들은 그들의 선조가 경험한 것을 전혀 모르는 데다 오히려 지어낸 이야기라고 생각한다. 그는 스패니시로 책을 쓰고 있는데 누군가 한국어로 번역해주길 기대하고 있다.
레판의 아시엔다(대농장)에서 1920년부터 1931년까지 일했던 그는 그곳을 다시 방문하면서 매우 들떴다. 푸에블로에서 비행기로 1시간 30분이면 유카탄에 도착할 수 있지만, 우리는 1957년형 시보레 자동차를 타고 1000마일의 거리를 달려 수일 만에 도착했다. 호세, 그의 부인, 나의 남편과 아들, 그리고 나까지 다섯명이 긴 자동차 여행에 동행했다. 우리는 2주 동안 메리다 근처에서 머물면서 네 명의 한인 가족을 만났다.
안토니오 송은 레판에 처음 온 한국인으로 유카탄 여성과 결혼해 살고 있었다. 카타리나 에바라 송은 그녀의 이름인데 딸 여섯명 그리고 아들 세명을 합쳐 무려 아홉 명의 자녀가 있고, 50명이 넘는 손자와 손녀들을 뒀다. 그들은 집에서 밥과 김치를 먹었다.
메리다에서 레판에 갔을 때 박씨는 자신이 살던 집이 아직도 그대로 보존 되어 있다는 사실에 놀랐다. 무려 40년이 지났지만 별로 변한 것이 없었다. 우리는 아시엔다 농장을 걸으면서 한인 노예들의 일상을 되짚어보았다. 그는 당시 아주 뜨거운 태양 밑에서 아시엔다 가시를 자르고 꾸러미로 묶는 노동이 정말 힘든 작업이었다고 회상했다. 여자들은 아이들을 돌보고 남편의 뒷바라지를 했다.
우리는 근처의 또 다른 마을을 찾았는데 누가 우리 마을에 한국인 여성이 살고 있다고 알려주었다. 우리는 비포장 도로를 달려 그녀를 만났다. 또 메리다에 가서 다른 한인 가족들을 만나 함께 저녁 식사를 했다. 인터뷰를 할 때마다 나는 새로운 역사적 사실을 배우게 됐다. 새로운 역사를 발굴하는 작업을 하면서 나는 몹시 흥분됐다. 한국인 정신과 문화가 얼마나 강한지 인터뷰를 통해 배우면서 다시 한 번 놀랐다. 3월1일과 8월15일에는 멕시코 한인들이 전부 모여 경축일을 기념한다. 한인들이 모여 사는 곳에서는 어김없이 한글학교를 설립해 2세들에게 한글을 가르쳤고, 대한인국민회 지부도 설립했다. 모든 것이 힘든 상황에서도 이루어낸 기적이다.
이경원 저·장태한 역
'외로운 여정'에서 전재
김영옥 재미동포연구소 제공
정리= 장병희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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